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영복 변방을 찾아서

(8)
[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8) 봉하마을 신영복 | 성공회대 석좌교수ㆍ작은 묘역에 울리는 커다란 함성 사람사는 세상 봉하로 가는 길은 멀었다. 봉하가 멀다는 것은 물론 거리 때문만은 아니지만 지난 2일 서울에서 아침 8시에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그야말로 고속으로 달려 오후 1시경에야 겨우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멀고 작은 시골 마을이 지금은 연간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변방의 창조성을 이처럼 분명하게 보여주는 현장이 달리 있을 것 같지 않다. 온 국민이 오열했던 비극의 현장, 작은 고인돌 하나로 남은 묘역이 그 변방의 고독을 떨치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도약하고 있었다. 변방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봉하 묘역에는 주중임에도 불구하고 참배객들이 끊임없이 당도하고 있었다. 나는 49재 이후 3년 만의 참배이다. 묘역은 ..
[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7) 서울특별시 시장실 신영복 | 성공회대 석좌교수 ㆍ‘서’는 권력의 산, ‘울’은 민초의 물처럼 더불어 가라는 뜻 1994년은 조선조 태조가 수도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긴 지 600년 되는 해였다. 예술의 전당에서는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을 기념하는 서예전이 기획되었고 나는 주최 측으로부터 출품 요청을 받았다. 서울을 주제로 한 작품을 출품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물론 서예가가 아니고, 저명인사도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사양했다. 그랬음에도 나는 출품과 관계없이 나 혼자서 서울을 주제로 한다면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된다. 당시 서예전을 기획하고 추진했던 이동국 차장의 청탁이 간곡하기도 했다. 생각하면 서울은 참으로 아름다운 풍수지리를 갖추고 있고 그 위에 600년 역사가 켜켜이 누적된 땅이다. 서울의 ..
[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6) 전주 이세종 열사 추모비·김개남 장군 추모비 전주 |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ㆍ갑오년 그리고 80년 5월, 그들의 혁명은 실패가 아니다 전주는 20년 수형 생활의 마지막 3년을 보내고 출소한 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전주는 내게 커다란 햇볕이다. 교도소의 문을 열고 걸어 나올 때 온몸에 쏟아지던 그 8월의 햇볕이다. 신문지만한 햇볕 한 장 무릎에 얹고 마냥 행복해하던 겨울 옥방의 그것에 비하면 8월의 뜨거운 햇볕은 환희였고 생명이었다. 그리고 전주교도소에는 또 하나의 추억이 있다. 노래 ‘떠나가는 배’가 그것이다. 출소 일주일 전쯤 우리는 신입자로부터 이 노래를 배우게 된다. 그러다가 석방 이틀 전 가족접견 때 은밀한 출소 소식을 듣는다. 우리 감방에서 내가 가장 오래 복역했지만 차마 출소사실을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함께 노래를 부르게 된다. “..
[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5) 오대산 상원사 신영복 | 성공회대 석좌교수 ㆍ시대와의 불화와 긴장, 그 자체가 지혜 아닐까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文殊殿)’ 현판은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의 부탁으로 썼다.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정념 스님은 당시 상원사 주지로 계실 때였는데 상원사가 화재를 입고 나서 법당과 선원을 분리하여 지으면서 현판을 다시 달아야 했었다. 상원사 입구의 표석글씨도 그 때 함께 쓴 것이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보살이다. 불자가 아닌 나로서는 ‘지혜’의 의미를 현판에 어떻게 담아야 할지 난감하였다. 달포 이상 장고했다고 기억된다. 생각 끝에 결국 세 글자를 이어서 쓰기로 했다. 분(分)과 석(析)이 아닌 원융(圓融)이 세계의 본 모습이며 이를 깨닫는 것이 지혜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짧..
[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4) 홍명희 문학비·생가 신영복 | 성공회대 석좌교수 ㆍ약자 임꺽정의 피신처 ‘산’… 내 겨울 감방을 추억한다 ‘벽초 홍명희문학비’는 1998년 홍명희 30주기, 연재 70주기를 기념한 제3회 홍명희문학제 때 건립되었다. 그때는 글씨만 써 보내고 제막식에는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이 초행이었다. 찾기가 쉽지 않았다. 문학비는 주차장이 되어 있는 텅 빈 제월대 광장 가장자리에서 혼자 가을볕을 안고 있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 간 붓으로 글자에 먹을 넣기 시작했다. 비문은 먹빛이 바래고 빗물에 씻기어 읽기 어려울 정도였다. 취재팀 일행 세 사람도 작업에 동참하였다. 작업이 거의 끝날 무렵에 문학비 건립 추진위원회의 운영위원이기도 한 도종환 시인이 당도했다. “1998년 비를 세울 땐 도지사와 군수도 참석하고 제월리 마을 사람들이 ..
[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3) 박달재 신영복 | 성공회대 석좌교수ㆍ잊혀진 비련·밀려난 고갯길… 아픔을 정직하게 만나는 곳 2008년, 벌써 3년 전의 일이다. 제천시 문화관광과로부터 부탁을 받고 박달재 현판글씨를 쓸 때였다. 글씨를 쓰기 전에 먼저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를 찾아서 들어 보았던 기억이 있다. 노래의 정서를 조금이나마 글씨에 담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널리 알려진 한국인의 애창곡이다. 오늘 아침 박달재 현판을 보러가기 전에 나는 에서 다시 한 번 박달재 노래를 들어보았다. 왕거미가 집을 짓고, 부엉이가 울고, 도토리묵을 싸고, 성황님께 비는 등 그 서사적 표현이 박달재의 애달픈 사연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낮은 음에서 서서히 음계를 높여가는 가락도 그렇다. 서..
[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2) 강릉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신영복|성공회대 석좌교수ㆍ아직도… 세상 바꾸려 한 허균 남매의 ‘어리석음’이 절실 현판은 허난설헌 생가 터에 세워진 기념관 입구에 걸려 있다. 기념관은 자그마한 한옥이다. 많지 않은 관광객이 떠나고 난 뒤 나는 현판을 혼자서 대면해 본다. 허균·허난설헌 선양회 유선기 이사의 부탁으로 2006년에 쓴 것이다. 액자도 없이 평판에 죽각으로 새긴 소박한 현판은 마치 허균 남매의 모습인 듯 잔잔한 감회를 안겨준다. 유선기 이사와 임영민속연구회의 김석남 선생은 크지 않은 기념관을 못내 서운해하지만 나는 마당 가득히 고여 있는 초가을 햇볕 속을 걷는 동안 변방 특유의 한적함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저만치서 안내자의 핸드마이크를 따르던 20여명의 관광객이 사라지고 나자 허난설헌 생가는 문득 빈집이 된다. 우리는 영정..
[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1) 해남 송지초등 서정분교 최희진 기자 daisy@kyunghyang.com ㆍ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곳, 변방이 희망이다 작고 낡은 교문은 비좁은 시골길 옆 비탈 위에 있었다. 구불거리는 도로를 앞만 보고 내달렸다면 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지나쳤을 것이다.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 9일 서울에서 자동차로 6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의 서정분교다.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대로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았고 교문으로 올라가는 길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언제 폐교될지 알 수 없어 외관에 투자를 거의 하지 않은 탓이다. 아이들이 서울에서 온 낯선 손님들을 어려워하지 않을까 걱정도 됐다. 그러나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이 모든 것은 외지인의 편견과 기우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았다.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저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