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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들

책을 사이에 두고, 우린 사랑을 했지요

책을 사이에 두고, 우린 사랑을 했지요 [2011.01.07 제843호]
[한겨레21·YES24 공동기획] 책과 함께 우린 행복한 겁니다! /
가수 이석원, 여행가 김남희, 소설가 김중혁에게 보내는 팬레터, 그리고 그들의 답장

‘방콕’이 ‘동경’에게

김남희와 책으로 여러 번 여행한 블로거 설해목이 묻고 싶은 것들

안녕하세요, 작가님.

여행에세이스트인 작가님의 독자이자, 여행자로서 작가님의 팬인 한 사람입니다. 책은 물론 TV와 인터넷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작가님과의 여행을 간접적으로나마 함께해오면서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고, 또 저같이 용기가 없어 서른이 넘어도 여행 한 번 떠나본 적 없는 이들에게 마음과 발걸음을 움직이게 하는 촌철살인 같은 한마디 조언을 듣고자 이렇게 몇 자 적습니다.

2003년에 본격적으로 여행길에 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세상 밖으로 발을 움직이게 한 단 하나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떠나기와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삶에서 여행할 때와 머무를 때의 괴리를 느끼시는지요? 만약 느끼신다면 어떤 면에서 가장 큰 괴리를 느끼며 그에 대한 대처 방법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또 샐러리맨이 아닌 여행가로 살아가는 데 경제적 이유 등 두려움은 없으신지요? 한편, 작가님은 특히나 여행 중 길 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런 인연들 중 혹시 이성적으로 끌리는 사람은 없었는지요?*^^* 혹은 잊혀지지 않는, 평생 기억하고 싶은 인연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일본의 걷고 싶은 길>(미래인 펴냄) 1권에서 ‘내가 사랑하는 도시의 조건’이란 글을 보았는데요, 그런 조건에 알맞은 마쓰모토 같은 도시를 몇 군데 더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처럼 몇 년째 마음만 품었을 뿐 이런저런 이유 혹은 핑계로 짐을 꾸리지 못하는 ‘여행을 동경만 하는 사람’들의 발을 움직이게 하는 ‘여행의 정수’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작가님께서 어느 나라 어떤 길 위에 계시든 몸과 마음이 항상 건강하시길 멀리서나마 기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통해 품게 된 외국인을 위한 ‘게스트하우스’와 청소년을 위한 ‘여행학교’라는 여전한 소망 꼭 이루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설해목(blog.yes24.com/jyh7778)


저도 맨 처음 떠나기 힘들었어요

김남희가 떠나지 못하는 당신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낯선 땅과 뜨겁게 만나세요”

» 김남희. 한겨레 박미향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편지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추운 겨울, 마음은 따뜻한 날들이신지요? 적잖은 질문들을 받고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고민이 앞서더군요. 혹 기대에 못 미치는 답이 되더라도 그저 솔직하게 답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세상 밖으로 발을 움직이게 한 단 하나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세계 일주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뒤에도 한동안 떠나지 못했습니다. 막상 사표를 쓰기가 그리 쉽지 않았거든요. 버티고 버티다 끝내 떠날 수 있었던 건 아마 삶을 유보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간절히 하고 싶은 일,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나를 웃게 하는 유일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인생을 방기하고 있다는 느낌. 자유롭게 살기 위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 위해 가까운 사람들을 아프게 하면서 선택한 길인데, 그 길에 오르지도 못한 채 일상의 안락에 젖어가는 제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지더군요. 그렇게 되기까지 예정보다 무려 2년이나 늦어졌고요.

떠나기와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삶에서 여행할 때와 머무를 때의 괴리를 느끼지는 않는지 물으셨지요. 물론 느끼지요. 바깥에서는 늘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별 욕심도 없이 지내는 제가 돌아와서는 세속적 기준에 흔들리는 모습을 볼 때면 가장 괴리감을 느끼곤 합니다.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물질적 욕심을 내는 모습을 볼 때면 ‘아아, 나는 아직 멀었어. 더 내공을 쌓아야 해’ 하고 중얼거리지요. 제가 살고 싶은 삶 ‘덜 갖되 더 충실한 삶’을 살아가려면 좀더 오래 길 위에서 단련해야 할 것 같네요. 아, 또 하나의 괴리감은 속도예요.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 삶이 지나가는 속도랄까. 우리나라는 뭐든지 빠르잖아요. 무슨 일을 결정하고 진행할 때의 속도도, 무언가 유행했다 사라지는 속도도,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속도도. 제가 원래 좀 느린 면이 많은데다, 특히나 여행은 ‘상추밭을 탐험하는 달팽이의 속도’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서울에 돌아오면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로 삶이 빠르더군요. 덕분에 자연의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를 기억해내고 되살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요.

