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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과의 대화

[고은과의 대화](12) 수많은 혈친·인척 명사를 만든 ‘나의 탄생’은 집안의 축복이었

소설가·평론가 김형수=대화의 초반에는 주로 선생님의 자아의식이 확장해간 영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규모가 시간적·공간적으로 하도 광활해서 따라가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그것들이 응집된 ‘육신’의 기원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고은=나에게도 루소의 ‘고백’처럼 말할 저주의 용기가 없지 않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복창할 생각은 없다네. “내 인생 최초의 불행은 바로 나의 탄생이었다”는 말은 1712년 서반구 스위스 제네바의 한 갓난아기를 가리키지만 1933년 동반구의 극동 한반도 변방의 아이를 무작위적으로 가리킬 수 없지 않은가.

김형수=선생님의 발자국에서 루소의 영혼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지적인 예리함, 소년적인 열정, 전통을 알면서도 전혀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 등에서 말입니다. 그 육신의 발단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림 | 임옥상 화백

고은=다만 나의 출생을 나 하나만의 의미로 서술하고 싶지 않네. 나는 매사에 유일신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네. 아마도 내가 태어난 그 해에는 여러 고을 여러 마을에서 그 열두 달 안의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꾸물거리며 태어나서 그 절반 가까이는 일찍 죽었을 것이네. 한국에서의 백일잔치라는 것은 한 마을의 기쁨 가득한 잔치인 것은 틀림 없으나 그것을 깊이 들여다본다면 처절한 생존 시도의 속내가 보이기도 하지. 그 당시의 유아 사망률은 유아 생존율을 많이 웃돌았어. 영양실조를 삶의 일상 속성으로 삼고 있는 가난살이에서는 아버지의 강골이나 어머니의 체질이 온전할 수 없는 노릇인데 그런 상태의 기반으로 태어난 아이란 얼마나 부실한 목숨이겠는가. 하루살이의 비유가 있지 않은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 해도 모유가 넉넉할 리 없고 모유 대체 식품이 버젓할 리 없었으니 그저 얼마동안 숨을 내쉬다가 마는 아기 송장이 많았지.

김형수=인간의 신체도 자연으로 접대 받던 시절이네요. 저희 세대까지도 존재의 뒤쪽 어디에 깊은 궁핍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살았습니다. 음, 그래서요?

고은=그것을 백지나 헝겊에 똘똘 말아 뒷산 풀섶에 거꾸로 세워 파묻었지. 다시는 이런 팔자로 이승에 나오지 말라는 부모의 심정으로 그렇게 했어. 그런 아기 주검에 대한 슬픔이라는 것도 심한 비유로는 달걀 하나 깨진 것에 불과한 낭패감 정도 아니겠나. 조선 후기 빈민층의 유아유기나 유아매매가 흔한 것도 그 당시의 비정(非情)을 내보이지.

김형수=헉, 달걀이 깨지다니요! 고정된 틀도 없고, 맥락도 놓치지 않는 그런 자유로운 시선은 어디에서 오는지 참 놀랍습니다.

고은=이런 사정인데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서 일곱이레 사십구일을 넘기고 백일이 되면 일단 생존 가능성의 밑천이 보이는 셈이지. 그렇게 되면 아무리 불가난이라 하더라도 고리채 장리쌀도 마다않고 꾸어다 떡시루를 안치고 고기 몇 근도 사오게 되지. 그렇게 해서 일가친척이나 마을 위아래 뜸 사람들 다 불러다가 한 상 차려내는 백일잔치를 벌이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이제 이 어린 것의 생명은 보장된다는 뿌듯한 자신감이기도 하지. 그 때 아기를 부자든지 벼슬이든지 점치는 풍습도 있어.

