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소설가·평론가 김형수 = 인간의 정신이 탄생하는 때는 언제일까요? 타자를 발견하고 세상의 형상을 얻으며 자아의 모험을 처음 시작하는 순간 말입니다.
고은 = 정신의 탄생이란 그 기원은 안개 속인지 몰라. 정신분석학의 자아형성 단계론에 ‘거울 단계’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공교롭게도 내가 서너 살 때 이런 학설이 생겨났다네. 인간이 자아를 알게 되는 것은 그리스 신화 속의 나르시스처럼 물속의 제 미모를 처음부터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거울 속의 자신을 자신인 줄 모르다가 차츰 거울보기의 반복을 통해서 거울 속의 자아와 실제의 자아를 합치시키는 과정이 생겨난다네.
김형수 = 선생님의 그런 체험을 기억하실 수 있나요?
고은 = 나 역시 어머니나 그 밖의 가족에 의해서 나의 존재가 시작되었겠지. 언젠가 무논의 물에 얼핏 내비친 어린 내 그림자를 보았겠지. 하지만 그 물속의 그림자가 나 자신인 줄이야 어찌 알았겠나. 물가에 앉은 새와 새 그림자도 이와 다를 바 없지. 뒷날 어머니의 경대 거울 속에 나 자신의 얼굴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흠칫 했어. 그것은 거울 속에 사람이 하나 들어있다고 여겼던 것이지.
김형수 = 새가 물에 비친 그림자를 알아보면 서사가 태어나는군요? 인간의 탄생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고은 = 거울을 명경(明鏡)이라 불렀어. 그 밝다는 뜻이 무색했지. 이런 오해는 뒷날 내 소년시절 동네에서 한두 대밖에 없는 유성기에서 판이 돌아가며 애 끓이는 노래가 들릴 때에도 유성기 속에 노래하는 사람의 목이 잘려진 채 들어 있어서 그 목의 입이 서럽게 열려서 노래가 나오는 것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 하고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지. 아니 이런 엉터리 정보들은 두메마을마다 정정되지 않는 당당한 정보로 통용되고 있었어. 심지어 한국전란 당시 인공 삼 개월의 인민군 세상일 때 미 공군의 그라망 전투기는 프로펠러가 달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투기였지. 그러다가 프로펠러 없는 제트 전투기가 나타났는데, 그 전투기를 우리는 호주기(濠洲機)라고 했어. 이승만의 처갓집 비행기라 하기도 했어. 이승만 부인 프란체스카가 오스트리아의 한 이혼녀인 것이야 훨씬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 당시는 오스트리아(오지리)를 오스트레일리아(호주)로 잘못 알고 있는 데서 호주 처가 나라에서 그 괴상한 비행기를 보내주어 인공시대의 주요 목표물을 폭격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지.
김형수 = 그런 불확실성의 지혜에 저도 얼마나 빚을 지고 자랐는지 모릅니다. 장터에서 이빨 빠진 사자성어들을 마구 찍어내던 장꾼들의 입담을 통해 세상을 배워가기 시작했거든요. 정돈되지도 않고 연관도 없어 보이는 무차별적인 이야기 안에, 그러나 세계를 작동시키는 구조를 밝히는 경이로움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나는 꼼수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디지털 시대에도 질펀한 민간 미디어가 살아 있구나, 싶더라고요.
고은 = 내가 나를 처음 알게 된 것도 이런 엉터리 정보의 환경, 그러니까 무지몽매한 상태에서 어렵사리 나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지. 근대의 나는 고사하고 고대의 나도 아니었어. 이 사실은 구석기 시대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오세아니아 섬의 원주민에게서도 그대로 유추하게 되겠지. 요컨대 나는 원시시대로부터 나를 시작한 것이야. 그렇다면 나 하나의 일생에는 인류사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 이전부터의 전 과정이 압축되어 있는지도 몰라. 그래서 한 티끌에 온 우주가 들어 있는 것(一微塵中含十方) 아니겠는가.
김형수 = 저도 어느새 티끌 하나에 감춰진 우주, 찰나에 내장된 장구한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버릇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라고만 해도 선생님의 전신(前身)이 금방 떠오르는데요.
