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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과의 대화

[고은과의 대화](11) 어릴적 별명은 ‘암사내’였지만 마음 깊숙이 ‘불’이 들어있었

소설가·평론가 김형수=지난주 ‘폐허’에 대한 말씀을 듣고 내내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왜 문명을 비운 ‘영점(零點)의 상태’를 지향하는지, 그것이 왜 데카당스가 아니라 ‘세노야’ 같은, 자연으로서의 인간에 닿는 시를 낳는지 알 것도 같았습니다. 이제 존재가 머무는 쪽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은데요. 인간의 눈길은 항상 어둠의 세계에서 빛을 향해 열리는 것이 아닐까요?

고은=인류는 당연하게도 태양숭배로 자신의 삶을 이루어왔네. 어찌 인류뿐이겠는가. 무릇 산천초목도 큰 짐승도 잔짐승도 미물도, 심지어는 지하의 흙속의 생명체나 태평양의 심해 그 막대한 수압의 어둠 속 어패류들도 태양계의 한 행성인 지구의 우주적 운명을 한 치도 거스를 수 없는 태양의 소산들이 아닌가. 그러니까 만사는 태양 이후가 아니겠는가.

김형수=
나무들도 햇빛을 차지하려고 전쟁을 한다고 합니다.

그림|임옥상 화백

고은=그렇지, 식물의 생존투쟁은 동물의 그것 못지않지. 숲의 풍경으로 나무와 나무의 상생 공동체를 말하는 것은 피상이지. 최근 나는 저 몽골 서구의 척박하고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스키타이의 흔적인 자브흐란트(태양숭배)의 암각화를 사진으로 보고 온몸이 오싹거렸다네. 실제로 그 암각화 탁본을 하던 사람 중에는 그 악천후와 환경의 시련으로 이빨이 몇 개씩 빠져나가거나 끝내 생명력의 소진으로 사망사고까지 생겼다지 뭔가.

김형수=아, 암각화! 그 광야를 ‘초원의 화랑’이라 하면 너무 낭만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지난 1년 몽골고원에서 살면서 목숨의 초라함을 얼마나 크게 느꼈는지 모릅니다. 지평선 너머에도 지평선이 있고 그 너머에 또 지평선이 있습니다. 추위가 닥쳐오면 모든 생명체들이 일제히 엎드려 하늘의 처분을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어요. 그런 바위 기슭에서 수만년 된 그림을 만나면 그 유구한 흔적에서 신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고은=그 암각화의 하나로 아주 반들반들한 너럭바위 앞면에 새겨진, 다섯 명의 머리가 일제히 모아진 채 팔을 뻗은 채 서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는 태양에 큰절을 올리는 광경이 있었네. 그런데 그 암면 가득히 석양이 반사되어 바위 전체가 또 하나의 태양이 되고 있었네. 이런 태양숭배는 지구상의 어느 종족에도 보편적으로 번져서 선사시대와 고대의 근본 신앙을 반영하고 있지. 이집트를 비롯해 인도 대륙이건 라틴아메리카의 아즈텍이나 마야건 아시아 대륙의 어느 곳이건 다 태양의 자손을 자처하는 신화로 자신들의 정통성을 삼아오고 있지 않은가.

김형수=정말이지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의 떨림판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은=한반도의 산악숭배라는 것도 태양숭배의 지상화인 셈이지. 본래 태양 자체를 숭배하거나 태양이 떠오르는 동녘 산을 숭배하기에 이르렀지. 고조선 시대의 ‘밝’사상이란 바로 햇빛의 밝음에의 귀의였지.

김형수=중세의 유목민들은 왕족을 황금씨족이라 부르고 ‘황금사(黃金史)’를 남겼습니다. 태양이 허공을 통과할 때 황금빛을 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 이름자를 이끄는 성씨에도 그런 햇빛이 드리워져 있어요.

고은=그런 이름의 오늘로부터 멀리 떠나보세. 그런데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이른바 ‘초승달’ 지역은 태양에의 직접적인 신앙보다 태양의 반사체인 달 신앙이 발달해 있지. 그래서 많은 지역에서 창세와 건국의 신화에 원시 영웅과 통치자가 자신을 태양의 직계로 선포함으로써 그 위광으로서의 전력을 신성한 것으로 꾸며대고 있는 것과 달리 오늘날 아랍세계의 국기 등에 그려진 초승달 또는 만월의 형상이 말해주듯이 달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것은 무척 신기로운 노릇이겠네.

