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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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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과의 대화](30)해방이 되자 난 하루종일 태극기를 그려 집집마다 나눠주었어 소설가·평론가 김형수=일제강점기 이야기를 선생님처럼 실감나게 들려준 분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이 겪은 식민지 경험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끝나는 방식이었다고 한 브루스 커밍스의 말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해방은 어떻게 왔습니까? 고은=감격! 감격이란 단어보다 먼저 감격을 경험했어. 시학이나 시론에 훨씬 앞서 태초에 시가 있는 것처럼 말이네. 감격이란 하나의 춤이었어. 저절로 절로 나오는 춤이었어. 옛말에 절로 노래하고 절로 춤추네(自歌自舞)가 있는 것도 이런 감격의 맥락일 것이네. 김형수=세상의 모든 것, 대지와 동물, 풀과 나무, 바람과 물결이 일제히 몸을 흔드는, 그 움직임이 모두 춤이 되는 사태를 말씀하시는 거죠? 휘트먼이 언젠가 미국이 노래하는 걸 들었다고 했듯이 ..
[고은과의 대화](19)어릴 적에 최치원의 시와 글 읽으며 문자와 친해졌지 소설가·평론가 김형수=식민지 시대 농사꾼의 존재란 논두렁에 내린 이슬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황새처럼 들에 나타나 역시 들에서 자취를 감추기 마련이련만 어찌 루소를 만나고 고흐를 그리고 또 먼 대륙들을 꿈꾸었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고은=누군가가 아시아 농업풍경을 함부로 왈가왈부한 적이 있어. 자바사람의 일거리는 1년에 65일뿐이고 한국의 농부는 100일만 일을 하고 일본인은 140일 일하고 인도 데칸에서는 다섯 달의 농한기가 보통이고 복합추수기 한 대로 중국 농촌의 한 마을 전체가 할 일을 해낸다는, 이 단정으로 보자면 아시아 농민들의 한가함과 나태함을 비아냥거리는 느낌도 없지 않지. 하지만 식민지 시기의 조선 농촌은 가난의 평등만이 평등의 의미가 있는 전천후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생..
[고은과의 대화](18)굶주렸던 다섯 살에 첫 대면한 별, 내 눈엔 밥으로 보였어. 별밥 소설가·평론가 김형수: 선생님의 미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저번에 실마리를 많이 얻었습니다. 그래도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던 소년 고은태의 영혼과 부딪쳐 서정적 파장을 일으킨 것들에 대해 조금 더 듣고 싶은데요. 그때와 지금은 지상의 풍경이 많이 다르지요? 고은: 요즘의 십대 이하나 십대의 아이들 대부분은 안경잡이가 되어 있는데 이런 현상은 도시생활, 특히 아파트단지의 생활을 통해서 자라나는 데 그 까닭이 있을지 몰라. 바라보는 대상이 거리 양쪽의 건물이고 창밖의 아파트 건물이니 그 시야가 차단되고 말지. 그러므로 가시공간의 크기가 없어지므로 시력이 퇴화되기에 알맞지. 김형수: 그래서 생기는 현상일까요? 옛날에 실재하던 세계가 지금은 가상이 되어버린 예가 많습니다. 저는 현대 판타지에서 영적 움직임을 ..
[고은과의 대화](17) 달밤, 마당 뛰쳐나와 춤추던 아버지… 난 그 신명을 물려받았지 소설가·평론가 김형수: 선생님의 시에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읽은 기억이 없는데요. 소년기부터 무겁고 장중한 갑옷 같은 사회 틀, 또 제도 따위와 무수한 마찰음을 낳았던 정신, 그 놀라운 생명체의 태반을 지금은 어떻게 포착할 수 있을지, 그것은 앞으로도 ‘미래의 고은’들을 낳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한 정신의 탄생과 부모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고은: 부모란 세상의 모든 추상을 무력하게 만들지. 그래서 노장(老莊)한테는 부모의 의미가 없고 공맹(孔孟)한테나 그것이 자리잡고 있어. 플라톤 봐. 헤겔 봐. 그네들의 이데아나 관념에, 그 화려한 추상세계의 어디에 부모라는 것이 있는가. 아니, 부모를 삼강오륜 따위의 틀에 집어넣는 것 자체가 부모를 괜히 추상화하는 건지 몰라. 김형수: 그 많은 부모 ..
