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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과의 대화

[고은과의 대화](14)고향 할미산서 본 장항제련소 굴뚝 연기는 열애의 대상이었어

소설가·평론가 김형수=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가다 군산평야를 지날 때면 엄청난 크기의 어둠을 만나게 됩니다. 그 깊은 어둠의 틈바구니에서 ‘만인보’의 영혼이 눈을 떴다! 생각하면 벅찬 감회가 없지 않습니다. 고향이 갑오농민전쟁 전적지에서 가까운데 무슨 관계가 있지는 않습니까?

고은=내가 태어난 곳은 이를테면 정읍, 고창이나 순창, 김제, 부안, 완주 그리고 전주 일대의 외곽 지대였으므로 갑오농민전쟁 병력의 근거지는 아니었네. 그 전쟁 후반에 이르러서야 지원세력으로 참여하거나 군량과 죽창 따위 무기 제작 따위의 병참 인력으로 동원되었지.

김형수=조선은 중원의 시(詩)·사(史)·철(哲)에 통달한 유교적 시인들이 500년 동안 운영해온 유서 깊은 나라였습니다. 일제가 들어왔을 때 토착세력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그림 | 임옥상 화백

고은=사실 나의 출생 연고지는 고도의 문사철 따위 밖의 초야였어. 그런 초야에서도 초야의 문자행위가 한가닥의 자생을 이루었겠지. 그 어름 끄트머리 의병운동에서는 옥구향교를 중심으로 최익현의 고제(高弟) 임병찬과 그의 지지기반인 향토 사류(士類)들 20여인이 주동이 되어 순창에서 의병 진영을 편성하게 되지. 최익현은 이항로의 수제자인데 당연히 열혈의 기상이 넘치는 철저한 사대노선에 대원군의 쇄국 계열과는 또 다른 위정척사론의 맹장이었어. 무어든 후기가 더 근본주의적이지. 대원군의 서원철폐에도 저항하다가 유배의 쓴맛을 보았다네. 그 이래 개항의 분위기나 개화노선 따위를 극도로 혐오함으로써 오로지 조선 성리학의 정치 이념이라는 말기 증상 그것에만 자신의 생존이유를 두고 있었는데 바로 이런 기상에 충직하게 속해 있던 사람이 내가 태어난 마을에서 고개 넘어 가면 있는 옥구향교의 지도자였다네.

김형수=역시 유생의 저항이 있었군요. 그토록 권위 있던 성현들의 말씀이 무색해지고 이전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문물과 사조, 정치와 경제에 대한 지식이 필요해진 상황이 무척 두려웠을 것 같습니다. 아마 그때도 양세기의 달빛이 쏟아지던 시절이 아니었나 합니다.

고은=그래서 중앙의 최익현이 깊이 신임하는 제자 임병찬의 제안으로 전라도 벽지 순창에서 의병들을 초모함으로써 순창의 병장으로 진두에 서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905년 을사조약이라는 조선 병탄 전야의 사건이었어. 이른바 통감부 시대의 개막이지. 이에 맞서 싸우다 잡혀 일본의 대륙전진 기지가 되고 만 대마도로 유폐되지. 거기서 함께 끌려간 임병찬의 간곡한 만류를 무릅쓰고 최익현은 단식 자진하게 되고 남은 제자들은 스승의 시신을 모시고 부산포로 귀국하는데 그 당시 백의민족의 오열은 부산포에서 연도를 따라 북상하는 ‘통곡의 길’을 만들지. 국장(國葬)과는 또 다른 국민장인 셈이었어.

김형수=스승을 잃은 눈물이 아니라 우주를 잃은 눈물이었겠어요. 당시 저항이 거세어 일본 천황의 하사금으로 선비들을 회유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읍 칠보의 김영상이 그것을 모독했다 하여 군산 헌병대로 끌려가다 만경강에서 투신하는 장면을 화가 채용신이 역사기록화로 남겼거든요. 그 후손이 지은 ‘대동 천자문’의 발굴기를 제가 썼습니다.