김형수=달이 태양의 반사체라는 걸 고대인들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유목민 신화에서는 태양이 여성이고 달이 남성입니다. 태양이 달을 낳기 때문이죠. 그래서 낮에는 여성들이 목축을 하지만 밤에는 맹수와 적이 오는 시간이라 남성들의 시간이 됩니다. 농경민과 유목민은 이렇게 밤낮의 의미가 바뀌어 있는데, 생각해보니 디지털 시대의 도시 유목민들도 밤낮을 바꾸어 사는 것 같습니다.

고은=그런데 태양숭배에서 산악숭배로 된 우리의 지난날 해보다는 달과 더 많은 육친적인 정서를 교감해 온 것은 우리 고전이나 농경생활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지. 우리 모두 달밤의 모성이 바치는 장독대의 기도로 자라나지 않았던가. 이런 점에서 태양의 절대 권위보다 달의 상대적인 총애에 더 기울어진 것도 우리 전통의 한 바탕이라 할 수 있지. 또한 태양이 공(公)이라면 달은 사(私)이기도 했지. 이병주가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바래지면 신화가 된다 했던가. 뭐랄까, 김부식의 ‘사기’에 대한 일연의 ‘유사’의 감회와도 가까운 것 아니겠는가.

김형수=달빛의 그윽한 느낌이 또 다른 세계를 만드는군요.

고은=나 역시 내 삶의 상당한 기간을 달과의 친화로 채워왔네. 해보다 달을 노래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그것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지. 하지만 언제부턴가 ‘저녁’과 ‘달빛’과 ‘밤’의 사후적인 세계에의 편향에 스스로 거슬러서 ‘백주’라든가 정오의 태양이나 하나의 본체가 그림자의 공간도 극소화시키는 대낮의 그 직사광선 바로 아래의 존재감에 맹렬한 호기심을 바치기도 했지. 그 즉각성에 말이지.

김형수=선생님의 초기 시에서도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은 매번 ‘누이’ ‘신부’ 이런 여성이고, ‘나’라는 화자는 어둠이나 새벽빛 아래 있습니다. 조금 내성적인 느낌인데요.

고은=요컨대 식민지 시대의 수동적인 삶의 모든 상황들이 태양에의 의지이기보다 월광에의 한(恨)과 체념에 더 익숙해지는 식민지적 인간형에서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내 어린 시절의 별명은 ‘암사내’였네. 나는 큰댁 당숙이 우리 집에 나타나도 부끄러워서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네. 이런 나에게 뒷날 광장의 군중 앞에서 포효를 하는 나 자신의 야만이 있었다는 것은 쉽게 해명될 수 없는 점이기도 하지.

김형수=‘암사내’라는 별명은 정말 의외입니다. 그렇게 고요한 성품에서 어떻게 그렇게 격렬한 정신이 나온단 말입니까?

고은=아무튼 나의 심상(心象)의 바닥에 불이 들어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네. 내 최초의 기억이 다섯 살 때의 화재에서 본 불길인데 바로 그 불이 내 운명의 매듭마다 기억으로부터의 폭발로 내 것이 될 때가 있었네. 실제로 1959년에 내게 될 첫 시집의 원고가 인쇄 도중 서울 와룡동 인쇄소의 화재로 불타버린 사실이 있네.

김형수=아이고, 아까워.

고은=그것은 내가 시단에 나온 지 1년 안의 작품들인데 당시의 전후 모더니즘에 감염된 것들이었지. 공초 오상순옹의 서시가 있지. 내 시집 이름이 ‘불나비’였네. 그래서 그 불나비가 불에 뛰어드는 것과 그리스 신화 속의 프로메테우스를 연결시킨 것이지. 그 당시 나는 현대미술가협회의 추상그룹 화가들과도 가까이 지내는 터라 화가 박서보가 멋진 표지화를 그렸네. ‘현대문학’지에서 편집실 편집장 오영수, 편집기자 박재삼이 두어 달 전호부터 시집이 나온다는 예고까지 해주었지. 바로 그 시집 교정쇄와 원고가 인쇄 도중에 타버린 것이지.

김형수=불에 탄 시들은 이후에 어떻게 됐습니까?

고은=나는 원고를 두 번 이상 쓰지 않았으므로 보관된 것이 없었고 그 중 몇 편의 원고가 어딘가에 남겨져 있다가 1960년 4월 혁명 직후의 첫 시집 <피안감성>에 수록될 수 있었지.

김형수=그때야 지금처럼 많은 시집을 내실 걸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고은이라는 하나의 영혼에서 얼마나 많은 ‘시선(視線)’이 재탄생하고 또 소멸해갔을지. 그렇게 소멸해간 ‘시선의 잿더미들’은 다 흩어져 버릴까요? 내면 어딘가에 쌓이게 될까요?