고은 = 어머니의 거울은 어린 나에게 거의 유일한 내 상상 공간의 첫걸음이었어. 그것밖에는 나에게 신기하거나 유난한 주목이 요구되는 사물의 환경은 없었으니까. 요즘의 아이들에게는 지천으로 둘러싸인 장난감이나 인형 따위도 놀이기구 따위도 배치될 처지가 전혀 아니었어. 그래서였을지 모르는데 어머니가 밭에 나가 있거나 할 때는 나는 그 수은 일부가 벗겨져 있는 경대 거울 속의 나를 통해서 나라는 것에 점점 익숙해졌지. 그러다가 마을의 다른 아이들을 보면 그들보다 훨씬 파리한 내 흰색 얼굴 안의 볼품없는 이목구비, 어디 하나 압도되는 힘이 붙어있는 데가 없는 무기력한 표정에 대해서 진작부터 체념하는 습관이 생겼을 것이야.
거울 속의 나를 통해 나라는 것에 익숙해져 체념하는 습관 생겼지
김형수 = 성장통이 느껴집니다. 자아와 대면하는 공포와 아픔, 연민의 감정들이 훗날 시가 되었겠지요? 인간의 내부에서 발생되는 이 비밀스러운 사태가 자의식을 만드는 게 아닐는지요?
고은 = 오직 나를 나이게 하는 사건은, 그러니까 내가 풀죽어 있는 많은 시간에 대해서 예외적인 신명이 나고 내가 갑자기 떳떳해지는 때는 밤의 어둠 속이었어. 거기에는 나를 가혹하게 반영시키는 거울 속의 내가 지워진 어둠만이 있었지. 물론 집 밖의 낯선 어둠이나 뒷산 언덕의 어둠이란 공포의 장소이겠지만 집 안의 어둠은 나에게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나를 지극히 평안하게 해 주는 장소였던 것이 틀림없었지. 거기만은 부끄러움도 무엇도 필요 없는 존재의 진공 상태였으니까. 밤이 자아를 충족시킨 것이지.
김형수 = 객관 세계가 눈을 환히 뜨고 있는 환경은 확실히 불편합니다. 말더듬 때문에 저만 어둠을 좋아한 줄 알았는데.
고은 = 사실 1930년대 식민지의 농촌이란 일종의 사건 진공상태임에 틀림없으나 그것조차도 어린 나에게 일찍부터 생겨난 수치심이라든가 자아 부정의 전단계의 환경으로서는 내 존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마을 어른들의 언동이나 아이들의 심술에 대해서 나는 처음부터 약자였으니까.
김형수 = 조금 위안이 됩니다. 그런데 촌락 바깥에서 흘러들어간 집안이었습니까?
고은 = 우리 가계는 내 고향에서는 장기간 이어져 온 원주민 같았어. 고려시대의 문충공이라는 고위 관직의 조상에 의해서 문충공파라는 종친 계보가 만들어졌으나 이 고씨가 제주 고씨에서 고려 후기에 육지로 진출함으로써 다른 큰 성받이인 김씨, 박씨, 이씨, 장씨 등의 틈바귀에서 전국화되었겠지. 조선조 이래로 이 고씨가 몇 지역의 중시조(中始祖)의 씨로 퍼져가면서 담양 고씨니 옥구 고씨니 하고 분종되었지.
김형수 = 옛 부락의 내부구조가 성씨에 따라 각양각색 같지만 씨족사회적 잔재는 다들 비슷했나 봅니다.
고은 = 인류의 계보란 계보의 분화라는 계보 본능을 가지고 있어. 마치 한 부모 슬하에서 형제들이 생겨나는 것처럼. 그래서 전대(前代)의 단순성은 후대의 비단순성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상의 자기 확대인 것 아닌가. 오늘날의 종교들을 보거나 학문 실태를 거슬러 가거나 하면 으레 거기에는 한 점에서 파생한 무수한 점들이 있는 것 아닌가.
김형수 = 무한 번식하는 플라나리아처럼요?
고은 = 그렇지. 이전 사실을 계보적으로 소급해도 처음의 한 점은 아예 실종 상태가 되고 마는 것도 놀라운 일 아닌가. 이를테면 나의 조상을 나로부터 소급해 본다면 그 맨 위쪽에 제주 고씨의 고을 나는 없게 되지. 그러므로 계보란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가 만든 과거의 것일 뿐인지 몰라. 단군도 그렇지. 우리가 하나같이 단군의 자손인지는 자신 없는 일이지. 나의 부모는 그들의 두 갈래 부모에 의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지. 그 부모의 부모들은 또 어떤가. 그러므로 이상(李箱)의 수사법 그대로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그 어느 시원은 결코 일신적 한 점이 아니라 우주 무한으로 펼쳐진 무한 수의 다신적인 점들이 아니겠는가.
김형수 = 아, 후손이 무한 번식되는 게 아니라 조상이 무한 증식되는 거네요?
