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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과의 대화

[고은과의 대화](15) 농경시대 유산 ‘씨족 정서’ 그 친화의 공동체야말로

소설가·평론가 김형수=겨울이 깊어가느라 그러는지 찬바람 속에서 생명의 스산함이 느껴집니다. 군산 들판은 잘 있을까요? 지난번에 대지 이야기를 하실 때 궁금했는데, 그곳에 선생님의 풍경이 있었습니까? 단양팔경, 관동팔경 같은 것 말입니다.

고은=나는 풍경광(狂)이라네. 그런데 인간이 끝나는 데서 풍경이 시작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풍경을 통해서 인간 제백사를 잊어버리고 싶다는 것과 아예 인간 혐오를 내비치는 것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풍경론은 풍경 속의 인간이나 인간의 삶이 결코 풍경 자체와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네. 그러므로 내 어린 시절의 지워지기 쉬운 기억 밑창에 남겨진 고향 일대의 풍경이야말로 풍경 이상이기도 하지. 아니, 풍경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의 풍경들의 이전인지 몰라.

김형수=외부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면 어떨까요? 관광학에서는 시선의 탄생을 중시하는데요.

그림 | 임옥상 화백

고은=오늘날 관광객이라 할 때의 그 관광(觀光)이 단순 오락의 차원으로 여겨지는 것과 달리 그 본래의 뜻은 주역에서의 ‘본체 보기’인 것하고도 한 맥락이기를 바란다네. 한국사람 대부분의 고향은 농촌이지. 이 말이 부족하다면 농어촌이고 거기에 더해서 산촌이 곁들이고 있지. 그래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명분만큼 우리에게 자연발생적인 대의명분의 터전도 없을 성싶어. 이것은 결코 농업국가의 정치구호는 아니지.

김형수=농민을 세상의 표본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풍경을 오려내는 게 아니라 거기에 동참하는 태도가 느껴집니다. 그 유년기 들판은 아직도 ‘정신적 반려’로서의 기능을 합니까? 근대문명의 자식들은 대부분 잊었을 텐데요.

고은=고대문명이 농경문명이라는 토대로 가능했던 것을 보면 근대문명이란 이제 막 시작한 것이 아닌가. 그만큼 농업문명이란 그 농업이 해체되는 위기인 어제오늘에도 우리들의 근원적인 보편성을 아직껏 담보하기를 마다하지 않네. 하지만 황하나 인더스강이나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기슭의 농업이 원시 공산사회를 소멸시키게 되는 왕권 노예제 사회의 출현이나 문자의 출현과 함께 진행될 때 농업이나 언어의 체계화는 지극히 정치적이기도 하지.

김형수=존재의 서사는 몰라도 자아의 서사는 문자를 습득해야 시작되는 거겠지요?

고은=이집트 나일강 기슭의 그 신성문자가 파라오와 승려계급의 절대문자였던 사실은 오늘날 단 하루도 문자언어 없이 살 수 없는 우리 자신을 성찰의 대상으로 만들기도 하지. 그래서인데 문자 없는 사람들의 삶이 역설적으로 훨씬 더 사람다운 삶을 산 것인지도 몰라.

김형수=문자가 없어도 농사법은 있었을 것 같아요.

고은=이집트 농민들도 물론 문자 없는 농민이었지. 그런데 그들의 농사는 가령 우리네 동북아시아의 농업과 좀 다르더군. 그저 씨 뿌릴 때가 되어 씨를 뿌려 두면 돼지들을 풀어놓아 마구 밟아대면 씨앗들이 흙 속에 깊숙이 박혀졌다가 나중에 돋아나면 되었어. 나일강의 그 풍부한 홍수로 다져진 비옥한 토양이니 굳이 관개니 뭐니 하는 치수(治水)도 필요 없는 자연농업이었지. 그저 씨 뿌리고 나서 수확을 기다리면 되었지. 낮잠을 늘어지게 자거나 원숭이를 길들여 열대과일을 따게 하고 그물질로 고기들을 잡고 밤에는 그 고기그물을 모기장으로 썼지.

빈농의 대량생산 시대 30년대를 살게 한 것은 두레 같은 공동체 의식

김형수=하하, 타자의 모습이 진풍경이 되는 곳에서 또 다른 문화가 출발할 것 같습니다.

고은=이집트 기하학은 농업이 아니라 피라미드에서 태어났지. 그 기하학의 딴판에서 이런 팔자 좋은 나일강 농업이 가능했는데 거기에 비하면 중국 농업이나 우리 농업은 거의 전천후의 정성을 바치는 농업 노동이었어.

김형수=생태환경의 차이가 경제활동의 차이를 낳고, 경제적 차이가 사회구조의 차이를 초래하며, 그것이 규범의 차이, 민속의 차이, 사유방식의 차이를 만든다고 봅니다.