고은=첫 시집이 불타버린 것 하고 어린 시절 자신이 태어난 생가가 불타버린 것하고가 과거와 현재를 이루어 맞닿아 있는 불은 내 현실인식이나 역사의식의 숨찬 생태로 이어지면서 하나의 격렬성을 낳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네. 최근의 내 산문집 이름을 ‘나는 격류였다’고 붙인 바도 그것을 낸 서울대 출판문화원의 뜻이 있는데 굳이 내가 그 뜻을 헤아리자면 본디 고대 인도의 유식(唯識)철학에서 세계만상의 동작을 폭류(瀑流)로 맞선 것을 조금 완화시켜 격류로 격하시킨 셈이지. 산문집 중에 나오는 대화에서 나 자신의 삶이 그렇다는 것이었어.

김형수=크게 보면 불의 영혼이 언젠가부터 물의 영혼으로 변환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불이었던 때나 물이었던 때나 타오르고 굽이치는 기운은 공통되지만 말입니다.

고은=요컨대 태양으로서의 불의 기운이 바로 빛의 기운이지. 물질의 정의가 17세기에는 ‘관성’이다가 그 뒤에는 하나의 ‘장(場)’이었고 아인슈타인에게 와서 ‘에너지’로 된 것이나 우주의 암흑물질이 우주의 미래에는 어떻게 해명될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이 세계의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사대(四大) 원소가 하나의 기(氣)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네. 이 사대가 바로 지신, 수신, 화신, 풍신으로 모셔지는 것은 당연하지. 우리 인간이라는 것도 그 생명의 조건이 이 에너지이고 기 자체이겠지. 지·수·화·풍에의 지각은 실로 인류의 사유와 함께 있어왔지. 고대 인도나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이 그 이후의 전환보다 때때로 더 매혹적인 것은 인간의 위상이라는 것이 우주나 자연의 한 부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커다란 생각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어.

김형수=그래서 목숨이 다하면 지·수·화·풍으로 돌려보내는 겁니까?

고은=신화들은 불을 태양으로부터 인수하는 것으로 말하기가 십상이지만 사실은 수렵채집의 시기에 자연재해로서의 불을 무서워하다가 그 불에 탄 짐승의 고기맛에 길들여지면서 옛 조상들의 생식에서 화식으로 바뀌었고, 그 이래 인류가 직립인간으로 되고 인류의 두뇌가 원숭이의 두뇌로부터 구별되기 시작한 것 아닌가. 그러니까 인간은 태양의 밝은 빛 없이는 살 수 없는 현실을 진작부터 터득했으니, 태양 외각의 홍염(紅焰)으로부터 뿜어대는 광선들의 빛을 닮은 지상의 불이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것 없이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없는 신령한 원천이기도 했지.

김형수=불이 문명의 시작이네요?

고은=그래서 불은 석기시대 이래 열대 지방의 한정된 생활 터전을 떠나 추운 곳으로 이동할 생존의 필수조건이 되었지. 우선 불의 공포는 불의 이용으로 완화되고 또 불을 가짐으로써 다른 맹수들을 쫓아버릴 수 있었지. 마침내 불은 천신(天神)의 것에서 인간의 것으로 되어버렸어. 우리 조상들도 주부가 불씨를 살려내는 일을 하루하루의 첫째로 삼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언제나 태양숭배로부터 생겨난 ‘생명의 불’이자 ‘영혼의 불’ 관념으로 굳어져 왔지.

김형수=유목민도 신부가 화로에 불을 놓아야 가정이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신부도 죽을 때까지 그것을 꺼트리지 않을 의무를 갖고요.

고은=세계를 본디 일목요연한 계열화로 보는 신이나 이데아의 피조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불연속성으로서의 역사로 보는 바슐라르에 내가 반한 이유는 그 불과 물의 시학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사실 인간의 삶이라는 과정도 어느 때는 불길이고 어느 때는 잿더미이고 어느 때는 무엇 무엇으로 말해진 복합의 우연들로 그 불연속성을 담고 있지 않나. 그래서 불교의 윤회, 전생이라는 것도 기계론이기보다 새로운 우연들에 의한 수많은 변화를 열어놓을 때 거기에 지지를 보낼 수 있지.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과거의 단일 인과론이라면 오늘날 누가 거기에 박수를 치겠나.