김형수=어릴 때 할머니가 들려주던 세상 이야기에서 느끼던 전율과 공포, 그 밑에 깔린 대지의 낮고 육중한 움직임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고은=나는 아버지 고근식과 어머니 최점례의 장남으로 태어났네. 아버지 22세, 어머니 19세였어. 어머니는 금강 건너 충남 장항의 전주최씨 최홍관의 장녀였어. 그런데 어머니 다음으로 낳은 것도 딸이었어. 어머니 다음으로 태어난 이모는 사내 아쉬를 보아 다음 태어난 것이 사내인 외삼촌 일룡이었지. 그래서 시집오기 전 소녀 시절 내내 동생인 이모는 외할아버지 밥상에 겸상으로 밥을 먹었어. 왜냐하면 사내 아쉬를 보아 남동생이 생겼으므로. 그런데 어머니 다음은 계집아이인 이모가 나왔으니 너는 겸상 받을 자격이 없으니 방바닥에 밥그릇 놓고 먹어라 해서 동생보다 천대받으며 처녀가 되었다가 금강 건너 전북 옥구의 두메로 시집오게 되었지.

김형수=긴 겨울밤 같은 이야기입니다. 고구마나 동치미라도 먹으면서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옛 이야기는 왜 슬플까요?

어머니는 가난살이에 산후 조섭 없이 나를 낳고 일 년 열두 번 피를 쏟았어
고은=가마 타고 장항 부두에서 돛단배에 가마째 실려서 군산항 가장자리 목선 부두에 내려서 그곳에서 5킬로쯤의 언덕길 내리막길을 가마 타고 왔지. 저승 가는 셈이어서 신부화장의 연지곤지가 다 눈물범벅이 되었지. 가마 안의 울음소리가 딱했던지 가마꾼 두 사람이 이제 좋은 곳에서 살게 되고 좋은 신랑 만났으니 복 받을 것이라고 격려도 했지만 그런 격려로 가라앉을 울음이 아니었지. 울음소리가 길어지자 가마꾼이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가마에서 꺼내어 여기다 놓고 우리는 돌아간다고 엄포를 놓아야 그 때마다 울음을 조금씩 그쳤어. 그렇게 시집와서 어머니의 시집살이는 시작되었지.

김형수=미지의 마을로 떠나는 것이 아득해서 그러신 거지요?

고은=어머니의 시집살이야 재래 사회에서의 한국 여성에게 피할 수 없는 고된 시집살이 아닌가. 숱한 시집살이 민요가 그것을 일단이나마 말하고 있지. 오죽하면 고대 사회에서의 시집살이 아낙의 친정 나들이가 시집가서 죽을 때까지 겨우 몇 번 밖에 허여되지 않는 사실이 글자에 반영되었겠나. 돌아갈 귀(歸)는 시집간 아낙이 친정 가는 것을 형상으로 한 글자라 하지 않는가.

김형수=형상문자의 힘이란 참, 세상 풍경이 그 자체로 문자가 되어 두고두고 뒤를 잇게 합니다.

고은=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몇 해 만에 한두 번 벼락 치는 화를 내는 것 말고는 매사에 자상한 성정이고 신명을 내는 남편 노릇을 했지. 하지만 할아버지는 타고난 술꾼이어서 거의 매일 술기운이 없으면 이마가 펴지지 않았어. 게다가 연안 차씨인 할머니는 농촌 여성으로는 맞지 않은 순백색 피부의 무골호인인데다가 살림살이 솜씨가 없어서 간장 된장의 장독대가 비었는지 찼는지도 모르고 늘 만면희색으로 살았지. 어머니가 시집와서 장독대 뚜껑들을 열어보니 독 바닥이 다 말라붙어 있었다네 그려.

김형수=<만인보>의 풍경들을 지금처럼 풀면 기막힌 ‘대하’가 될 것 같아요. 소리 없이 물살이 밀려오듯이 먼 시간들이 마구 안겨오는 기분입니다.

