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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100년

[주영하의 음식 100년](22) 빈대떡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1920년대 길거리 간이음식점 인기 메뉴
ㆍ해방 후엔 빈대떡집 유행 ‘최고 안주로’

“오늘도 조선여행사에 있는 H형이 찾아왔다. 그가 묻지 않고 내가 말하지 않아도 무슨 약속이나 한 듯이 시간이 되면 가방을 들고 내 단골집인 빈대떡집으로 찾아간다. 을지로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조그마한 빈대떡집까지 극성이도 차서 가곤 한다. 여늬 술집처럼 젊은 여인네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건만 구수한 빈대떡에 약주 맛은 유달리 기맥힌 매력이 잠재해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해방 후 급속도로 발전하고 보급된 것의 하나는 누구나 빈대떡이 아니랄 사람은 없을 게라. 여하간 빈대떡이 없으면 내가 망하고 내가 없으면 빈대떡이 망할 것만 같다. 개중에는 빈자(貧者)떡 혹은 빈대병(賓待餠) 함흥식 지짐이 평양식 지짐이 등으로 고객들에게 통하는 모양이다. 어쨌든 이런 모든 명사가 가르치는 바는 녹두 지짐이에 귀일(歸一) 되는 것이다.”

이 글은 해방직후 7대 신문의 하나로 알려진 자유신문 1948년 12월26일자에 실린 수필 ‘빈대떡’의 일부이다. 필자는 조선신문학원에서 일을 하고 있던 류영륜이다. 그는 빈대떡의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 것을 두고 “이런 불통일한 물질명사의 규정은 우리나라 어학계 권위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고 내가 알 바 아니다”라고 했다. 류영륜이 해답을 미루어두었던 빈대떡의 어원에 대해서는 식민지시기와 해방직후 국어학자로 활동했던 방종현(1905~1952)의 글 ‘빙자떡’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방종현의 이 글이 그가 망자가 된 후에 논문집에 실려 있어 언제 쓰였는지를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15~18세기의 문헌에 보이는 빈대떡의 표현인 ‘빙쟈’가 ‘병식자(餠食者)’의 당시 중국어 발음인 ‘빙져’에서 온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지금의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에 살았던 장계향(1598~1680)은 그의 책 <음식디미방>에서 ‘빈쟈’라 적었다. “녹두를 뉘 업시 거피하여 되게 갈아 기름 잠기지 아니케 부어 끓이고 적게 떠 놓고 거피한 팥 꿀에 말아 소 넣고 그 위에 녹두 가루로 덮어 빛이 유자빛 같이 지져야 좋으니라”고 했다. 곧 녹두를 주재료로 하여 속에 팥과 꿀을 넣은 음식이 바로 ‘빈쟈’이다. 일종의 녹두병인 셈이다.

장계향의 나이 46세가 되는 1643년(인조 21) 음력 9월에 한양에 온 청나라 사신을 왕실에서 영접한 기록인 <영접도감잡물색의궤>에는 녹두병이란 음식이 나온다. 장계향의 남편 이시명(1580~1674)이 이미 그 전에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한양을 드나들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장계향도 익히 이 음식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단지 그 이름을 녹두병이라 하지 않고 ‘빈쟈’라 불렀고, 그것을 만드는 방법을 ‘빈쟈법’이라고 장계향이 책에 적어두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로부터 대략 79년 뒤에 태어나 주로 지금의 서울 옥수동에서 살았던 빙허각 이씨(1759~1824)는 ‘빈자’와 ‘빙쟈’를 두루 사용하였다. “녹두를 되게 갈아 즉시 번철의 기름이 몸 잠길 만치 붓고 녹두즙을 술(수저)로 떠 놓고 그 위에 밤소 꿀 버무린 소를 놓고 녹두즙을 위에 덮고 술로 염정하여 눌러가며 소 꽃전 모양같이 만들고 위에 백자(잣) 박고 대추를 사면으로 박아 지지나니라.” 장계향과 빙허각 이씨는 결코 일면식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양과 영양에 살았던 부인 사이에 이렇게 유사한 방식의 빈대떡 만드는 방법을 적어두었으니 이것은 궁중의 영향이 컸다고 봄이 마땅하다. 특히 두 부인 모두 빈쟈와 빙쟈를 떡 만드는 방법을 적어둔 부분에 배치시켰다. 그러니 방종현이 주장했던 ‘빙져’가 조선에서 빙쟈 혹은 빈쟈가 되었을 가능성은 더욱 높아 보인다.