고은 = 선가(禪家)의 화두에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가 있지.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가나’라는 것이지. 내가 지난 세기 50년대 초 처음으로 선정에 들게 될 때 받은 화두인데 이 화두가 나와 잘 상응하지 않아서인지 내 말뚝 신심의 정진 탓이었는지 단전의 화두가 머리의 화두로 올라오니 당연히 몸의 화기가 머리로 솟아올라 온통 내 대가리에 ‘화두꽃’이 피어 거의 사경을 헤매는 열병을 앓았어. 온통 대가리에 염증이 퍼졌고 내 정신상태가 혼미에 빠져버렸어.
김형수 = 선가의 정진은 하도 치열해서…. 그래서 얻은 답이 혹시 범아일여(梵我一如) 아닙니까? 화두를 따라간 정신이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요?
고은 = 그 뒤 조주(趙州)의 ‘무(無)’를 받은 뒤 내 선정이 제법 무난해졌지. 아무튼 나라는 존재가 있게 된 내 핏줄의 계보란 당대적인 실감에는 적중한다네. 내 아버지, 할아버지와 어머니, 외할머니라는 절대 관계로서의 친족의 가시적인 것 말이네. 증조를 넘어 고조에 이르면 벌써 추상이 되지. 그래서 주자가례로 굳어진 제사는 대개 증조까지이고 그 위쪽은 일 년에 네 번 종합하는 시향(時享)인데 그것도 봄의 한식과 가을의 추향으로 두 번을 지내게 되지.
김형수 = 어렸을 때 제사가 얼마나 공허한 행위로 보였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나무의 줄기에서 피고 지는 잎처럼 개체는 소멸하지만 핏줄은 계속 살아 있으니까, 생각했습니다.
고은 = 이런 것들은 고대 이래 중원 동북부의 풍속과 동행한 조상 숭배의 세시(歲時) 행위이지. 설사 내 조상이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타당성을 위해서는 그것이 어디로 향하는가라는 과정 개념은 화두의 뜻하고도 맞아떨어지겠네. 전북 옥구 일대는 원주민적인 농경사회의 여러 자연부락에 번져 있는 씨족 모듬살이 풍경이 뿌리박고 있었어. 그래서 고씨와 두씨, 문씨, 전(田)씨의 네 성받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어. 그 중에서도 고씨가 가장 많았어.
나를 나이게 하는 건 부끄러움이 필요없는 밤의 어둠 속이었어
김형수 = 그런 모듬살이들의 목가적 연결 부위가 세상의 본체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장소를 옮겨주는 것들이 하도 발달해서 대지가 속도에 묻혀 버렸습니다. 세계가 텅 비고 말았어요.
고은 = 나는 재래의 농촌공동체의 두레로부터 자연으로서의 화해나 본래적인 협동의 미덕을 이론적으로 적시하는 근대적인 파악을 쉽게 지지하지 않네. 저 1980년대 민중운동의 진영에서 흔히 농촌의 오랜 두레를 절대화하며 공생, 상생 그리고 연대를 관념화했는데 이것은 좀 겉보기가 아닌가 하네.
김형수 = 꽤 중요한 문제제기일 것 같습니다. 1980년대를 낳은 5·18 정신의 두 기둥이 독재에 대한 항거와 ‘대동 세상’을 이루었다는 점입니다. 낯선 개체들이 일과 놀이를 함께하는 평화의 공동체를 만든다는 게 얼마나 꿈같은 이상이었는지 모릅니다. 전통 연희패들이 그런 사례로 두레를 언급하고는 했어요.
고은 = 그것을 씨족이나 부족의 인류사적 유습이라고 나는 강조하고 싶어. 고대국가의 성읍적(城邑的)인 형태에서 씨족에서 부족으로 덩치가 커지는 동안 고구려의 오가(五加)도 있고 신라의 육부촌(六部村)도 있게 된 것이지. 이런 씨족의 흔적에서 사촌, 육촌도 다 한 집안의 개념이어서 서로 뭉치고 서로 도운 것이지.
