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은과의 대화

(20)
[고은과의 대화](12) 수많은 혈친·인척 명사를 만든 ‘나의 탄생’은 집안의 축복이었 소설가·평론가 김형수=대화의 초반에는 주로 선생님의 자아의식이 확장해간 영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규모가 시간적·공간적으로 하도 광활해서 따라가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그것들이 응집된 ‘육신’의 기원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고은=나에게도 루소의 ‘고백’처럼 말할 저주의 용기가 없지 않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복창할 생각은 없다네. “내 인생 최초의 불행은 바로 나의 탄생이었다”는 말은 1712년 서반구 스위스 제네바의 한 갓난아기를 가리키지만 1933년 동반구의 극동 한반도 변방의 아이를 무작위적으로 가리킬 수 없지 않은가. 김형수=선생님의 발자국에서 루소의 영혼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지적인 예리함, 소년적인 열정, 전통을 알면서도 전혀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 등에서 말입니..
[고은과의 대화](11) 어릴적 별명은 ‘암사내’였지만 마음 깊숙이 ‘불’이 들어있었 소설가·평론가 김형수=지난주 ‘폐허’에 대한 말씀을 듣고 내내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왜 문명을 비운 ‘영점(零點)의 상태’를 지향하는지, 그것이 왜 데카당스가 아니라 ‘세노야’ 같은, 자연으로서의 인간에 닿는 시를 낳는지 알 것도 같았습니다. 이제 존재가 머무는 쪽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은데요. 인간의 눈길은 항상 어둠의 세계에서 빛을 향해 열리는 것이 아닐까요? 고은=인류는 당연하게도 태양숭배로 자신의 삶을 이루어왔네. 어찌 인류뿐이겠는가. 무릇 산천초목도 큰 짐승도 잔짐승도 미물도, 심지어는 지하의 흙속의 생명체나 태평양의 심해 그 막대한 수압의 어둠 속 어패류들도 태양계의 한 행성인 지구의 우주적 운명을 한 치도 거스를 수 없는 태양의 소산들이 아닌가. 그러니까 만사는 태양 이후가 아니겠..
[고은과의 대화](10) 다섯 살 때 집 대부분 불 타… 내 폐허의식은 그로부터 시작 소설가·평론가 김형수=랭보는 시인을 “길고 거대한 타락에 바탕을 둔 모든 감각을 통해 선지자가 되는 존재”라고 언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걸 인용해 선생님의 ‘파괴적 행보’가 얼마나 생산적인가를 평가하고자 했던 글이 저의 ‘오십년 동안의 사춘기’입니다. 혹시 그런 정신을 선생님의 시대가 낳은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고은=굳이 나의 동시대를 말한다면 나는 지금의 나이기보다 나 이전의 나이고 싶네. 1만년 내지 몇 만년 동안 크로마뇽인으로 살았던 내 먼 인류로서의 조상이 씨족으로서의 내 조상 이전의 나일지도 모르지. 실제로 크로마뇽인의 초상과 현대인류로서의 내 초상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네. 지구 몇 10억년의 긴 시간 속에서 만년 단위란 상대적으로 촌음 아닌가. 김형수=말씀이 어렵습니다. 선생..
[고은과의 대화](9) 회중시계 물려주던 스승 효봉 “시간에 얽매이지 마라” 소설가·평론가 김형수=어느 인터뷰에서 글 쓰는 시간을 ‘불침번’에 비유하신 기억이 납니다. 다들 잠들었을 때 깨어 있는 그런 단독자의 마음에 대해 듣고 싶은 사람이 많을 텐데요. 고은=그동안 이 ‘천일야화’의 첫머리는 에움길로 굽이쳐왔네. 내가 태어난 이래의 시대나 자네가 아직 태어나기 전의 시대를 아울러 말한다 해도 그 동시대성 안의 풍경이란 전근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의 별 도리 없는 합류로도 보일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 전통과 새로운 것들의 괴리도 여기저기 드러나는 것이었지. 김형수=저야 양 세기의 동시성을 깨닫는 과정이었습니다. 양서류가 웅덩이에서 느끼던 시간과 뭍에서 느끼는 시간이 얼마나 다른가를 생각하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됩니다. 둘을 어떻게 하나의 감각에 통합할 것인가 하는 숙..