국어학자 이기문은 방종현의 주장을 수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충하였다. “근대어 문헌에 적힌 어형은 ‘빙쟈’였다. <역어유해>(上 51)와 <방언유석>(2.30)에서 볼 수 있다. 이 두 책에 표기된 중국어 ‘餠食者’의 발음은 ‘빙저, 빙져’였다. <과정일록>(坤 24)에도 ‘餠食者 빙쟈’가 보인다. 여기서 둘째 음절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광재물보>(권2, 음식)에 ‘餠食者 빙’, <한영자뎐>(1897)에 ‘빈’, 광문회의 <사전> 필사본(김민수 편, <주시경전서>, 권 5, 662면)에 ‘빈’이 보인다. (중략) ‘빙쟈’의 정체성이 모호해져서 그것을 보강하기 위해 ‘떡’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이기문, ‘빈대떡과 변씨만두’, <새국어생활> 제17권제2호, 2007)

이용기는 1924년에 펴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 빈대떡 조리법을 언급하면서 “이 떡 일흠이 빈자병인데 가난한 자이 먹는다 하야 빈자병이라 하나 나라 제향에도 쓰고 또 누른적이나 전유어에 밀가루 대신으로 만이 쓰니리라”고 적었다. 곧 빈대떡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떡이기도 하지만, 조선시대 궁중에서 각종 연회에 쓰던 전유어에 밀가루가 없을 때 녹두가루를 사용하여 만든 음식이기도 하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이용기가 제시한 빈대떡의 속에는 파·미나리는 물론이고 배추의 흰 줄거리 데친 것, 심지어 쇠고기나 닭고기나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양념하여 볶아 놓고 여기에 표고·석이·목이 따위의 버섯과 황화채·해삼·전복까지도 들어간다. 실로 이만한 재료가 들어간 빈대떡은 결코 빈자떡이 아니라, 빈대(賓待)떡이 되어야 함이 당연하겠다.

하지만 이용기는 “가난한 사람이 먹는 것이야 엇지 여러 가지를 느을 수가 잇스이요 녹두로만 하야 미나리나 파를 써러 느코 만드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조리법은 1921년판 방신영(1890~1977)의 <조리요리제법>에서도 그대로 나온다. 주악이나 꽃전처럼 빈대떡은 기름에 지지는 음식이다. 조선 후기 궁중에서야 기름으로 참기름을 사용했지만, 가난한 백성들은 이 기름을 구하기가 보통 어렵지 않았다. 19세기 말 이후 중국인들이 서울로 진출하면서 돼지기름이 음식을 볶는 데 자주 쓰였다. 비록 냄새가 나서 좋지 않았지만, 녹두 반죽을 돼지기름에 지진 빈대떡은 그야말로 고기에 비견되는 음식이었다.

결국 1920년대가 되면 빈대떡은 길거리 간이음식점에서 인기 있는 메뉴의 하나가 되었다. 가난한 과부는 먹고살기 위해 서울 종로의 청진동 골목 귀퉁이에 모주집을 열고 여름에는 밀국수, 겨울에는 빈대떡을 안주로 내놓았다.(동아일보 1926년 7월3일) 이렇게 작은 집이라도 구하지 못하는 가난한 부인은 아예 길거리에서 빈대떡을 구워 팔기도 했다. 작부와 바람이 나서 도망간 남편을 대신하여 “사람의 거래가 빈번한 가두에서 빈대떡을”(동아일보 1936년 2월29일) 14년 동안 구워 시집 식구와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원산의 조씨 부인은 모범부녀로 칭송을 받았다. 그래서 친일 문학평론가로 알려진 김문집(1907~?)은 이러한 모범부녀들의 헌신을 빗대어 ‘빈대떡 사상’(동아일보 1938년 3월12일)이라는 예찬까지 늘어놓았다.