김형수 = 그러니까 보편적인 가치를 부여할 만한 ‘타자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동물적 핏줄 공동체였다는 거죠? 그것이 과연 옛 부락의 내부에 존재했던 ‘자유로운 개인과 유능한 집단의 조화’의 예로 적합한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고은 = 이런 풍습이 설사 다른 성받이 타자라 해도 집안 식구의 핵심으로 아저씨이고 아우이고 누나였던 것이야. 내 시집 이탈리아어판의 역자 빈첸차 두루소는 현재 베네치아대 교수인데 이 여자에 의하면 토마토 케첩을 만들 때는 온 집안 아낙네가 총동원되는데 그것이 십촌 이상의 아낙까지도 한 부모의 핏줄인 형제 자매로 삼는 셈으로 왁자지껄 잔치를 벌이는 형국이라 하더군. 실제로 이탈리아의 ‘패밀리’는 비단 시칠리아 마피아의 그것만이 아니라 특히 가난한 로마 이남의 지중해적 혈연공동체의 전통이겠지. 한반도의 가족주의도 반드시 유교 성리학 이념으로서의 가문주의, 가풍주의에 앞서 오랜 핏줄로서의 자기방어적인 공통성이 있어 왔어.
김형수 = 최근에 아시아의 중세를 소설로 쓰면서 칭기즈칸을 들여다보니 그 이전까지 초원은 고대적 패밀리들이 각축하는 포유류들의 사냥터 같았더라고요. 그가 천호제라는 제도를 통해 ‘문중 마피아 권력’들을 해체하고 신의를 숭상하는 사회조직을 탄생시킵니다. 한데 고씨 핏줄이 아닌 관계는 언제 목격되었습니까?
고은 = 내가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서는 고씨 말고도 청풍 김씨, 선산 김씨가 있었는데 청풍 김씨 일부는 식민지시대 후기부터 사회의식이 스며든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있었고, 선산 김씨는 대체로 농촌 중농층의 개인주의로 일관함으로써 쌀농사의 알속을 꾀하고 있었어. 그런데 청풍 김씨 쪽에서는 한편으로 식민지시대 군 단위나 면 단위의 공직자가 여럿 나와서 군청 촉탁이나 면장 또는 부면장 그리고 마을 단위의 이사장직을 연임하고 있었지.
김형수 = 씨족 결속이 와해되는 기나긴 진화의 노정을 걷고 있었을 텐데요.
고은 = 이런 집의 하나에 내 국민학교 동급생이 있는데 그 집에 가면 농가로는 거의 드물게 사랑방의 서가에 책들이 꽂혀 있었지. 거기서 나는 루소의 <에밀>이라는 아주 두꺼운 책을 알게 되었지. 그 책이야말로 전혀 비교육적인 저자의 자기모순이 담긴 일종의 교육선언이 아닌가.
김형수 = <에밀>과의 대면이 엄청 이르셨네요. 시인 고은뿐 아니라 자연인 고은태의 영혼도 루소적이었을 거라는 느낌이 팍 오는데요?
재래의 농촌 공동체를 화해·협동의 미덕으로 파악하는 건 겉보기야
고은 = 이런 성씨 말고 몇몇 성받이가 함께 사는 뒷뜸, 아랫뜸, 중뜸 그리고 새터와 갈뫼로 나누어져 일백 가호 안팎의 빈부가 함께 등을 대고 살았지. 고씨 집안은 십촌 안팎이고 고개 하나를 넘으면 거기가 고씨 집성촌이다시피 한 옥구면 옥정리의 긴 마을이었어.
고씨 중에는 천석 지주인 종조부가 있고 내 할아버지 삼형제는 중농과 빈농을 번갈아가는 기복으로 살았어. 우리 집도 할아버지가 아들이 없는 선대의 숙부에게 입양됨으로써 농촌 부동산인 논과 밭이 늘어난 상태였어. 하지만 꿈 많고 친구 많은 아버지의 젊은 날 몇몇 친구의 빚보증에 선뜻 서준 것으로 갑작스러운 빈농이 되었어. 밭뙈기 몇 개 말고는 이천 평의 논으로 살아가야 했어.
김형수 = 아이고, 빚보증이라니! 하나의 흥망성쇠가 ‘존재’ 쪽보다 ‘관계’ 쪽에서 떠밀려오는 잔인한 역사가 시작되었네요.
고은 = 인간이란 아무리 농경시대를 산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 농경시대의 네 계절이라는 자연 세상에 의존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이란 불가불 자연이 아니라 역사라는 사실이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나의 삼대 이래의 존속 자체로도 분명하겠어.
김형수 = 그래서 서사를 역사라 부르는가 봅니다.
고은 = 그러다 나는 이런 농촌의 사건 없는 일상 속에서 밤의 어둠 속에서 나 자신의 존재를 터득하는 동안을, 뒷날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내 과거의 가난을 미래의 풍요로 바꾸려는 욕망이 자라는 동안으로 살았던 것 같아. 이를테면 예언은 미래의 예언만이 아니라 과거의 예언이듯 거꾸로 내 어린 시절의 그 심심하기 짝이 없고 너무나 평범한 환경 속에서 나는 없는 과거를 있는 미래의 과거로 만들고 싶어했던 것인지 몰라.