고은=그런 일이 있었네 그려. 뒷날 의병 기의(起義)의 한 터전이 되었던 옥구향교는 식민지 시기 내내 거의 텅 빈 헛간 신세였고, 해방시기와 전시 역시 거의 허물어져가던 폐가였어. 그 향교에 하나 둘 옛 갓쟁이들의 후예가 모여들어 옥구유도회라는 것을 꾸렸는데 아버지도 거기에 참여해서 부회장을 역임했지. 군산 구암리의 영국 선교사 계열의 청년학도들의 3·1운동 만세사건도 이 지역 반골들을 나타내지.

김형수=선비들의 노선이 옳았느냐 글렀느냐를 따지느라 당대의 실천적 전통을 놓치는 예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어요. 전북은 우리 농경문화의 심장부인데,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은=하지만 이러한 전북 일대의 농지 대부분은 일본인들의 대규모 농장에 속하게 되고 말지. 그 한 부분이 토착지주의 몫인데 내 종조부 고한규 역시 그런 지주였지. 물론 천 석 정도의 지주가 고창 일대에서 넓혀진 김연수·김성수 일가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는데 이런 토착지주들도 일본인 경영의 농장체제에는 무척이나 종속적이었어. 이런 내막은 1960년대 후반 연세대 김용섭의 연구분석에 잘 드러나고 있네.

김형수=들판이 컸으니 지주도 크고 소작인도 많았을 텐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종속적이었을까요?

고은=내 기억으로는 주로 일본 서부 규슈지방에서 건너온 일본인들의 야심이 내 고향 일대의 평야와 새로 바다를 메운 간척지를 넓혀서 확보하고 있었어. 조선반도의 지배 장치 제1단계가 바로 토지조사사업이었어. 그 이전의 조선 토지사정은 사유지 개념이 분명한 것이 아니어서 국토의 각처에 임자 없는 땅이 많았어. 중앙정부의 토지관리나 지방토호나 양반의 사유지 점검이 주먹구구이기 십상이었으니까. 이런 판에 여기저기 토지측량의 고의로 금을 그어 일본인 소유지가 갑자기 늘어나게 되었어. 토지측량이 토지수탈이었어. 마치 17세기 유럽이 아프리카를 금 긋듯이 말이지. 오늘날의 미합중국 주(州)의 경계가 직선인 것도 그런 강점(强占)의 표현이 아닐 수 없지.

김형수=대지에 측량기사들의 발자국이 찍히고 나면 뱀처럼 기어나간 길이며 곡선으로 이어지는 언덕들이 모두 포장된 도로, 전봇대들이 가르는 수평, 수직의 공간으로 분할되고 마는데요. 그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미감(美感)도 바뀌겠지요?

고은=직선이야말로 근대의 폭력이지. 전북 일대의 평야는 한반도 유일의 지평선이 있는 탁 트인 2차원의 공간이지. 동쪽 지평선에서 해가 뜨고 서쪽 지평선과 그 지평선 끝의 바다 수평선이 해가 지는 곳이지. 이런 공간에 일본인의 욕망이 옳다 좋다 들어차게 되었어. 그래서 규슈지방 미야자키현 출신의 농장 주인은 자신의 농장을 미야자키 농장이라 하고 가고시마현 출신은 가고시마 농장이라 했어.

김형수=그게 일본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고은=몇 번의 일본 대공황을 조선 착취로 메우려 했지. 규슈란 어느 곳인가 하면 고대 조선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거처이네. 일본의 천황인 신무(神武)도 그런 세력의 지도자였을 것이야. 조선의 철기문명이 바로 건너간 곳도 거기지. 아니 임진왜란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도 규슈 구마모토현 장군이야. 그래서 전북의 다른 고장에는 구마모토 출신의 주인이 경영하는 구마모토 농장도 있었지. 가고시마는 어디인가. 바로 일본의 명치유신을 앞둔 수구세력의 맹주인 사이고 다카모리(西瑯隆盛)의 고장이야. 그 자의 정한론(征韓論)이야말로 도쿠가와(德川) 막부시대 300년의 한·일 평화공존시대를 끝장내는 동기의 한 표현이지. 우리에게 아직도 친근한 조선통신사 시대는 그 이래 사라져버린 것이지.