‘날로 번창하는 빈자떡집’이란 제목으로 경향신문 1947년 6월28일자에 실린 기사의 삽화.


1946년 창간된 경향신문에서는 이듬해인 1947년에 해방 이후 변화된 거리의 모습을 ‘거리의 화제’란 이름으로 연재하였다. 그중 다섯 번째 글은 ‘날로 번창하는 빈자떡집’이었다. “요지음에 와서 거리나 골목은 말할 것 없이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빈자떡집은 무엇을 말함인가? 그리고 이 많은 빈자떡집이 손님으로 터질 지경이다. 손님들의 모습을 보니 대부분이 ‘빈자’가 아니라 말숙하게 차린 소위 문화인 신사들이다. 해방 즉후 온 장안이 요리점 카페 빠로 변하는 감이 있더니 날이 가면 갈수록 대궐 같은 이 집들은 파리를 날리게 되고 5·6월 파리 꾀듯이 모여드는 곳이 새로 나온 빈자떡집으로 변하였다. 그러고 보면 해방 이후 정말 남조선의 대중생활은 곤궁에 빠졌단 말인가? 한다하는 신사들이 ‘자네 한 2백원 있나?’ 하고 초저녁 때면 찾어 들어가는 서울의 빈자떡집은 허다한 남조선의 혼란 모순 곤궁의 한 개 축도일까?”(경향신문 1947년 6월28일)

앞에서 소개했던 1947년 자유신문에서 류영륜도 해방 이후 가장 발전한 음식이 빈대떡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왜 이렇게 해방 직후에 서울에서 빈대떡집이 유행했을까. 사실 빈대떡집은 그다지 큰 자본이나 조리기술이 요구되지 않는 음식점이었다. 조국을 떠난 사람들,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 그리고 혼란 속에 재산을 날린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길거리에서 좌판을 벌이고 판매한 음식이 바로 빈대떡이었다. 특히 그들이 몰려든 청계천변의 판잣집에는 겨울뿐만 아니라 여름에도 빈대떡을 파는 부인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더욱이 조선총독부가 남겨놓은 물자와 함께 미군에 의해 풀린 먹을거리를 이용하여 시루떡·빈대떡·곰탕·설농탕을 판매하는 좌판이 청계천에 와글와글하였다.(경향신문 1948년 10월5일)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의 대청동 시장을 비롯하여 시장거리의 ‘하꼬방’에서 빈대떡·우동·탁주·소주가 팔려나갔다. 빈대떡이 서민의 음식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녹두 값이 쌀에 비해 월등히 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선술집과 대폿집에서 주당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이 빈대떡이었다. 빈대떡이 얼마나 인기를 모았으면 ‘모던쑈’를 하던 주장(酒場) 카바레에서도 막걸리와 함께 빈대떡을 제공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1967년부터 녹두 값이 매년 급속하게 오르기 시작했다. 녹두가 한참 나오는 1967년 1월에 녹두 한 가마 값이 6500원에 거래되다가, 같은 해 12월에는 8500원으로 올랐다. 이 모두 수요에 비해 공급이 달려서 생긴 일이다.

특히 농지를 개량하면서 벼농사 위주로 농정 정책이 바뀌면서 녹두의 생산량은 그 전과 달리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여기에 1960년대 후반이 되어 정부의 식량정책으로 인해 먹을거리가 풍족해지자 빈대떡의 인기도 급속하게 떨어졌다. 결국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한국인은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라고 했던 1943년 가수 한복남의 심정을 모른다. 녹두장군도 울고 갈 정도로 국내산 녹두 값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싸졌고, 그 속에 들어가는 재료도 국내산 찾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가난한 사람의 떡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이 모두 쌀이 남아도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만 생길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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