김형수 = 과거나 미래가 사실은 현재의 일부인데 말입니다. 눈앞의 풍경이 아니면 쳐다보지 않으려 하는 단편적 사고는 오늘날 우리의 정신적 상태를 뼈아프게 반영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고은 = 정신의 탄생이란 그 기원은 안개 속인지 몰라. 정신분석학의 자아형성 단계론에 ‘거울 단계’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공교롭게도 내가 서너 살 때 이런 학설이 생겨났다네. 인간이 자아를 알게 되는 것은 그리스 신화 속의 나르시스처럼 물속의 제 미모를 처음부터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거울 속의 자신을 자신인 줄 모르다가 차츰 거울보기의 반복을 통해서 거울 속의 자아와 실제의 자아를 합치시키는 과정이 생겨난다네.
김형수 = 선생님의 그런 체험을 기억하실 수 있나요?
그림 | 임옥상 화백
김형수 = 새가 물에 비친 그림자를 알아보면 서사가 태어나는군요? 인간의 탄생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고은 = 거울을 명경(明鏡)이라 불렀어. 그 밝다는 뜻이 무색했지. 이런 오해는 뒷날 내 소년시절 동네에서 한두 대밖에 없는 유성기에서 판이 돌아가며 애 끓이는 노래가 들릴 때에도 유성기 속에 노래하는 사람의 목이 잘려진 채 들어 있어서 그 목의 입이 서럽게 열려서 노래가 나오는 것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 하고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지. 아니 이런 엉터리 정보들은 두메마을마다 정정되지 않는 당당한 정보로 통용되고 있었어. 심지어 한국전란 당시 인공 삼 개월의 인민군 세상일 때 미 공군의 그라망 전투기는 프로펠러가 달린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투기였지. 그러다가 프로펠러 없는 제트 전투기가 나타났는데, 그 전투기를 우리는 호주기(濠洲機)라고 했어. 이승만의 처갓집 비행기라 하기도 했어. 이승만 부인 프란체스카가 오스트리아의 한 이혼녀인 것이야 훨씬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 당시는 오스트리아(오지리)를 오스트레일리아(호주)로 잘못 알고 있는 데서 호주 처가 나라에서 그 괴상한 비행기를 보내주어 인공시대의 주요 목표물을 폭격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지.
김형수 = 그런 불확실성의 지혜에 저도 얼마나 빚을 지고 자랐는지 모릅니다. 장터에서 이빨 빠진 사자성어들을 마구 찍어내던 장꾼들의 입담을 통해 세상을 배워가기 시작했거든요. 정돈되지도 않고 연관도 없어 보이는 무차별적인 이야기 안에, 그러나 세계를 작동시키는 구조를 밝히는 경이로움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나는 꼼수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디지털 시대에도 질펀한 민간 미디어가 살아 있구나, 싶더라고요.
고은 = 내가 나를 처음 알게 된 것도 이런 엉터리 정보의 환경, 그러니까 무지몽매한 상태에서 어렵사리 나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지. 근대의 나는 고사하고 고대의 나도 아니었어. 이 사실은 구석기 시대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오세아니아 섬의 원주민에게서도 그대로 유추하게 되겠지. 요컨대 나는 원시시대로부터 나를 시작한 것이야. 그렇다면 나 하나의 일생에는 인류사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 이전부터의 전 과정이 압축되어 있는지도 몰라. 그래서 한 티끌에 온 우주가 들어 있는 것(一微塵中含十方) 아니겠는가.
김형수 = 저도 어느새 티끌 하나에 감춰진 우주, 찰나에 내장된 장구한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버릇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라고만 해도 선생님의 전신(前身)이 금방 떠오르는데요.
고은 = 어머니의 거울은 어린 나에게 거의 유일한 내 상상 공간의 첫걸음이었어. 그것밖에는 나에게 신기하거나 유난한 주목이 요구되는 사물의 환경은 없었으니까. 요즘의 아이들에게는 지천으로 둘러싸인 장난감이나 인형 따위도 놀이기구 따위도 배치될 처지가 전혀 아니었어. 그래서였을지 모르는데 어머니가 밭에 나가 있거나 할 때는 나는 그 수은 일부가 벗겨져 있는 경대 거울 속의 나를 통해서 나라는 것에 점점 익숙해졌지. 그러다가 마을의 다른 아이들을 보면 그들보다 훨씬 파리한 내 흰색 얼굴 안의 볼품없는 이목구비, 어디 하나 압도되는 힘이 붙어있는 데가 없는 무기력한 표정에 대해서 진작부터 체념하는 습관이 생겼을 것이야.