김형수=일본 기득권층에게 잉여자본을 축적시키는 현장이었군요?

고은=그렇지. 그런 사정의 대안(對岸)이야말로 대안(代案)이 되었지. 구한말의 갑오농민전쟁이나 의병운동 그리고 친일개화노선의 명멸에 깊숙이 개입함으로써 한국과 중국을 침탈하기 위한 첩자도 양성하고 심지어는 일부 조선 유지들을 거액 후원하기도 하는 도야마(頭山滿)의 현양사(玄洋社)도 규슈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어. 이게 나중에 일본의 극우정당으로 커져가지.

김형수=저런! 삶이 아니라 숫제 난(亂)입니다.

고은=최근 일본 총리를 역임한 호소카와(細川)의 할아버지가 전북 완주 일대의 평야에 호소카와 농장을 경영했어. 그 이전의 일본 자민당을 상당한 기간 장악했던 총리 다나카(田中)도 청년시절 식민지시대 대전에서 사업을 했지.

김형수=조정래 선생의 <아리랑>이 왜 군산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고은=내 고향 군산은 고대 이래 군사적 요충지였고 고려말 최무선의 화약무기로 대규모 왜구를 격퇴한 곳이기도 하지. 군산 앞바다 말이네. 그 당시 이름 진포(鎭浦)가 바로 육군 수군의 주둔을 뜻하고 있었어. 군산 앞바다의 여러 섬들은 어느 때는 중국 망명객도 와 있었고 중국 산동의 어민 일부도 한동안 뿌리박고 머물던 곳이지. 그래서 왜구 호구에 민감한 지대이기도 한 반면 조선 남부의 내륙에서 거둬들인 세곡(稅穀)을 금강을 통해 내려보내어 그것을 서해 수로로 운송하지. 한강 어귀로 보내어 마포와 노들강변에 부리게 되었지.

김형수=꽤 역동적인 장소였네요. 세상의 많은 힘들이 얽혀 있는 복잡한 그물코 같습니다.

고은=그래서 군산은 군사적으로 행정적으로 그리고 농업생산물의 집산지로 쓰이던 곳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이전은 그저 옥구현의 한 포구에 불과했어. 평소에는 황포돛배 몇 척이 드나드는 어촌 풍경이었는데 20세기 식민지 시대와 함께 근대 항구로 열리게 되었어. 이 개항은 어쩔 수 없이 식민지 기지로서의 개항임에 틀림없었어.

김형수=그 속에서 ‘세노야’가 나왔으니, 참. 제가 아주 좋아하지만 시 이야기는 다음에 듣기로 하고요, 일단 주요 운송 물자가 무엇이었습니까?

고은=호남 호서의 쌀 수확물을 일본 본토로 가져가거나 이제 막 시작한 대륙 침략의 군량으로 실어가기 위한 ‘쌀의 항구’였어. 이 항구의 중심에서 조선인 원주민은 밀려나기 마련이고 중심가의 이름은 메이지마치(明治町)이고 이어서 쇼와도오리(昭和通)가 되었어. 다 일본 왕들의 이름이지. 실제로 초등학교 이름도 메이지초등학교, 쇼와초등학교인데 메이지는 일본인의 학교이고 쇼와는 조선인 아동의 학교였지. 중학교 5학년제 역시 일본 학생이 거의였고 조선인 학생은 한 학급에 겨우 하나둘 끼어 있었지.

김형수=슬라보예 지젝의 책에서 현실의 어떤 부분이 환상을 통해 ‘기능 변화’되는 대목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조선의 대지는 오랫동안 중국의 판타지이다가 또 일본의 판타지가 되었어요. 지식인들이 자주적으로 세계를 투사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이 됩니다.