샐러리맨이 아닌 여행가로 살아가는 데 경제적 이유 등 두려움은 없냐고도 물으셨지요. 전혀 두려움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우리는 1분 뒤도 내다볼 수 없기에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선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니까요. 하지만 물질적 풍요로움이 정신적 풍요로움을 보장해주지는 않기에 종종 두려움을 잊어버립니다. 여행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으니까요. 여행을 마친 뒤 정착해 꾸려갈 제 삶의 방식이 그리 많은 소비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약간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방식이기를 바라고요.

답하기 쑥스러운 질문도 하나 하셨네요. 길 위에서 만난 그 많은 인연들 중에 마음이 끌리는 이성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라고 답한다면, 그 또한 거짓말이겠지요. 그 아픈 이야기는 제 책 <외로움이 외로움에게>(웅진지식하우스 펴냄)에 자세하게 실려 있으니 참고해주세요.^^; 저뿐 아니라 다른 분들도 여행에서 가장 힘든 일이 누군가와 정들만 하면 헤어지는 일이 아닐까요. 몇 번의 여행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어려움이기도 하고요. 단지, 길 위에서 언제나 되새기고는 합니다. “진심으로 지극한 것들은 다른 길을 걷더라도 같은 길에서 만나게 되는 법이다”라는 김선우 시인의 말을요. 여행은 어쩌면 찰나의 순간을 나누고, 오래 그리워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사랑하는 도시 몇 곳을 추천해달라고 하셨죠? <일본의 걷고 싶은 길>에 나오는 마쓰모토의 조건을 다 충족시키는 곳은 아니지만, 몇 곳을 말씀드릴게요. ‘배낭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파키스탄의 훈자, 빼어난 자연 환경, 친절한 사람들, 저렴한 물가의 삼박자를 갖춘 곳이죠. 한없이 느린 속도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은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산들에 둘러싸인 작은 도시 치앙마이(타이), 몇 달쯤 배낭을 내려놓고 머물고 싶었던 네팔의 포카라, 눈부시게 하얀 마을이 있는 스페인의 그라나다, 걷는 것만으로도 영적 기운이 전해지는 것 같던 인도의 맥그로드 간즈 등등입니다. 하지만 제 추천을 너무 믿지는 마세요. 전 여행을 하는 모든 곳과 사랑에 빠지는 변덕스러운 성격이라서요.^^ 여행자는 누구나 자신이 여행하는 지역을 새롭게 창조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타인의 추천에 의지하기보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낯선 땅과 뜨겁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랄게요.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나고픈 이들에게 한마디를 건네달라고 하셨지요. 제게 여행은 만남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여행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생각의 성을 벗어나는 것이죠. 성을 벗어나 만나는 것, 그게 여행의 본질이 아닐까요? 잘 몰랐던 자신을 만나고, 타인을 만나 이웃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지구라는 별이 품은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고, 그 자연 속에 깃들어 살아온 인류의 역사와 문명의 흔적을 만나는 것. 결국 여행은 ‘어디로’가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이기에, 자신의 영혼을 흔드는 한 번의 만남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소는 중요하지 않으니, 부디 혼자서 용감히 떠나보세요. 그래서 가슴속 한 번도 울린 적 없는 현을 흔드는 만남을 경험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오랫동안 지켜봐주시고, 격려해주셨지요? 이제야 이렇게라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게 되네요.

지금까지처럼 그렇게, 앞으로도 걸어갈게요. 함께해 주실 거죠? 언젠가 길 위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추운 겨울 내내 몸도, 마음도 평안하시기를….

2010년 12월18일 새로운 여행을 준비하며 김남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