거울 속의 나를 통해 나라는 것에 익숙해져 체념하는 습관 생겼지
김형수 = 성장통이 느껴집니다. 자아와 대면하는 공포와 아픔, 연민의 감정들이 훗날 시가 되었겠지요? 인간의 내부에서 발생되는 이 비밀스러운 사태가 자의식을 만드는 게 아닐는지요?
고은 = 오직 나를 나이게 하는 사건은, 그러니까 내가 풀죽어 있는 많은 시간에 대해서 예외적인 신명이 나고 내가 갑자기 떳떳해지는 때는 밤의 어둠 속이었어. 거기에는 나를 가혹하게 반영시키는 거울 속의 내가 지워진 어둠만이 있었지. 물론 집 밖의 낯선 어둠이나 뒷산 언덕의 어둠이란 공포의 장소이겠지만 집 안의 어둠은 나에게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나를 지극히 평안하게 해 주는 장소였던 것이 틀림없었지. 거기만은 부끄러움도 무엇도 필요 없는 존재의 진공 상태였으니까. 밤이 자아를 충족시킨 것이지.
김형수 = 객관 세계가 눈을 환히 뜨고 있는 환경은 확실히 불편합니다. 말더듬 때문에 저만 어둠을 좋아한 줄 알았는데.
고은 = 사실 1930년대 식민지의 농촌이란 일종의 사건 진공상태임에 틀림없으나 그것조차도 어린 나에게 일찍부터 생겨난 수치심이라든가 자아 부정의 전단계의 환경으로서는 내 존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마을 어른들의 언동이나 아이들의 심술에 대해서 나는 처음부터 약자였으니까.
김형수 = 조금 위안이 됩니다. 그런데 촌락 바깥에서 흘러들어간 집안이었습니까?
고은 = 우리 가계는 내 고향에서는 장기간 이어져 온 원주민 같았어. 고려시대의 문충공이라는 고위 관직의 조상에 의해서 문충공파라는 종친 계보가 만들어졌으나 이 고씨가 제주 고씨에서 고려 후기에 육지로 진출함으로써 다른 큰 성받이인 김씨, 박씨, 이씨, 장씨 등의 틈바귀에서 전국화되었겠지. 조선조 이래로 이 고씨가 몇 지역의 중시조(中始祖)의 씨로 퍼져가면서 담양 고씨니 옥구 고씨니 하고 분종되었지.
김형수 = 옛 부락의 내부구조가 성씨에 따라 각양각색 같지만 씨족사회적 잔재는 다들 비슷했나 봅니다.
고은 = 인류의 계보란 계보의 분화라는 계보 본능을 가지고 있어. 마치 한 부모 슬하에서 형제들이 생겨나는 것처럼. 그래서 전대(前代)의 단순성은 후대의 비단순성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상의 자기 확대인 것 아닌가. 오늘날의 종교들을 보거나 학문 실태를 거슬러 가거나 하면 으레 거기에는 한 점에서 파생한 무수한 점들이 있는 것 아닌가.
김형수 = 무한 번식하는 플라나리아처럼요?
고은 = 그렇지. 이전 사실을 계보적으로 소급해도 처음의 한 점은 아예 실종 상태가 되고 마는 것도 놀라운 일 아닌가. 이를테면 나의 조상을 나로부터 소급해 본다면 그 맨 위쪽에 제주 고씨의 고을 나는 없게 되지. 그러므로 계보란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가 만든 과거의 것일 뿐인지 몰라. 단군도 그렇지. 우리가 하나같이 단군의 자손인지는 자신 없는 일이지. 나의 부모는 그들의 두 갈래 부모에 의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지. 그 부모의 부모들은 또 어떤가. 그러므로 이상(李箱)의 수사법 그대로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그 어느 시원은 결코 일신적 한 점이 아니라 우주 무한으로 펼쳐진 무한 수의 다신적인 점들이 아니겠는가.
김형수 = 아, 후손이 무한 번식되는 게 아니라 조상이 무한 증식되는 거네요?
고은 = 선가(禪家)의 화두에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가 있지.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가나’라는 것이지. 내가 지난 세기 50년대 초 처음으로 선정에 들게 될 때 받은 화두인데 이 화두가 나와 잘 상응하지 않아서인지 내 말뚝 신심의 정진 탓이었는지 단전의 화두가 머리의 화두로 올라오니 당연히 몸의 화기가 머리로 솟아올라 온통 내 대가리에 ‘화두꽃’이 피어 거의 사경을 헤매는 열병을 앓았어. 온통 대가리에 염증이 퍼졌고 내 정신상태가 혼미에 빠져버렸어.
