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경제개발이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
ㆍ서민들 고달픈 삶 위로했던 단골안주
“흔히들 순대는 돼지나 소의 내장(창자)으로 하는데 물론 맛도 좋지만 이것은 값이 비싸고 쉽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만들기도 쉽고 값이 싸며 맛도 좋은 ‘오징어순대’가 있답니다.” 이 글은 동아일보 1964년 1월19일자에 실렸다. 당시 돼지나 소의 내장으로 만든 순대가 값이 비싸다니 무척 의아스럽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이다. 1960년대 중반만 해도 일반 서민들이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쉽게 먹을 수 없었던 가난한 때였다. 그러니 그 내장으로 만든 순대 역시 지금과는 사정이 달랐다.
알다시피 순대는 보통 북한 음식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까닭인지는 몰라도 1994년 조선료리협회에서 발간한 <조선료리전집-민족전통료리>에서는 돼지순대, 곰순대, 개순대 따위를 언급하고 있다. 그 중 돼지순대는 “돼지피에 다진 돼지고기, 배추시래기, 분탕(쌀), 녹두나물, 파, 마늘, 깨소금, 간장, 후추가루, 생강즙, 참기름을 넣고 순대소를 만든다. 분탕 대신 찹쌀과 흰쌀을 섞어 만들기도 한다. 돼지밸에 순대소를 넣고 두 끝을 실로 묶어서 끓는 물에 넣어 삶다가 침질하여 공기를 뽑는다. 익으면 건져서 한 김 나간 다음 편으로 썰어 담고 초간장과 같이 낸다”고 했다.
그런데 이 돼지순대의 조리법은 1910년대에 세상에 알려진 <시의전서(是議全書) 음식방문(飮食方文)>에서야 처음으로 문헌에 나온다. 이름은 ‘도야지슌대’이다. “창자를 뒤졉어 정히 빠라 숙주, 미나리, 무우 데쳐 배차김치와 가치 다져 두부 석거 총 ‘파’ ‘생강’ ‘마날’ 만히 디져(다져) 너허 깨소곰, 기름, 고초가로, 호초가로 각색 양념 만히 석거 피와 한데 쥐물너(주물러) 창자에 너코 부리 동혀 살마 쓰라”고 했다. 이 음식의 이름에 ‘도야지’를 붙인 것으로 보아서 돼지 창자를 사용하여 만든 순대임을 알 수 있다. 기름은 참기름이다. 돼지 창자 속에 무엇을 넣느냐는 그때마다 다르겠지만, 무척 많은 재료가 들어갔다. 그런데 이 책에는 ‘도야지슌대’와 함께 ‘어교슌대’도 나온다. 여기에서 어교는 한자 ‘魚膠’로 민어의 부레를 끓여서 만든 풀을 가리킨다. 곧 ‘민어풀’이다. 이 민어풀을 물에 담가 피를 빨고 깨끗이 씻어 숙주·미나리·쇠고기·두부와 함께 갖은 양념을 주물러서 넣어 삶아서 어교순대를 만든다고 했다. 민어(民魚)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후기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었던 생선 중 하나였다. 경상북도 상주에서 발견된 <시의전서 음식방문>에 도야지슌대가 등장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ㆍ서민들 고달픈 삶 위로했던 단골안주
“흔히들 순대는 돼지나 소의 내장(창자)으로 하는데 물론 맛도 좋지만 이것은 값이 비싸고 쉽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만들기도 쉽고 값이 싸며 맛도 좋은 ‘오징어순대’가 있답니다.” 이 글은 동아일보 1964년 1월19일자에 실렸다. 당시 돼지나 소의 내장으로 만든 순대가 값이 비싸다니 무척 의아스럽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이다. 1960년대 중반만 해도 일반 서민들이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쉽게 먹을 수 없었던 가난한 때였다. 그러니 그 내장으로 만든 순대 역시 지금과는 사정이 달랐다.
알다시피 순대는 보통 북한 음식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까닭인지는 몰라도 1994년 조선료리협회에서 발간한 <조선료리전집-민족전통료리>에서는 돼지순대, 곰순대, 개순대 따위를 언급하고 있다. 그 중 돼지순대는 “돼지피에 다진 돼지고기, 배추시래기, 분탕(쌀), 녹두나물, 파, 마늘, 깨소금, 간장, 후추가루, 생강즙, 참기름을 넣고 순대소를 만든다. 분탕 대신 찹쌀과 흰쌀을 섞어 만들기도 한다. 돼지밸에 순대소를 넣고 두 끝을 실로 묶어서 끓는 물에 넣어 삶다가 침질하여 공기를 뽑는다. 익으면 건져서 한 김 나간 다음 편으로 썰어 담고 초간장과 같이 낸다”고 했다.
