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 | 수원대 교수·철학
ㆍ유디트, 팜므파탈적 에너지
홀로페르네스의 죽음은 행복한 것일까요, 불행한 것일까요? 죽기 전 그는 탄성을 질렀습니다. 세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저토록 아름답고 슬기로운 여인이 다시 있을까, 하고. 그렇습니다.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그토록 매혹당한 여인이 저 여인 유디트고, 그녀의 손이 들고 있는 얼굴이 조금 전까지 그녀를 찬탄했던 바로 그 남자 홀로페르네스입니다. 오스스, 소름이 돋지요? 사랑을 나눈 남자의 목을 베어 들고 있는 침착한 여인의 모습 때문에 돋는 소름의 정체는 두려움일까요, 혐오감일까요, 아니면 공감일까요?
치명적 매력으로 남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팜므파탈의 계보가 있습니다. 이브, 데릴라, 메데이아, 살로메 같은 여인들이지요. 유디트는 그 팜므파탈의 계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여인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그림 클림트의 ‘유디트’는 죽음과 맞바꾸게 되어 있는 바로 그 황홀한 사랑의 표정을 표현했습니다. 그 유디트는 황홀한 사랑만큼이나 매혹적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비현실적입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원래 유디트는 지켜야 할 것을 지킨 여전사라고. 그녀를 팜므파탈이라 칭송하거나 손가락질한다면 그녀는 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설 거라고.
하녀와 함께 적장의 목을 베고 있는 조르다노의 유디트도 유명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그림은 아닙니다. 그 유디트에는 팜므파탈적 당당함이 없으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그림은 저 그림, 티치아노의 유디트입니다. 당찬 유디트와 그녀가 들고 있는 적장의 침묵이 묘한 여운을 남기는 그림입니다. 홀로페르네스의 고요, 아름다운가요, 끔찍한가요? 따뜻한 가슴이 없는 머리는 언제나 끔찍합니다. 남의 삶을 빼앗는 자의 원형이 저기 저 모습일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남의 삶터를 약탈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정상이 아닙니다. 정상이 아닌 오만한 사람, 힘의 논리에 취해 있었던 사람이 유디트에게 당한 것입니다. 매혹당했기 때문에 당한 것이 아니라 얕봤기 때문에 당한 것입니다. 그는 죽어 있으므로 죽어야 합니다. 그러니 여인의 손에 들려 있는 얼굴의 침묵은 파멸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을 선택한 남자의 고요가 아니라 힘의 논리에 취해 오만하기만 했던 남자의 파멸입니다. 언제나 강하기만 한 것은 위험합니다. 관계를 맺을 줄 모르니까요.
홀로페르네스의 죽음은 행복한 것일까요, 불행한 것일까요? 죽기 전 그는 탄성을 질렀습니다. 세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저토록 아름답고 슬기로운 여인이 다시 있을까, 하고. 그렇습니다.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그토록 매혹당한 여인이 저 여인 유디트고, 그녀의 손이 들고 있는 얼굴이 조금 전까지 그녀를 찬탄했던 바로 그 남자 홀로페르네스입니다. 오스스, 소름이 돋지요? 사랑을 나눈 남자의 목을 베어 들고 있는 침착한 여인의 모습 때문에 돋는 소름의 정체는 두려움일까요, 혐오감일까요, 아니면 공감일까요?
치명적 매력으로 남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팜므파탈의 계보가 있습니다. 이브, 데릴라, 메데이아, 살로메 같은 여인들이지요. 유디트는 그 팜므파탈의 계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여인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그림 클림트의 ‘유디트’는 죽음과 맞바꾸게 되어 있는 바로 그 황홀한 사랑의 표정을 표현했습니다. 그 유디트는 황홀한 사랑만큼이나 매혹적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비현실적입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원래 유디트는 지켜야 할 것을 지킨 여전사라고. 그녀를 팜므파탈이라 칭송하거나 손가락질한다면 그녀는 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설 거라고.
하녀와 함께 적장의 목을 베고 있는 조르다노의 유디트도 유명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그림은 아닙니다. 그 유디트에는 팜므파탈적 당당함이 없으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그림은 저 그림, 티치아노의 유디트입니다. 당찬 유디트와 그녀가 들고 있는 적장의 침묵이 묘한 여운을 남기는 그림입니다. 홀로페르네스의 고요, 아름다운가요, 끔찍한가요? 따뜻한 가슴이 없는 머리는 언제나 끔찍합니다. 남의 삶을 빼앗는 자의 원형이 저기 저 모습일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남의 삶터를 약탈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정상이 아닙니다. 정상이 아닌 오만한 사람, 힘의 논리에 취해 있었던 사람이 유디트에게 당한 것입니다. 매혹당했기 때문에 당한 것이 아니라 얕봤기 때문에 당한 것입니다. 그는 죽어 있으므로 죽어야 합니다. 그러니 여인의 손에 들려 있는 얼굴의 침묵은 파멸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을 선택한 남자의 고요가 아니라 힘의 논리에 취해 오만하기만 했던 남자의 파멸입니다. 언제나 강하기만 한 것은 위험합니다. 관계를 맺을 줄 모르니까요.
티치아노,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디트’(1515년께, 캔버스에 유채, 89.5×73㎝,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로마)
유디트는 과부의 옷을 벗고 성장을 합니다. 홀로페르네스를 찾아가서 유혹합니다. 그래서 그녀를 아름다움을 팔아서 나라를 구한 팜므파탈이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녀가 팜므파탈이라면 남자들이 버리고자 했던 공동체를 지키고자 했던 그녀의 팜므파탈적 에너지는 차라리 신성 아니겠습니까?
‘나’의 삶터를 공격해오는 홀로페르네스는 어쩌면 내가 무서워 피해왔던 진실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두려워 떨면서 외면했던 진실들이 있지요? 갈등이 두려워 양보만 하면 내 삶을, 내 가치를, 내 공동체를 지킬 수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의 실체를 분명히 보고 칼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속의 유디트가 생명의 불꽃을 피워낼 것입니다.
아,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문득문득 싸워야 하는 이유를. 그것은 마음을 열고 살기 위해서, 사랑하며 살기 위해서이지 싸움꾼 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싸우는 자가 있지요? 늘 마음밭이 전쟁터이므로 그는 그저 황폐해질 수밖에 없고, 그 각박함으로 인해 늘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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