고은=공원은 온통 일본 벚꽃만 피게 하는 벚나무로 덮였고 그 아래 신궁(神宮)을 세워 일본인 다음으로 조선인 남녀노소가 정기적으로 참배하게 만들었지. 그러니까 일본 규슈의 한 곳을 그대로 떠다놓은 데가 군산이었어. 이런 근대의 도시구조 변두리에 초가지붕이 다닥다닥 밀집해 있는 상하수도 시설 없는 조선인 임시부락이 군락을 이루었어. 그곳에서 4㎞쯤 떨어진 두메가 바로 두견새 우는 우리 마을이었어.

김형수=유년의 기억에도 침략자들의 항구와 두견새 우는 마을이 대비되고 있습니까?

고은=의도로서의 대비이기보다 이질의 수용이지. 내가 대여섯 살쯤 되었을 때 충남 서천의 외가도 군산으로 이사하게 되었어. 지금도 군산·장항이 하나의 생활권이고 실제로 충남 서천이나 보령 쪽까지도 군산의 중등학교로 통학하는 정기연락선이 금강 하류로 오고 갔어. 부여 사람 김종필의 외가도 군산이었으니까.

김형수=슬프고 아름다워요. 저는 그런 ‘내면에 간직된 옛날’에 닿고 싶어서 문학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많이 쇠락했지요?

고은=지금 군장산업단지가 말 그대로 군산·장항을 밀착시키고 있고 장차 두 곳은 다른 곳을 더 불러들여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될 전망이 커가고 있어. 이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고향마을의 진산인 할미산이라는 구릉에서 내다보이는 저 금강 건너의 장항제련소 굴뚝을 멀리 바라볼 때마다 대책 없는 영원(永遠)이라는 느낌이 생겨났지. 할미산이란 우리 산천 각처를 주재하는 노고할미의 산이지. 그 산에 올라 바라볼 때 바람의 방향에 따라 그 굴뚝이 달고 있는 긴 연기가 움직이는 게 얼마나 나를 사로잡았는지 몰라. 이런 풍경만이 나를 억압하지 않고 있어서 그 풍경의 시간을 될 수 있는 한 길게 연장하면서 열애하고 있었지. 아마도 내 의식 내부의 결핍이나 무미건조의 반대인 내 외부에 최소한으로나마 실재하는 사물의 어떤 측면이나 풍경의 자유만이 내 어린 날의 자재(自在)였는지 모른다네. 장항제련소의 굴뚝과 그 긴 연기야말로 내 운명의 서장(序章)이었어.

김형수=“먼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나 자신에게 세계를 깨닫게 하는가?”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제련소의 굴뚝 위에서 선생님의 심성에 자리한 어떤 무한한 것이 가물거렸던 거네요?

고은=이런 두메에 박혀 있다가 군산으로 시집간 고모네 집에 가려고 갓두루마기 정장차림으로 나서는 할아버지를 따라간 군산은 나를 당황하게 했어. 어쩌다 외삼촌이 우리 집에 다니러 왔다 갈 때 그 외삼촌 자전거 뒷자리에 타고 군산으로 따라갈 때의 그 불안이야말로 내가 만난 근대의 처음이었지. 근대란 얼굴이 곧 도시였으니까.

김형수=시 ‘나운리 가게’에 나오는 앉은뱅이 소녀가 떠오릅니다. 점방에서 햇빛 없이 자란 얼굴을 뒤로 하고 외삼촌의 자전거에 실려 온 도회의 풍경이 선생님의 근대였군요?