[고은과의 대화](16) 말 없고 투박했던 어머니… 내 언어의 표현부족도 그 탓인지 소설가·평론가 김형수 = 그간 선생님의 어린 시절 안에서 시간, 주체, 자의식, 대지 등 꽤 많은 이야기가 확장되어 나왔습니다. 오늘은 어머니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고은 = 저 오래전의 인류 난혼(亂婚)시대와 모계사회는 어쩌면 층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겹치는 동시 진행인지 모르겠어. 아비 모르는 새끼를 길러내는 일은 전적으로 어미의 몫이어서 그런 사실로부터 인류의 영원한 근원성인 모성이 이루어졌을 것이 틀림없어. 그 이래의 부권이라든가 가부장제 사회라는 것은 전쟁이라든가 힘을 발휘하는 노동이나 통치로서의 폭력이 생존의 필수품이 되면서 모계의 위상이 박탈당한 것이겠지. 남존여비는 이 점에서 힘의 산물이지. 김형수 = 가끔 문단 선배님들의 우스갯소리에서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는 합니다. 어떤 분의 아버지가 ..
[고은과의 대화](15) 농경시대 유산 ‘씨족 정서’ 그 친화의 공동체야말로 소설가·평론가 김형수=겨울이 깊어가느라 그러는지 찬바람 속에서 생명의 스산함이 느껴집니다. 군산 들판은 잘 있을까요? 지난번에 대지 이야기를 하실 때 궁금했는데, 그곳에 선생님의 풍경이 있었습니까? 단양팔경, 관동팔경 같은 것 말입니다. 고은=나는 풍경광(狂)이라네. 그런데 인간이 끝나는 데서 풍경이 시작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풍경을 통해서 인간 제백사를 잊어버리고 싶다는 것과 아예 인간 혐오를 내비치는 것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풍경론은 풍경 속의 인간이나 인간의 삶이 결코 풍경 자체와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네. 그러므로 내 어린 시절의 지워지기 쉬운 기억 밑창에 남겨진 고향 일대의 풍경이야말로 풍경 이상이기도 하지. 아니, 풍경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의 풍경들의 이전인지 몰라. 김형수=외부의 시선..
[고은과의 대화](14)고향 할미산서 본 장항제련소 굴뚝 연기는 열애의 대상이었어 소설가·평론가 김형수=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가다 군산평야를 지날 때면 엄청난 크기의 어둠을 만나게 됩니다. 그 깊은 어둠의 틈바구니에서 ‘만인보’의 영혼이 눈을 떴다! 생각하면 벅찬 감회가 없지 않습니다. 고향이 갑오농민전쟁 전적지에서 가까운데 무슨 관계가 있지는 않습니까? 고은=내가 태어난 곳은 이를테면 정읍, 고창이나 순창, 김제, 부안, 완주 그리고 전주 일대의 외곽 지대였으므로 갑오농민전쟁 병력의 근거지는 아니었네. 그 전쟁 후반에 이르러서야 지원세력으로 참여하거나 군량과 죽창 따위 무기 제작 따위의 병참 인력으로 동원되었지. 김형수=조선은 중원의 시(詩)·사(史)·철(哲)에 통달한 유교적 시인들이 500년 동안 운영해온 유서 깊은 나라였습니다. 일제가 들어왔을 때 토착세력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그..
[고은과의 대화](13) 어머니 거울은 어린 내게 유일한 상상 공간의 첫걸음이었지 고은 소설가·평론가 김형수 = 인간의 정신이 탄생하는 때는 언제일까요? 타자를 발견하고 세상의 형상을 얻으며 자아의 모험을 처음 시작하는 순간 말입니다. 고은 = 정신의 탄생이란 그 기원은 안개 속인지 몰라. 정신분석학의 자아형성 단계론에 ‘거울 단계’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공교롭게도 내가 서너 살 때 이런 학설이 생겨났다네. 인간이 자아를 알게 되는 것은 그리스 신화 속의 나르시스처럼 물속의 제 미모를 처음부터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거울 속의 자신을 자신인 줄 모르다가 차츰 거울보기의 반복을 통해서 거울 속의 자아와 실제의 자아를 합치시키는 과정이 생겨난다네. 김형수 = 선생님의 그런 체험을 기억하실 수 있나요? 그림 | 임옥상 화백고은 = 나 역시 어머니나 그 밖의 가족에 의해서 나의 존재가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