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ㆍ네 배나무를 접 붙이거라!
이상하지요? 밀레의 저 그림은 돌아가시기 직전의 할머니를 연상시킵니다. 할머니는 치매였습니다. 종종 피난보따리를 쌌고, 또 종종 할머니보다 10년 먼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무엇보다도 호불호가 명확해졌습니다. 싫은 사람은 아파트 문턱에서 쫓겨났고, 좋은 사람은 돌아가기 힘들었습니다. 하루 하루가 전쟁이었습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처럼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공격적이 된 할머니가 예전에 그 화초를 좋아하던 심성 고운 할머니로 돌아온 것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이었습니다. 그 날 할머니의 시선이 머문 곳은 베란다에서 크고 있는 큰 화분이었습니다. 가지 꺾인 나무를 한참 바라보며 만져주던 할머니는 실패를 찾으시더니 조심스럽게 가지의 꺾인 부분을 실로 꿰맸습니다. 마지막으로 초록색 크레용으로 흰 실 부분을 칠하는 것으로 나무 수술을 마쳤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선사처럼 “나, 간다, 준비해라!”는 말씀을 던져놓고는 일주일을 무심한 표정으로 누워 있다가 머나먼 길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의 그 일주일이 할머니에 대한 나쁜 모든 기억을 압도하는 것을 보면 할머니에게도 그 작디작은 생명의 의식이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경건한 의식이었나 봅니다.
이상하지요? 밀레의 저 그림은 돌아가시기 직전의 할머니를 연상시킵니다. 할머니는 치매였습니다. 종종 피난보따리를 쌌고, 또 종종 할머니보다 10년 먼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무엇보다도 호불호가 명확해졌습니다. 싫은 사람은 아파트 문턱에서 쫓겨났고, 좋은 사람은 돌아가기 힘들었습니다. 하루 하루가 전쟁이었습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처럼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공격적이 된 할머니가 예전에 그 화초를 좋아하던 심성 고운 할머니로 돌아온 것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이었습니다. 그 날 할머니의 시선이 머문 곳은 베란다에서 크고 있는 큰 화분이었습니다. 가지 꺾인 나무를 한참 바라보며 만져주던 할머니는 실패를 찾으시더니 조심스럽게 가지의 꺾인 부분을 실로 꿰맸습니다. 마지막으로 초록색 크레용으로 흰 실 부분을 칠하는 것으로 나무 수술을 마쳤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선사처럼 “나, 간다, 준비해라!”는 말씀을 던져놓고는 일주일을 무심한 표정으로 누워 있다가 머나먼 길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의 그 일주일이 할머니에 대한 나쁜 모든 기억을 압도하는 것을 보면 할머니에게도 그 작디작은 생명의 의식이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경건한 의식이었나 봅니다.
장 프랑수아 밀레 ‘접붙이는 농부’, 1855, 캔버스에 유채, 80.5×100㎝, 알테 피나코테크, 뮌헨
생명에 관여하는 저 농부, 보십시오! 의례를 집전하는 성직자 같지 않습니까? 매 주일 교회에 가서 생명의 신을 찬양하고 생명의 신께 기도를 올린다 해도 자기 집 앞마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성장할 나무의 접을 붙이는 지금 저 농부의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하나 저절로 시선이 가는 것은 저 농부의 행위를 지켜보는 아내와 아이입니다. 저런 든든한 시선의 지지를 받으면 농부의 행위가 더 조심스러워지고 더 사랑스러워질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몰입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생명을 다루는 남편의 혹은 아버지의 섬세한 손길을 바라보며 성장한 사람들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성장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더불어 저들 사이에서 차곡차곡 뿌리 내린 정은 또 얼마나 깊은 것이겠습니까? 아이를 안고 남편의 손길에 빠져있는 여인의 포스가 든든하기만 한 것이 아이가 얼마나 든든하게 성장할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밀레는 저런 분위기에서 성장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밀레의 아버지는 자상하고 반듯한 남자였다지요? 그는 아름답게 피어나는 생명들을 보면 홀린 듯 오래오래 바라보며 빠져드는 무심한 농부였다고 합니다. “프랑수아, 저 나무 좀 봐라! 세상에, 꽃보다 아름답지 않니?” 어린 시절 저런 아버지를 가졌다면 출세하지 못할 수는 있어도 자존감을 가지지 못할 수는 없겠습니다.
밀레는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좋아했습니다. 단테도 지옥을 여행할 때 베르길리우스의 영혼과 함께했지요? 아마도 베르길리우스는 지옥 같은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지옥 같은 세상을 견디며 통과하며,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는 시인이었나 봅니다. 저 그림의 구체적인 계기가 된 베르길리우스의 시는 이것이었습니다.
“네 배나무를 접붙이거라! 다프니스여, 네 자손들이 그 열매를 딸 터이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위는 내게 가장 소중한 아이를 통해 받을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나의 감수성은 내 아이들이 놀아야 할 마당입니다. 기원전 30년, 베르길리우스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로마의 농촌을 살리는 길이 생명이라 믿었고, 19세기의 밀레는 생명의 대한 감수성이야말로 인격의 중심이고 인간의 미래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생명에 충실한 자 생명을 거두고, 죽음에 충실한 자 죽음을 거둘 것입니다. 지금 내가 거두고 있는 것은 또한 내가 뿌린 씨앗이기도 합니다. 삶은 정직하고, 내가 심어둔 과거는 어떤 모양으로든 나를 찾아오니까요.
ⓒ 경향신문 & 경향닷컴
'이주향의 그림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7) 조지 프레더릭 왓츠의 ‘희망’ (0) | 2011.12.05 |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6) 뭉크의 ‘절규’ (0) | 2011.11.10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4) 고흐 ‘선한 사마리아인’ (0) | 2011.10.28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3) 쿠르베 ‘상처 입은 남자’ (0) | 2011.10.28 |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2) 번 존스 ‘코페투아왕과 거지소녀’ (0) | 2011.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