[고은과의 대화](8) 문화만치 고유하지 않고 여러 가지 혼교로 되는 것도 없지 고은 소설가·평론가 김형수 = 저는 이 대화의 주제를 ‘고은에게 관찰되는 고은의 자아’, 즉 고은의 시적 페르소나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아는 역시 ‘길 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거듭 깨닫게 됩니다. 양 세기의 나그네가 현재의 좌표를 가리키면서 여기가 어디인지를 들려주는 느낌이랄까요. 지금 이야기가 그 방향으로 가는 게 맞지요? 고은= 나 야 자아에의 목마름의 시대를 살아오는 동안에도 시 속의 화자로서의 나를 많이 써 온 사람 아닌가. 시 속의 화자와 시 밖의 작가가 경계를 이루는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한 우리 근대시의 무자각적 행태에 나도 몽유병자로 끼어들지 않았나 싶지. 김형수 = 서구 시학의 본질은 고독에 있다고 말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비유나 상징은..
[고은과의 대화](7) 이제 관념으로서의 자아는 사망한 것 아니겠나 소설가·평론가 김형수 = ‘나’는 무엇인가 하는 것은 서양의 근대를 통해 가장 끈질기게 추구된 질문의 하나입니다. 선생님도 그것을 놓치지 않고 추적한 사실이 이번에 수없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공간적으로 서양의 범위를 크게 넘어 고대 인도까지 이른 것을 보여줍니다. 서양도 나서 자라고 소멸하는 세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저는 왜 놓치는지 몰라요. 고은 = 서양이란 고대에는 그냥 풀밭이고 숲이었지. 북구 신화의 주신 오딘은 숲속의 맹수를 닮았지. 고대의 서양에 중동의 고대가 걸어가고, 이집트의 고대와 바다와 산악으로 소통되는 인도의 고대가 건너가서 각 지역마다 정착, 변형되어 간 것이 서양문화 아닌가. 그러니까 라틴 문화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겠지. 김형수 = 예전에는 하나의 산야(山野)였는데 말입니..
[고은과의 대화](6)인간은 문화의 분절을 몸으로 겪는 ‘시간 속의 양서류’와 같다네 김형수(소설가·평론가)=이제까지 선생님은 인간의 신체에 쌓인 거대한 시간의 크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속에서 당대 문명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패러다임에 불과하다는 것, 또 인간의 수명은 길어지고 정신의 크기는 작아졌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양 세기의 달빛’을 말씀하시는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고은=양 세기에 걸친 삶이란 내가 내 부모의 자식인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선택 불가능한 삶이겠지. 또한 인간의 시간관념이 만든 시대라든가 세대라든가 세기라든가 하는 것이 우연하게 적용됨으로써 단(單) 세기를 사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에 지나지 않겠지. 그럼에도 그저 20세기만이 아니라 두 세기에 걸친다는 것은 시간관념의 차원을 넘어서 복합적 역사단위가 되지 않을 수..
[고은과의 대화](5)감옥에 있을 때 세계지도라도 붙여놓아야 내 가슴 속이 뚫렸지 소설가·평론가 김형수=5년쯤 전에 ‘눈 내리는 날’이라는 시를 발표하셨습니다. 한 나그네가 눈을 맞으며 ‘아아!’ 하는 감탄사를 내지르는데, ‘아아’가 인류 최초의 소리이자 마지막 언어일 거라 하면서, 어미 아비 없는 푸른 하늘에서 막무가내의 ‘아아’들이 펄펄 내려앉는 걸 “하늘의 마지막 손수건인가 보다”하고 노래한 시였어요. 얼마나 정신이 얼얼했는지 모릅니다. 선생님은 이제껏 시의 바깥에서 ‘자아의 형성’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자아’가 너무 커서 주어가 ‘자연인 고은’인지 ‘민족의 정신’인지 ‘시의 화자’인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고은=과분한 화두이겠네. 나는 선가(禪家)의 화두가 세상에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것을 그럴듯하다고 여기면서도 나 자신은 화두라는 말을 쓰지 않네만 자네의 얘기 허두의 뜻이라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