그런데 이 돼지순대의 조리법은 1910년대에 세상에 알려진 <시의전서(是議全書) 음식방문(飮食方文)>에서야 처음으로 문헌에 나온다. 이름은 ‘도야지슌대’이다. “창자를 뒤졉어 정히 빠라 숙주, 미나리, 무우 데쳐 배차김치와 가치 다져 두부 석거 총 ‘파’ ‘생강’ ‘마날’ 만히 디져(다져) 너허 깨소곰, 기름, 고초가로, 호초가로 각색 양념 만히 석거 피와 한데 쥐물너(주물러) 창자에 너코 부리 동혀 살마 쓰라”고 했다. 이 음식의 이름에 ‘도야지’를 붙인 것으로 보아서 돼지 창자를 사용하여 만든 순대임을 알 수 있다. 기름은 참기름이다. 돼지 창자 속에 무엇을 넣느냐는 그때마다 다르겠지만, 무척 많은 재료가 들어갔다. 그런데 이 책에는 ‘도야지슌대’와 함께 ‘어교슌대’도 나온다. 여기에서 어교는 한자 ‘魚膠’로 민어의 부레를 끓여서 만든 풀을 가리킨다. 곧 ‘민어풀’이다. 이 민어풀을 물에 담가 피를 빨고 깨끗이 씻어 숙주·미나리·쇠고기·두부와 함께 갖은 양념을 주물러서 넣어 삶아서 어교순대를 만든다고 했다. 민어(民魚)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후기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었던 생선 중 하나였다. 경상북도 상주에서 발견된 <시의전서 음식방문>에 도야지슌대가 등장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생선이나 짐승의 내장에 온갖 재료를 넣고 찜을 하는 음식은 제법 오래된 것이다. 경상북도 영주의 두들마을에 살았던 장계향(1598~1680)이 붓으로 쓴 <음식디미방>에서는 개의 창자를 이용하여 순대를 만들었다. “개를 자바 조히 ‘깨끗이’ 빠라 어덜 삶아 뼈 발라 만도 ‘만두’소 니기다시 하야 후쵸, 쳔쵸, 생강, 참기름, 젼지령(진간장) 한데 교합하여 즈지(질지) 아케 하여 제 창자를 뒤혀(뒤집어) 죄 빠라 도로 뒤혀 거긔 가닥이 너허 실뢰(시루에) 다마 찌되 나자리(한나절)나 만화(약한 불)로 쪄내여 어슥어슥 싸하라(썰어라). 초 계자(겨자) 하여 그만 가장 죠흐니 창자란 생으로 하되 안날(전날) 달화(손질) 양념을 하되 교합하여 둣다가 이튼날 창자의 녀허 찌라.” 그런데 장계향은 이 음식의 이름을 ‘개쟝’이라 적었다. 지금 말로 하면 ‘개순대’이다. 장계향은 개고기를 이용한 음식을 무려 여섯 가지나 적어두었다. 그 중에서 ‘개쟝’은 제일 먼저 나올 정도로 특별한 음식이었다.
그로부터 대략 80년 후인 1766년에 한양에서 태의원의약을 지냈던 의관 유중림은 <증보산림경제>에서 ‘우장증방(牛腸蒸方)’이란 음식을 언급하였다. “쇠창자는 안팎을 깨끗하게 씻어 각각 한 자가량 자른다. 한편 소의 살코기를 가져다가 칼날로 자근자근 다지고 여러 가지 양념과 기름·장과 골고루 섞어 창자 안에 꼭꼭 메워 넣은 다음 실로 창자 양끝을 맨다. 솥에 먼저 불을 붓고 대나무를 가로로 걸치고 소 창자를 대나무에 고이 앉혀 물에 젖지 않게 하고 솥뚜껑을 덮는다. 약하지도 세지도 않은 불로 천천히 삶아 아주 잘 익기를 기다려서 꺼내어 차게 식히고 칼로 말발굽 모양으로 썰어 초장에 찍어 먹는다.” 동시대의 인물인 빙허각 이씨(1759~1824) 역시 <규합총서>에서 <증보산림경제>와 비슷한 내용의 조리법을 적었다. 다만 쇠창자에 넣는 살코기로 쇠고기는 물론이고 꿩고기와 닭고기도 사용한다고 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소나 돼지, 심지어 개나 생선의 창자에 고기와 채소 따위를 넣고 쪄낸 순대 혹은 창자찜은 반드시 북한 지역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즐겨 읽었던 고대 중국의 책 <제민요술(齊民要術)>(북위)과 <거가필용(居家必用)>(원나라) 때문이라 여겨진다. <제민요술>에서는 양의 창자로 만든 ‘양반장도(羊盤腸搗)’가 나오고, <거가필용>에서는 ‘관장(灌腸)’이란 음식이 나오기 때문이다. 양의 창자를 구하기 어려웠던 조선에서는 개·소·돼지·민어의 창자로 그것을 대신한 순대를 만들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고, 그 결과 순대라는 음식이 탄생했을 가능성이 많다. 적어도 해방 이전까지 북한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남한사람들은 쇠고기를 좋아했다. 그러니 돼지순대가 북한음식이 되었다.
1940년 손정규가 쓴 <조선요리>에서 순대국 조리법을 설명하는 삽화.