김형수 = 선가의 정진은 하도 치열해서…. 그래서 얻은 답이 혹시 범아일여(梵我一如) 아닙니까? 화두를 따라간 정신이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요?
고은 = 그 뒤 조주(趙州)의 ‘무(無)’를 받은 뒤 내 선정이 제법 무난해졌지. 아무튼 나라는 존재가 있게 된 내 핏줄의 계보란 당대적인 실감에는 적중한다네. 내 아버지, 할아버지와 어머니, 외할머니라는 절대 관계로서의 친족의 가시적인 것 말이네. 증조를 넘어 고조에 이르면 벌써 추상이 되지. 그래서 주자가례로 굳어진 제사는 대개 증조까지이고 그 위쪽은 일 년에 네 번 종합하는 시향(時享)인데 그것도 봄의 한식과 가을의 추향으로 두 번을 지내게 되지.
김형수 = 어렸을 때 제사가 얼마나 공허한 행위로 보였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나무의 줄기에서 피고 지는 잎처럼 개체는 소멸하지만 핏줄은 계속 살아 있으니까, 생각했습니다.
고은 = 이런 것들은 고대 이래 중원 동북부의 풍속과 동행한 조상 숭배의 세시(歲時) 행위이지. 설사 내 조상이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타당성을 위해서는 그것이 어디로 향하는가라는 과정 개념은 화두의 뜻하고도 맞아떨어지겠네. 전북 옥구 일대는 원주민적인 농경사회의 여러 자연부락에 번져 있는 씨족 모듬살이 풍경이 뿌리박고 있었어. 그래서 고씨와 두씨, 문씨, 전(田)씨의 네 성받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어. 그 중에서도 고씨가 가장 많았어.
나를 나이게 하는 건 부끄러움이 필요없는 밤의 어둠 속이었어
김형수 = 그런 모듬살이들의 목가적 연결 부위가 세상의 본체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장소를 옮겨주는 것들이 하도 발달해서 대지가 속도에 묻혀 버렸습니다. 세계가 텅 비고 말았어요.
고은 = 나는 재래의 농촌공동체의 두레로부터 자연으로서의 화해나 본래적인 협동의 미덕을 이론적으로 적시하는 근대적인 파악을 쉽게 지지하지 않네. 저 1980년대 민중운동의 진영에서 흔히 농촌의 오랜 두레를 절대화하며 공생, 상생 그리고 연대를 관념화했는데 이것은 좀 겉보기가 아닌가 하네.
김형수 = 꽤 중요한 문제제기일 것 같습니다. 1980년대를 낳은 5·18 정신의 두 기둥이 독재에 대한 항거와 ‘대동 세상’을 이루었다는 점입니다. 낯선 개체들이 일과 놀이를 함께하는 평화의 공동체를 만든다는 게 얼마나 꿈같은 이상이었는지 모릅니다. 전통 연희패들이 그런 사례로 두레를 언급하고는 했어요.
고은 = 그것을 씨족이나 부족의 인류사적 유습이라고 나는 강조하고 싶어. 고대국가의 성읍적(城邑的)인 형태에서 씨족에서 부족으로 덩치가 커지는 동안 고구려의 오가(五加)도 있고 신라의 육부촌(六部村)도 있게 된 것이지. 이런 씨족의 흔적에서 사촌, 육촌도 다 한 집안의 개념이어서 서로 뭉치고 서로 도운 것이지.
김형수 = 그러니까 보편적인 가치를 부여할 만한 ‘타자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동물적 핏줄 공동체였다는 거죠? 그것이 과연 옛 부락의 내부에 존재했던 ‘자유로운 개인과 유능한 집단의 조화’의 예로 적합한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고은 = 이런 풍습이 설사 다른 성받이 타자라 해도 집안 식구의 핵심으로 아저씨이고 아우이고 누나였던 것이야. 내 시집 이탈리아어판의 역자 빈첸차 두루소는 현재 베네치아대 교수인데 이 여자에 의하면 토마토 케첩을 만들 때는 온 집안 아낙네가 총동원되는데 그것이 십촌 이상의 아낙까지도 한 부모의 핏줄인 형제 자매로 삼는 셈으로 왁자지껄 잔치를 벌이는 형국이라 하더군. 실제로 이탈리아의 ‘패밀리’는 비단 시칠리아 마피아의 그것만이 아니라 특히 가난한 로마 이남의 지중해적 혈연공동체의 전통이겠지. 한반도의 가족주의도 반드시 유교 성리학 이념으로서의 가문주의, 가풍주의에 앞서 오랜 핏줄로서의 자기방어적인 공통성이 있어 왔어.