김형수=바슐라르의 문체는 참 매혹적입니다. 2008년 촛불시위 때, 어두운 청계천을 따라 한없이 불꽃이 흔들리는 것을 보다가 그 ‘촛불의 미학’을 다시 읽고 시를 썼어요. 어둠 속의 존재들이 자신을 태워서 세상을 밝히는 정신을 한없이 거룩하게 승화시키는 것을 으스러지게 느꼈거든요.

고은=이런 사정과 함께 하나의 인상적인 사실을 말하고 싶네. 이것도 불과 관련되고 있어서라네. 아함부(阿含部)의 한 광경이 바로 그것이라네.

김형수=아, 네!

고은=석가모니가 우루벨라라는 곳에서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네. 처음의 서너명으로 시작해서 어느새 일천명에 이르렀지. 그는 거기서 마가다의 라자가하로 가게 되었는데 그 출발점의 한 산에 올라갔지. 그 일대는 그가 지난날 고행하던 곳이고 고행을 그만두고 중도로서의 수행을 하던 지역인데 그 산 위에서 그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지. 붓다라면 언제나 명상적이고 정적(靜的)인데 그 산 위에서는 절규하듯이 아주 위압적이기까지 한 풍모를 보여주지. ‘비구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도다. 치열하게 불타고 있도다. 이것을 그대들이 먼저 알아야 한다’고 외치는데 이제까지의 그는 언제나 단 한 번도 감정을 넣어서 말하지 않는 이로 정연한 담론이었고 풍부하고 온후한 비유로 말하는 간접화법을 썼지. 그런데 여기서 그는 ‘세계는, 삶은 다 불이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이네. ‘네 눈이 타고 네 귀가 타고 네 코가, 네 혓바닥이, 네 몸뚱어리가 타고 있다. 네 마음도 타고 있다. 일체가 탄다’고 하는 것이네.

김형수=모든 존재의 바탕에 있는 어떤 거대한 것이 막 춤을 추는 느낌이 듭니다.

고은=여기서는 불이 번뇌를 말하기에 충분하지. 욕망의 세계를 말하지. 사실은 불교 대승경전, 특히 한국 조계종의 근본 경전인 금강경의 금강도 금강과 같은 부서지지 않는 보리를 뜻한다는 것과 부서질 줄 모르는 번뇌를 뜻한다는 양면의 당위를 뜻할 수도 있을 때 불은 정화, 승화, 그리고 재생의 경지이기도 하고 일체의 미혹에 에워싸이는 것을 뜻하기도 하는지 모르겠네.

김형수=말씀을 들을수록 촛불 이미지가 커지는 것 같습니다.

고은=아무튼 나는 내가 산 시대의 여러 국면이 이러한 불의 세계를 경험하게 한 것에서 내 열정의 화기(火氣)가 행여나 더 많은 시대의 풍요한 기여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닌가 저어하고 있네. 어느 술집 주인인 아낙이 점을 치는데 ‘당신은 불하고 사는군’ 하고 말하기에 이의를 제기했다네. ‘나는 술장사를 하니 물하고 산다오’라고. 그러니까 그 점쟁이가 꾸짖기를 ‘술이 어디 물인가 불이지. 그것 마신다면 다 불이 되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네.

김형수=참 재미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일상적 삶이 가상화되고 세계가 더욱 인공적으로 구성되어 가고 있을 때 물과 불의 어떤 거대한 ‘실재’가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재앙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아요. 인간은 자신이 자연의 일부인 것도 망각하고, 그냥 먼 나라 이야기를 하듯이 책상머리에서 그냥 불의 시대와 물의 시대를 상상합니다. 불의 시대에 대한 더 특별한 기억은 없습니까?

고은=술이 물이 아니라 불인 것은 내 어린 시절 내 할아버지의 술로도 말할 수 있네. 내가 일곱 살 무렵 술 취한 할아버지로부터 ‘아가 우리나라는 일본이 아니란다. 일본이 되기 전에 조선국이라는 나라로 오래 살아왔단다’라는 말을 듣고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져 버린 기억이 있네. 고로 할아버지는 언젠가 옛날에 충무공 이순신 장수가 일본을 다 쫓아버리고 일본 배를 다 침몰시켰다는 말도 해주어서 그때에야 나는 일본 사람이 아니고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네. 그런데 이 사실은 어린 나에게 하나의 극비사항이기도 했지. 어머니한테도 물어보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불의 시대를 살았지.

김형수=그런 숨 막히는 기억이 참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역사는 다시 물의 성격을 찾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 말씀은 쉽고 깊고 잔잔하지만 먹이 종이에 스미듯 적시는 기운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