고은=친정 떠난 어머니는 슬픔과 외로움은 고사하고 당장 장독대 걱정으로 신부 노릇을 시작한 것이야. 거기에 시아버지 술 걱정까지 절박했지. 이런 시집살이 1년 뒤 내가 태어났어. 그런데 내가 태어난 다음날 산후 조섭이나 휴식 따위도 없이 여름의 초벌 기음매기 논으로 들밥을 해서 머리에 이고 나가야 했지. 몇 십 년 뒤 나는 1997년 히말라야 북쪽 기슭에 갔을 때 티베트 창탕고원의 유목민 천막 안에서 만삭의 아낙이 밀가루 반죽을 하다가 서 있는 그 자세대로 아기를 낳는 광경을 엿보게 되었어. 그것은 개나 돼지가 새끼 낳는 것하고 차이 나지 않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순산이었어. 아기 낳고 태 끊고 바로 하던 밀가루 반죽을 계속 하더군. 이것은 오랜 인류의 삶이 이어온 그런 포유류의 태생 풍경이겠지. 원숭이나 사람이나 다 같았지.

김형수=가난한 포유류들은 새끼를 낳는 풍경 하나로도 문명을 단박에 추문으로 만들어버리나 봐요. 오리엔탈리즘 따위를 가볍게 넘으셨습니다.

고은=그러나 농경사회에서의 인간 탄생은 산통이 극심해졌고 산후 조섭도 상당 기간 있게 되었지. 옛날 사람들의 전기에 유아시절 어머니를 잃는 경우가 많았지.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도 싯다르타를 낳자마자 산욕으로 죽은 뒤 이모가 계모이자 양모 노릇으로 그 아기를 길렀지. 나의 어머니도 그 때의 산후 조섭이 없게 된 처지로 끝내 한 달에 한 번씩 앓아누워 있다가 검은 피 한 말을 쏟고 나서 다시 일상생활을 하는 일이 십 년 이상 이어졌지. 그래서 내가 야단맞을 때마다 너 같은 놈을 낳아서 내가 일 년 열두 달 열두 번 피 쏟는다는 말을 들어야 했어. 나도 루소에 가까운 저주받은 존재인 셈이었지.

김형수=말씀의 어느 자락에선가 자아와 세계 사이에 실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경계가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필연적인 화해 불가능성’을 예고하는 일종의 시인적 숙명이랄까 하는 자의식 말입니다.

고은=그렇기도 하겠네. 하지만 나는 내가 속한 가족 안에서 하나의 핵심이 되었어. 우선 산후 20여일이 지나서 처음으로 어머니가 나를 안고 밖에 나가자 동네 아낙들이 나를 보고 ‘나비 같네’ ‘흰 나비 같네’라는 매우 심미적인 예찬을 들을 수 있었다네. 또 개천의 용이라는 말도 노인들한테 들었다네. 실지로 나의 태몽은 용의 승천이었다는 것을 뒷날 이문구와 이기형이 고향의 어머니를 만나서 들었다고 글로 남긴 것이 있는데 정작 나는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지. 이것이 특별한 뜻이 있지 않은 까닭이 있지. 그것은 바로 내가 태어난 마을이 용둔(龍屯))부락이므로 예로부터 용이 돌아 나간 곳이라든가 용이 똬리치고 있다든가 하는 그런 이름인데서 그 지명이 아버지의 꿈속에 이입된 셈이지. 그리고 이 용과 관련된 마을이 한반도에 얼마나 흔한 것인가.

이름은 씨족의 아이를 조상께 승인 받는 의례로 곧 인격적 실체를 뜻하지
김형수=그래도 용꿈을 꾸신 건데요. 아무튼 끝없이 ‘역사의 영점’에 서 계시지만, 그 발밑에서는 땅 모양 하나하나가 마치 거대한 신화들의 퇴적층인 듯 숨 쉬는 것 같습니다.

고은=이것은 농경사회에서의 비와 바람과 관련된 오랜 자연 주제의 표상이 아시아 일대의 용 사상이기도 하지. 본디 고대 인도에도 동남아시아에도 용의 서사가 있고 중국의 용은 본디 육지의 그것이다가 뒤에 강이나 물의 용으로 변화되었어. 심지어는 바다 용궁의 용왕으로까지 나아갔어.