김형수 = 최근에 아시아의 중세를 소설로 쓰면서 칭기즈칸을 들여다보니 그 이전까지 초원은 고대적 패밀리들이 각축하는 포유류들의 사냥터 같았더라고요. 그가 천호제라는 제도를 통해 ‘문중 마피아 권력’들을 해체하고 신의를 숭상하는 사회조직을 탄생시킵니다. 한데 고씨 핏줄이 아닌 관계는 언제 목격되었습니까?
고은 = 내가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서는 고씨 말고도 청풍 김씨, 선산 김씨가 있었는데 청풍 김씨 일부는 식민지시대 후기부터 사회의식이 스며든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있었고, 선산 김씨는 대체로 농촌 중농층의 개인주의로 일관함으로써 쌀농사의 알속을 꾀하고 있었어. 그런데 청풍 김씨 쪽에서는 한편으로 식민지시대 군 단위나 면 단위의 공직자가 여럿 나와서 군청 촉탁이나 면장 또는 부면장 그리고 마을 단위의 이사장직을 연임하고 있었지.
김형수 = 씨족 결속이 와해되는 기나긴 진화의 노정을 걷고 있었을 텐데요.
고은 = 이런 집의 하나에 내 국민학교 동급생이 있는데 그 집에 가면 농가로는 거의 드물게 사랑방의 서가에 책들이 꽂혀 있었지. 거기서 나는 루소의 <에밀>이라는 아주 두꺼운 책을 알게 되었지. 그 책이야말로 전혀 비교육적인 저자의 자기모순이 담긴 일종의 교육선언이 아닌가.
김형수 = <에밀>과의 대면이 엄청 이르셨네요. 시인 고은뿐 아니라 자연인 고은태의 영혼도 루소적이었을 거라는 느낌이 팍 오는데요?
재래의 농촌 공동체를 화해·협동의 미덕으로 파악하는 건 겉보기야
고은 = 이런 성씨 말고 몇몇 성받이가 함께 사는 뒷뜸, 아랫뜸, 중뜸 그리고 새터와 갈뫼로 나누어져 일백 가호 안팎의 빈부가 함께 등을 대고 살았지. 고씨 집안은 십촌 안팎이고 고개 하나를 넘으면 거기가 고씨 집성촌이다시피 한 옥구면 옥정리의 긴 마을이었어.
고씨 중에는 천석 지주인 종조부가 있고 내 할아버지 삼형제는 중농과 빈농을 번갈아가는 기복으로 살았어. 우리 집도 할아버지가 아들이 없는 선대의 숙부에게 입양됨으로써 농촌 부동산인 논과 밭이 늘어난 상태였어. 하지만 꿈 많고 친구 많은 아버지의 젊은 날 몇몇 친구의 빚보증에 선뜻 서준 것으로 갑작스러운 빈농이 되었어. 밭뙈기 몇 개 말고는 이천 평의 논으로 살아가야 했어.
김형수 = 아이고, 빚보증이라니! 하나의 흥망성쇠가 ‘존재’ 쪽보다 ‘관계’ 쪽에서 떠밀려오는 잔인한 역사가 시작되었네요.
고은 = 인간이란 아무리 농경시대를 산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 농경시대의 네 계절이라는 자연 세상에 의존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이란 불가불 자연이 아니라 역사라는 사실이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나의 삼대 이래의 존속 자체로도 분명하겠어.
김형수 = 그래서 서사를 역사라 부르는가 봅니다.
고은 = 그러다 나는 이런 농촌의 사건 없는 일상 속에서 밤의 어둠 속에서 나 자신의 존재를 터득하는 동안을, 뒷날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내 과거의 가난을 미래의 풍요로 바꾸려는 욕망이 자라는 동안으로 살았던 것 같아. 이를테면 예언은 미래의 예언만이 아니라 과거의 예언이듯 거꾸로 내 어린 시절의 그 심심하기 짝이 없고 너무나 평범한 환경 속에서 나는 없는 과거를 있는 미래의 과거로 만들고 싶어했던 것인지 몰라.
김형수 = 과거나 미래가 사실은 현재의 일부인데 말입니다. 눈앞의 풍경이 아니면 쳐다보지 않으려 하는 단편적 사고는 오늘날 우리의 정신적 상태를 뼈아프게 반영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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