고은=그렇지. 놀라운 것은 고대 이집트 농민들이 신전 짓기에 동원되어서 식품 조달이 여의치 않을 때는 총파업을 단행했더군. 이런 일은 고대 동방의 농투성이 백성들에게는 꿈 같은 일이었어.

김형수=어린 시절의 공동체에 대한 연민을 듣고 싶어요.

고은=우리 조상들의 농사는 말 그대로 마음 놓을 날이 별로 없었어. 농사야 하늘이 짓지 어디 사람이 짓나? 라는 해묵은 속담이야 버젓이 남아 있지만 그 속담은 겸사에 불과할 때가 많아. 농사란 하루 내내 그 농사에 일손을 놓지 않아도 표가 나지 않아서 밑도 끝도 없어. 어려서 듣던 말이 있어. ‘5풍10우(五風十雨)’라는 것 말이네. 닷새 만에 바람 한 번 불어주고 열흘 만에 비 한 번 내려주면 농사야 저절로 지어진다는 것이지. 하지만 정작 농사짓기는 모 심고 나면 퇴비 만들어야 하고 수확하고 퇴비 만들어야 하고, 한밤중에도 물꼬 보러 들에 나가야 했지. 아닌 밤중의 퍼붓는 빗속에서 물꼬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 거의 유일하게 두레마을의 사건이기도 했지.

김형수=그렇겠네요. 밭(田)에 물(水)을 채워야 논(畓)이 되니까요.

고은=그러니 농사꾼이야 숨 놓아야 논두렁 졸업이지. 도작(稻作)이란 쌀농사가 남방에서 건너온 것이어서 북방이나 다른 지대에서 시작된 곡식보다 훨씬 면역력이 민감하지. 이렇게 조심스러운 벼의 소출은 언제나 기대수확에 못 미치는 것이 연례였네. 풍년 또는 풍작이라는 말처럼 배부른 꿈이 담겨진 말도 없어. 그래서 농촌사회에서 오랜 염원은 시화연풍(時和年豊)이야. 이렇게 농사짓기에 익숙한 삶임에도 그 농사야말로 하나의 낯선 운명이기도 했지.

김형수=만주에서 문익환 가문을 취재할 때 보니까 조선 사람들만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더라고요. 쌀을 재배하기가 그렇게 어려웠습니까?

고은=한국사람은 첫째가 논이었지. 일생 동안 이런 농사를 짓는 한국농부는 비록 문자와는 무관한 삶이었으나 그가 그 농사의 네 계절의 삶으로 다져온 오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체험적 지혜는 결코 해동주자(海東朱子) 송시열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지. 어린 시절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사물과 인생에 대한 그 따뜻하고 웅숭깊은 이해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지.

김형수=배꼽 빠진 삽 한 자루로도 강물의 흐름을 다스렸으니, 오죽했으면 곡식도 주인의 발자국을 알아본다 했을까 싶습니다.

고은=농업은 농지 배당의 오랜 모순 위에서 이어지는 고난의 생업이기도 했어. 자작농과 소작농의 차이는 실로 깊은 골을 만들어 놓았어. 소작일 경우 소작료를 내고 난 가을의 절망이야말로 농촌의 변함없는 풍경이기도 했다네. 내가 태어난 1930년대 앞뒤로 이미 조선 농촌은 소작조건이 악화될 대로 악화되고 있었지. 옛 왕조 시대의 끄트머리에는 궁장토(宮庄土)의 임자인 왕실에서 반분타작(半分打作)을 요구했는데, 어떤 때는 작인들의 조세저항으로 소작료의 3분의 1 내지 4분의 1을 내면 되었지. 이런 사례가 식민지 이전의 보호국 체제 때부터 자주권이 강화됨으로써 소작료가 4할 내지 4.5할로 기승을 부리게 되지. 이것도 약과였어.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동척농장(東拓農場)은 소작료가 2분의 1로 시작하다가 곧장 7할, 8할로 되고 말았어.

김형수=세상에! 자기 땅에서 남의 나라 소작을 부쳤는데, 그것도 열 농사 지어서 둘밖에 못 먹다니요? 추수를 해도 볏단이 새끼줄에 묶여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겠어요.

고은=그야말로 빈농의 대량 생산 시대가 되었지. 내가 태어나기 10년 전에 이미 빈농이 50%였다가 내가 젖을 뗄 때쯤은 80%가 넘어버렸지. 아니 내가 태어난 해에 이미 춘궁기 농가 수가 전체 농가 절반에 육박했네. 어떤 해에는 뽕나무 밭에 비료로 쓴 콩깻묵을 다 파내다가 훔쳐 먹어야 굶주림을 메웠고 남의 산 소나무 껍질 벗겨 먹다가 매 맞기도 했지. 그런데 이런 절대빈곤에도 불구하고 한국 농촌에는 오랜 두레의 삶이 중앙이나 지방 차원의 통치 말고 자신들의 삶으로 연면한 자치의 미덕이 엄연했다네. 이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농업으로서의 의지 지속이기도 하지.