고은=그 항구의 3층 백화점과 2층 주택들과 상점들, 자전거와 이따금 지나가는 자동차 따위의 도시풍물과 그곳의 저잣거리를 활보하는 일본인들의 위세에 나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지. 어쩌다가 농촌 소달구지가 짐을 잔뜩 싣고 가는 길에 소가 똥을 누면 달구지꾼이 부랴부랴 그 똥을 치우느라 애를 쓰는 광경을 나 자신의 처지로 받아들였어. 채만식의 소설 <탁류>가 그려내고 있거니와 이런 군산이야말로 군산 밖의 드넓은 평야에서 모여드는 쌀의 집하장이기도 하지만 그 쌀을 잡히는 도박인 미두(米豆)가 성황을 이루는 곳이기도 했지. 쌀의 카지노라는 것인데 그것으로 하룻밤에 쌀 몇 백 석을 잃는 경우도 적지 않아서 어떤 사람은 미모의 젊은 아내를 빼앗기기도 했어.

김형수=고향땅에 얽힌 실타래처럼 많은 사연들이 ‘만인보’를 도왔다는 걸 문학도들이 알면 참 좋을 텐데요.

고은=이런 쌀의 도박업 배후에는 으레 일제의 교묘한 착취구조가 버티고 있었어. 그러니까 식민지 전반기라는 3·1운동 이전의 그 헌병경찰제의 무단통치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도박 장치를 통해서 조선인의 실물경제를 자신들의 작동으로 좌우하는 종속적 통치도 그들은 일찌감치 터득하고 있었어.

김형수=존재의 현실을 구성하는 차원이 상징계·상상계·실재계로 되어 있다는 생각이 스쳐 갑니다.

고은=이른바 ‘문화정치’라는 것이 무단정치의 노골적인 만행보다 더 교활한 것이지.

김형수=맞아요.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이 그런 비극적 상징계에 구멍을 내려 했던 것 아닙니까?

고은=나는 아직 이런 식민지의 악덕을 내 몸으로 체험할 때가 아니었으나 내 할아버지 할머니나 아버지 어머니들 그리고 마을의 어른들이 하나같이 일본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것에서 나 자신의 신분도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미리부터 자각한 셈이지. 더구나 1931년의 만주사변과 1939년 중일전쟁에 돌입하면서 그 30년대 중반은 이미 식민지 전역이 전시체제로 굳어졌어. 총독 미나미(南次郞)의 부임으로 조선인을 일본화시키는 정책은 전시체제의 주요 목표이기도 했지. 농촌진흥책이라든가 자력갱생운동이라든가 하는 일본 본토와 식민지 사이의 유통 갈등을 막는 과정에서 이제까지 있어온 한국 농촌의 오랜 협동체나 일제에의 대응으로 생겨난 농민운동의 여러 가능성마저 일거에 탄압을 받음으로써 예부터 내려온 ‘더불어 삶’이 해체되기에 이르렀어. 이것은 훨씬 뒤 1960년대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그때까지 이어진 오랜 두레의 흔적을 싹 지워버린 것하고 어금버금이기도 하지.

김형수=그냥 막연히 존재방식이 사고방식을 낳을 거라 믿었는데, 선생님의 사유체계 안에서 세계를 불연속적이고 독립적인 원자들의 결합이 아니라 연속적인 관계들의 유기체로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고은=사실 한국 농촌의 긴 역사에서 농민들의 노동과 생계를 위한 자생기구로서의 여러 연대행위의 풍습은 그 자체가 봉건시대의 학정과 착취에 대한 최소한 자기방어의 의지로 다져진 저항의 산물인지 몰라. 두레란 그저 누가 한눈에 보기에 아름다운 관습이기보다 수많은 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처절한 생존을 위한 연대의 생활화라 하겠지. 그래서 풍경에는 피가 흐르지. 자연에 역사가 번지는 것이 인간의 조건 아닌가.

김형수=울 밑에 선 봉선화가 처량할 수밖에 없네요. 전통시가 왜 만가 형식을 띠었는지, 그 속의 풍경들은 왜 상처의 기호로 쓰였는지 말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럼에도 선생님의 시는 눈물 젖은 향토애보다 미지의 어둠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고은=고향이란 그 시기를 떠나서 과거화되었을 때와 그 현장을 떠나서 객체화되었을 때에나 비로소 향수의 대상이 되지. 그렇지 않고는 고향은 질곡의 호흡이지.

김형수=대지를 박탈당한 자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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