김형수=용이 농경사회의 비, 바람 형상이었군요. 제 고향 마을도 주변이 온통 용들의 자리로 닦여 있었습니다.

고은=내 고향은 전형적인 쌀 주산지이므로 쌀 미(米)자가 붙어서 행정상의 고을 이름은 기름진 땅을 뜻하는 옥구(沃溝)에 쌀 고장이라는 미면(米面)에 용둔마을이 이웃마을의 쌀메(米堤)와 합쳐서 미룡리(米龍里)가 되었어. 처음부터 끝까지 쌀농사를 의미하는 데가 내 출생지인데, 그러나 식민지 시대 이전의 조선 후기나 식민지 시대나 착취의 현장이었으므로 전통적인 삼정(三政) 문란에다 일본의 쌀 강점과 37제 소작의 ‘쌀 없는 고장’이기도 했어. 아무튼 나는 이런 ‘쌀의 마을’과 ‘쌀 없는 마을’을 동시에 체험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태어난 셈이지.

김형수=‘머슴 대길이’를 보면 화자에게서 마을의 도련님 같은 인상이 풍기는데, 문학적으로 가공된 겁니까?

고은=그 인물은 전설로도 모자라지. 집안에서 대체로 나는 축복받은 총애의 대상이었어. 내가 태어남으로써 아버지의 아버지인 고한길(高漢吉)이라는 동학난 지원세력이던 농부는 할아버지가 되고 할머니가 되고 아버지 어머니라는 이름이 아버지 어머니에게 생겨났고 예복이와 야문이도 두 고모가 되고 또 어머니의 친정 사람들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외삼촌으로 있게 되고 어머니의 동생은 이모가 되었어. 요컨대 하나의 탄생은 수많은 혈친과 인척의 친인척 명사들을 만들어낸단 말이네. 나의 존재야말로 이 세상의 이름들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와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는 존재가 된 것이지.

김형수=아아!

고은=나는 태어나자마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계 구성의 원인이 됨으로써 중심개념의 하나로 될 수밖에 없었어. 사천년 전 수메르 시대 니푸르를 ‘지구의 배꼽’이라 하고 히말라야 한복판의 수메르 산을 ‘세계의 배꼽’이라 하고 고대 그리스 델피 신전을 그렇게 말하고 마야에도 배꼽이 있듯이 인간 도처에도 저마다 수많은 배꼽이 있는 셈이지.

김형수=모든 실존은 관계의 중심이면서 자기들끼리는 또한 ‘중심의 독점’을 욕망하기 마련인가 봅니다.

고은=18세기 홍대용이 중국 중심의 화이(華夷)체제를 거절하고 지구는 둥글어서 지구의 어디나 다 자신들의 중심을 선포한 그 모험은 실로 용기 없이는 불가능했어. 중국에의 사대사상 부정이야말로 최대 역적일 때였으니까. 이승만, 박정희 시대의 국가보안법 반공법보다 더도 덜도 아닌 그런 절대 공포의 조선 성리학 정치사회에서 홍대용의 자아의식 내지 세계의식이 태어났지.

김형수=저희들이 남북작가대회를 추진하고 아시아아프리카문학페스티벌을 하던 문제의식하고 어쩜 그리도 같은지요. 참, 이름에 얽힌 사연은 없습니까?

고은=내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몰라. 내 본명은 은태(銀泰)였어. 아마 할아버지 삼형제 중의 맏이인 큰댁할아버지가 지었을 거야. 그이에 대한 기억은 없으나 내 어린 시절에는 생존했는데 지역에서 식자(識者)로 알려져 있었어. 이런 이름 짓기가 아니어도 시골의 이름이란 대개 ‘바우’ ‘돌쇠’들로 지었어. 심지어는 천한 이름이 장수(長壽)를 보장한다 해서 개똥이도 있어. 그 이름이 나중에 호적에서는 개동(開東)이라는 근사한 이름이 되지. 내 재종 숙부 두 사람은 다 그 일제 때 경기중학 유학생이었는데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 ‘똥가래’ ‘밭가래’라는 천한 이름이었어. 나는 그런 이름도 없이 그저 은태로 시작했어.