김형수=안 그래도 겉보리로 연명하던 민초들이 피폐할 대로 피폐했군요. 논두렁에 가득 내린 이슬방울이 그려집니다. 그래도 기층의 생명력은 따로 있었다는 말씀이지요?

고은=어린 시절의 나는 이런 미덕의 환경에서 하나의 행복 첫걸음을 누린 셈이지. 숫제 마을 전체가 혈족이고 인척이고 십촌 이내의 핏줄로 구성되고 있었어. 갑을병정이나 장삼이사가 다 한핏줄로 얽혀진 셈으로 형님 동생이고 아저씨이고 조카이고 할머니이고 손자 손녀였어.

농촌사회 동종 의식이 현대의 이기적 유전자를 극복하게 해줄 보배야

김형수=농경의 무리는 불가피하게 풀 더미를 연상시킵니다. 동물은 제각각 떨어져서 대를 잇지만 식물은 한곳에 매달려서 씨앗을 키우니까요.

고은=농경생활권이란 기본적으로 먼 곳이 필요 없었지. 노자의 이상향에서 말하는 건넛마을 닭 우는 소리도 들을 까닭이 없는 그런 고착의 삶이 굳이 이상향일 필요 없는 삶의 현실이었어. 오십리 밖에서 시집온 아낙도 먼 마을에 온 셈이었지. 우리 마을 소지주네 며느리 하나가 멀고 먼 전주 고사동에서 어찌어찌 시집와서 “고사동 떡(댁)!”으로 불릴 때 그 고사동이란 실제로 있는 장소가 아닌 상상의 공간으로 생각될 정도였으니까. 앞산 뒷산의 소나무마을에서 태어나 그 마을에서 씨 뿌리고 자식 낳고 그 마을 소나무 밑에 묻히는 것이 농민의 단순하기 짝이 없는 전 생애였으니까.

김형수=수천년을 붙박이로 살아온 목숨들이 최근 수십년 사이에 광활한 영역을 떠도는 경제철새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 낙차 큰 가치관의 변동을 인류가 앞으로 어떻게 메워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고은=고대 중국의 시가(詩歌)는 황하 유역의 유교와 장강 유역의 도교처럼 황하 유역 농경지대에서 시경(詩經)이 있게 되고 남쪽 장강 유역에서 무속의 신명이 서는 초사(楚辭)가 있게 되지. 이 둘이 다 문화의 장(場) 안에 있는 한반도의 고대 정서와 결코 이질적인 것이 아니었네. 오늘날의 중국 산동지방과 고조선이나 그 뒤 삼국시대의 한반도와 거의 하나의 농업권이기도 한 셈이어서 불우한 공자가 동이(東夷)에 가서 살고 싶다 한 것도 특별한 것이 아니었어. 그래서인데 시경이 우리에게 타자의 시가 아니게 여겨진다네. 특히 시경 국풍(國風)의 어떤 것들은 그대로 동이전(東夷傳) 속의 생활질서 그대로라 할 수 있어. 사실 동이족의 분토는 고조선이나 고대 삼국 초기만으로 제한될 수 없지. 그것은 크게는 주(周)에 멸망한 은(殷)의 구성 자체가 동이족과 밀접했으니까.

김형수=동이란 족(族)의 이름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고 한자를 동이족이 만들었다는 설도 있던데, 고대사에 대한 소양이 부족해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우리의 고대 정서가 지금 말씀하시는 시가들의 그늘 밑에 있었다는 거지요?

고은=시경 국풍은 단언하지만 농사짓는 남녀노소가 하루의 일을 마친 뒤 밤 이슥토록 서로 어우러지는 집단의 가무였어. 우리네 남도의 원무인 강강술래도 실은 고대세계 도처에 있는 인류의 집단정서와 닿아있는 것이지. 이런 농업노동을 통한 정서나 사상이 국풍 같은 시로 남겨지고 주역과 같은 농업을 통한 우주자연 그리고 인간의 운명을 종합한 사상도 생겨나게 한 것이지.

김형수=자연합일의 도가적 세계관이야말로 저희들 감수성의 심층에 박혀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근대교육을 아무리 받아도 일상과 일상의 여백을 미신과 주술로 가득 채웠던 어린 마음 그대로거든요.