이에 비해 한성여고(현 경기여고)와 동경여자고등사범학교 가정과를 졸업한 후에 경기여고 교사, 이화여전 강사, 그리고 의친왕궁 부속 이왕직 촉탁을 지낸 손정규(孫貞圭·1896~1950)는 그의 책 <조선요리(朝鮮料理)>(1940년)에서 순대를 언급하였다. 만드는 과정의 그림과 함께 음식 이름도 한자로 돈장탕(豚脹湯), 한글로 ‘순대국’이라고 적었다. 재료로는 창자(豚腸), 돼지고기, 선지(豚血), 배추김치, 숙주, 그리고 찹쌀가루나 녹말가루, 장과 기타 갖은 양념이라고 했다. “창자 안팎을 소금에 비벼 잘 씻어 둔다.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놓고 숙주·배추김치 등 만두 소와 같이 하여서 돼지고기와 선지와 찹쌀가루나 녹말가루는 엉기게 하기 위하여 넣고, 갖은 양념하여 묻쳐서 창자에 넣고 양 끝을 실로 매서 국에 잘 삶는다. 건져서 식혀 2.3센티로 배어 국에 넣기도 하고 초장 찍어 먹기도 한다. 술안주 등에 호물(好物)로 여기는 것이다.”(한글번역본 <우리음식> 1948년 판) 비록 음식명은 ‘순대국’이라고 했지만, 그 실체는 돼지순대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1964년만 해도 순대는 값비싼 음식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이 되면 마치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이 열매를 맺듯이 돼지순대가 시장에서 사먹을 수 있는 값싼 음식으로 변하였다. 더욱이 그 맛이 얼마나 좋았으면 반찬거리 장보러 온 주부들이 장은 보지 않고 외상으로 돼지순대를 사먹었을까.(매일경제 1969년 4월29일자) 이렇게 인기를 누리게 된 이유는 순대 속에 들어가는 재료가 고가에서 저가로 변했기 때문이다. 곧 당면돼지순대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1960년대부터 정부에 의해 진작된 양돈업의 성장도 한 몫을 했다. 막 본격적인 양돈업이 시작되었던 1960년대 초반, 사료로 쓰였던 미국의 무상 밀이 끊기자 정부는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이에 당시 정부에서는 AID 차관을 유치(1968년)하기도 했고, 삼양그룹으로 하여금 양돈업 진출(1973년)을 하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본래 농민이 집에서 부업으로 서너 마리 정도를 키우면 때에 맞추어 수집상들이 돼지를 사갔다. 수집상은 다시 반출상에게 팔고, 반출상은 다시 도매상에게 넘기고, 마지막에 정육점으로 팔려나갔다. 이러한 복잡한 유통 과정 때문에 수익이 많이 나지 않아 농민들은 양돈업을 전문적으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1960년대 말부터 양돈업은 기업축산이 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반 주요 대도시에는 대형 도살장이 생겼다. 이러한 과정에서 부속물인 돼지창자가 그 전에 비해 훨씬 구하기 쉽게 되었다. 돼지창자 값도 그 전에 비해 싸졌고, 여기에 당면을 넣게 된 1960년대 말부터 돼지순대는 서민의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결과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의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에는 돼지순대를 판매하는 노점상이 들어섰다. 1970년대 초반이 되면 전국의 재래시장에서 돼지순대는 빈대떡·잡채·튀김 따위와 함께 대포 안주로 좌판 술판의 인기 메뉴가 되었다. 이렇게 돼지순대가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자 가짜도 생겨났다. 당면공장에서 버린 찌꺼기를 돼지순대 속에 넣어서 팔다 잡힌 노점상도 있었다. 1970년대 중반만 해도 순대는 40·50대 주부들이 집에서 만들어서 시장에 팔았다. 심지어 돼지창자를 구하지 못한 순대장사가 창자 대신에 얇은 비닐에 싸서 팔다가 경찰에 잡혀가는 사건이 1980년에 일어났다.
1984년에 완공된 서울 지하철 2호선은 신림역 근처를 순대타워로 만들었다. 본래 신림시장에 자리 잡고 있던 조그만 순대볶음집에서 출발한 순대타워는 이주민들의 삶 속에서 고달픔을 달래주던 장소가 되었다. 경제개발의 틈바구니에서 노동자들은 매일 밤마다 대포 한 잔에 돼지순대와 순댓국으로 그 고달픔을 날려 보냈다. 그러자 돼지순대를 전문적으로 가공하는 공장이 구로공단 근처에 생겼고, 이로부터 돼지순대도 대량생산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러자 손으로 만든 돼지순대가 다시 부각되었다. 아바이순대는 함경도의 자존심을 내세워 서민음식 돼지순대를 다시 고급음식으로 회복하는 데 일조를 하였다. 하지만 돼지순대는 여전히 서민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인식되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 후보자들은 재래시장에서 돼지순대를 먹으면서 그들 역시 서민임을 과시했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평소에도 당면돼지순대를 즐겨먹었는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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