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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의 그림철학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26) 클로드 모네 ‘임종을 맞는 카미유’

이주향 | 수원대 교수·철학

ㆍ삶과 죽음의 경계를 그리다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리면서 고흐가 말했습니다. “테오, 내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타라스콩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듯이 별들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해.” 아마 그때 그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고, 죽음이 두렵지 않을 정도로 별들이 가까웠나 봅니다. 이번 오르세 미술관전에서 눈여겨보게 된 그림 중에는 직접적으로 그 죽음을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바로 모네의 그림, ‘임종을 맞는 카미유’입니다.

꿈처럼 모호하고 환상처럼 아련하기만 한 저 그림은 제목처럼 임종의 순간을 그린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고 있는 저 여인 카미유는 임종의 순간에 서른두살이었습니다. 세상에, 그리도 젊은 몸에 들이닥친 혹독한 세파는 무엇이었을까요? 가장 직접적인 것은 자궁암이었습니다. 박명한 생애를 살다 가는 애달픈 아내를 바라보는 가난한 남편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카미유가 시댁의 냉대와 가난 그리고 병고에 시달리며 죽어가고 있을 때 모네는 이미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렇다해도, 아니 그래서 더더욱, 긴긴 가난의 터널 속에서 어린 두 아이를 남긴 채 죽음으로 빠져드는 착한 아내의 주검을 바라보는 젊은 남자의 심정은 얼마나 복잡했겠습니까? 모네는 이렇게 썼습니다.

“어느 날 무척 사랑했던 사람이 죽어갑니다. 점점 창백해지는 그녀의 얼굴, 그 얼굴에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그 얼굴을 관찰하고 있는 내 자신을 깨닫고는 나도 놀랐습니다. … 내가 그토록 아꼈던 그녀의 모습을 붙잡으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기질적으로 변화하는 그녀의 얼굴빛들에 대한 전율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모네는 그 끔찍한 고통을 관찰의 힘으로 견뎠던 것 같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카미유의 얼굴빛을 관찰하며 임종을 지켰던 거지요. 그림이 없었다면 그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죽어가는 아내를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무기력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지탱할 수 있었을까요? 그림을 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카미유를 참 편안하게 느꼈다는 사실을.

그림 속에는 삶이 빠져나와 희미해진 육체의 느낌이 고스란히 남아있지 않나요? 만일 죽음이 그저 무섭고 두려웠다면 희미하게 혹은 홀연하게 영원으로 사라져가는 저 느낌을 담아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경직된 죽음의 형체가 섬뜩하도록 또렷한 느낌으로 남지 않았을까요?

그나저나 카미유는 남편의 여자를 알았을까요? 알았겠지요? 그녀의 병간호를 해준 것도 그 여인 알리스였으니! 모네는 나중에 카미유가 불평 한마디 없이 죽어간 것을 비통해했다고 합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불평 한마디 없이 죽어간 여자는 그 버림받음으로 생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고 에너지를 삼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 그림에는 내 남자를 용서하고 내 남자의 여자를 용서하고, 아니, 용서할 것도 없이 세상의 질서를 깡그리 망각하고 마침내 자신도 망각해가는, ‘아(我)’와 ‘무아(無我)’의 경계가 보입니다.

보이나요? 형체가. 겨우 얼굴의 형체만 남아있지요? 저 그림은 형체를 지우며 사라져가고 있는, ‘아’와 ‘무아’의 경계를 그린 것입니다. 툭, 건드리면 그나마 무너져 연기처럼 완전히 사라질 것 같은 삶의 마지막 순간! 나는 생각합니다. 대상이나 형체를 지워가며 색조만 남기고 있는 것은 저 작품의 위대함이라고.

함민복 시인이 말했습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아’와 ‘무아’의 경계에서 피는 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이 들수록 아름다워지는 잘 익은 생(生), 아닐까요? 저 그림 앞에 섰는데, 왜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의 주인공 마리아가 생각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집착과 사랑의 경계에서 자유를 본 마리아의 말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던 카미유의 심정이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남자를 잃었을 때 상처를 받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오늘 확신한다. 어느 누구도 타인을 소유할 수 없으므로 누가 누구를 잃을 수도 없다는 것을. 진정한 자유를 경험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소유하지 않은 채 가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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