고은=사실 시나 사상의 바탕은 다 천지와 소통하는 주술이야. 한자의 표의와 상형도 다 주술이지. 알타이 샤머니즘만이 주술이 아니지. 저 20세기의 바타유라는 사람도 지구의 자전운동과 인간과 생물의 성적(性的) 운동을 결합하는 성 사상을 말하지. 지구 자전으로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성으로 교합하고 또 이 교합으로 하여금 지구가 자전한다는 이 교합범신론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하지. 더 나아가 지구와 태양의 우주 교합, 지구와 달의 교합에 의한 바다의 조석(潮汐)운동 등을 다 성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겠지. 이것이 고대 동양의 음양사상과 조금도 어긋날 이유가 없겠어.

김형수=그래서 근대의 반성이 우리를 자연에게 가까이 가도록 해주리라 믿었는데, ‘탈근대’ ‘탈냉전’ ‘탈이데올로기’ 같은 언어가 우리를 더욱 유럽 정신의 깊은 골짜기 속으로 밀어넣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아시아의 중세를 그리고 싶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고은=사실 우리네 농촌의 두레가 보여주는 그 한집안 식구로서의 동종의식이야말로 현대사회에서의 개체포화와 이기적 유전자를 이타화할 하나의 전범일지 몰라. 그것이야말로 교합생존이니까.

김형수=그런 생태적 감수성의 회복이 시급한 것 같아요.

고은=씨족의 단계(單系)는 대체로 부계를 통해서 지속되었으나 그 부계의 가부장주의나 남성우월주의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계로서의 모성과 여성의 음(陰)을 하나의 원천으로 삼아왔지. 그래서 모든 남성이 돌아갈 모성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 나는 공자가 남자의 것이라면 노자야말로 여자의 것이라고 생각하네. 도덕경의 곡신불사(谷神不死)의 궁극적 여성성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경지가 아닐까. 오키나와 무덤들이 여성 성기의 모양인데 이것은 죽어 어머니의 몸안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표상이더군.

김형수=문득 해보는 생각인데, 수컷이 미지를 향해 산화해가는 모험적 존재라면 암컷은 영원을 도모하는 관리자적 존재가 아닌가 합니다. 힘은 수컷이 갖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슬기’는 암컷에게 있으니까요.

고은=그렇고말고. 아무튼 씨족의 확대 또는 타자의 씨족화로 이루어진 오랜 농경시대의 그 자치적이고 자결적인 기초 사회인 우리 모두의 고향이야말로 어쩌면 두고 온 고향이 아니라 다가올 고향일 것이고 그것은 끝내 과거가 아니라 미래일 것인지도 모르지. 그러므로 마을의 의미는 행정상의 구획이 아닌 삶의 자연을 실현하는 자연부락이지.

김형수=마을을 ‘삶의 자연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보시는 눈길은 아주 새롭습니다. 제가 근자에 인터넷을 도구로 사용하는 마을공동체에 대해 상상하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으니 앞으로 좀 고민해 보겠습니다.

고은=사실 씨족은 시조가 아득한 저쪽이어서 불분명할 때의 계보에 해당하지. 시조가 어느 정도 확인될 수 있다면 그것은 씨족이기보다 계족(系族)이라고 하더군.

김형수=서양은 ‘범주’를 중시하여 명사에 민감하고 동양은 ‘관계’를 중시하여 동사에 밝다는 주장을 읽은 적이 있는데….

고은=그래서 씨족은 신화적이거나 전설적인 시조를 설정하는 것이지만 그 설정 자체가 하나의 신념이 되어서 확정 이상으로 강해지지. 이런 씨족의 확대가 포족(胞族)이 됨으로써 친연성과 교호성으로 강화된 씨족의 복수화를 지향하는데 이것의 가장 정치적인 표현이 끝내는 대한제국 시절의 ‘이천만 동포’였고 1945년 이래의 ‘삼천만 동포’였으며 오늘날 잘 쓰지는 않지만 없어질 수 없는 ‘오천만 동포’ 또는 ‘칠천만 동포’로 발전한 것이지.

김형수=인간의 무리를 이데올로기로 묶는 전통은 왜 생겼을까요?

고은=그런 전통은 생활문화의 차원이 아니라 정치문화의 그것이겠지. 전쟁 수행이나 권력 유지의 장치로서 그만한 것이 없지 않은가. 이런 사례와는 달리 인류학적으로 씨족의 의미가 크게는 아까 말한 동포의 개념에도 반영될 수 있을 경우 이런 씨족 정서는 분명히 농촌 자연부락에서 생겨난 것이지. 동양에서 국가를 하나의 큰 가족 내지 가정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음으로써 근대 민족주의 국가 개념과는 다른 혈친적인 색채를 갖는 것도 충분히 농경시대의 유산이 아닐 수 없겠어. 누구나 지난날의 불행조차 그것을 반추할 때는 미화하기 십상이지만 나의 경우도 내 궁핍의 어린 시절을 기억할 때의 그 아름다운 친화의 공동체야말로 내 삶의 자산이 되고 있네 그려.

김형수=이 같은 이야기가 주어진 세계에서 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분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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