김형수=유목민들의 문화가 그렇던데요? 초원에서는 지금도 사내아이를 시샘하는 신령님의 눈을 속이기 위해 천하게, 또 계집아이로 위장해서 기른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흔한 것이 네르구이라고 해서 ‘이름 없다’는 이름이더라고요.

망각된 본명 ‘고은태’는나의 지울 수 없는 전생의 말나식인 셈이지
고은=이름이란 뭔가. 그것의 상형문자인 명(名)은 씨족의 아이가 처음으로 조상혼령을 뵙게 되는 것과 그 아이의 생육 여부를 그 혼령에서 보고함으로써 존재의 승인을 얻어내는 의례를 뜻한다네. 그러니까 제사 지내는 고기를 담은 그릇을 조상께 올려 씨족 이름을 승인 받는 것이지. 그래서 이름이 바로 한 인간의 인격적 실체로 되지. 실제로 여자가 제 이름을 말하면 바로 제 심신을 허락한다는 뜻이어서 이름이란 실로 운명을 담고 있는 것이지. 저 아프리카에도 중국처럼 인간은 일생동안 세 개의 이름을 갖고 있어서 그 이름마다 생의 한 경지를 표상하고 있지. 다른 풀이로는 명(名)은 어두워지는 저녁에는 소리쳐 부르는 저녁 석(夕)과 입 구(口)의 합성으로 말하기도 하지. 어둠 속에서 존재를 이끌어내는 것이지.

김형수=그렇다면 ‘은태’가 ‘은’이 된 것을 고향의 어둠에서 객지의 어둠으로 건너간 사건으로 봐도 될까요? 필명을 불러주는 세계는 전혀 다른 대륙에 속할 텐데요.

고은=나는 소년기에 접어들며 내 이름을 싫어했어. 뭔가 다른 이름이고 싶었어. 누가 제멋대로 지어준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나 하늘의 별에서 온 신들이나 귀신이 새 이름을 짓기를 바랐지. 그러다가 한국전쟁 기간을 살아남은 청소년으로서 전후의 문단 유행과는 상관없이 내 이름에서 한 자를 떼어내고 고은이라고 자칭하게 되었지. 그런 나머지 내 본명은 내 의식과 정서에서 망각의 상태로 되었지. 1969년쯤인가 나와 최인훈이 태평로 영국대사관 입구의 덕수궁 파출소에 통행금지에 걸려 아무에게도 잘 보여주지 않는 주민등록증을 제시할 때 거기에 은태로 표기된 것을 최인훈이 보았지. 훈방 처분으로 밤거리를 걸어서 여관으로 가는데 인훈이 나를 “은태씨!”하고 불러댔어. 그것이 얼마나 낯설고 부끄러웠던지 몰라. 그렇게 내 본명은 나로부터 소외된 타자의 이름이고 폐기의 기호였어.

김형수=고은이라는 이름이 나서는 배경도 아주 독특했네요. 한국사회가 선생님의 본명을 사용한 것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때가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무서운 먹방에 갇히셨지만 신문 지상에는 그 이름이 게릴라처럼 빈번히 출현하곤 했습니다. 이제 막 문학적 자아를 눈 떠가는 문청들에게 그것은 굉장한 정치적 상상력을 부여했어요.

고은=하지만 나는 아직 그 본명을
호적이나 어디서나 정정하지 않고 나의 지울 수 없는 전생의 말나식(末那識)) 따위로 삼고 있는 셈이네. 그래서 고은태의 22년, 고은의 56년의 생존자로 수많은 사망자의 부재 한 단위를 아직껏 차지하고 있네 그려. 삶이 이토록 빚 아닌가. 묵은 빚 말이네.

김형수=들을수록 흥미진진합니다. 오늘은 ‘존재’를 이야기하는 법을 배웠어요. 어서 다음
주가 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