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강풀 만화가 원작인 <그대를 사랑합니다>란 영화를 보셨나요. 새벽 우유배달을 하는 노인 김만석(이순재)과 파지를 모으며 근근이 생활하는 송씨(윤소정)의 사랑 이야기지요. 이 영화에는 치매에 걸린 아내 순이(김수미)를 애틋하게 돌보며 살다가 아내가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아내와 동반 자살하는 동네 주차 관리인 장군봉(송재호)의 치명적인 사랑도 함께 등장합니다. 손녀의 귀띔으로 송씨의 생일을 알게 된 만석 노인이 케이크를 사 들고 가서는 어눌한 목소리로 “그대를 사랑합니다”고 말하는 데에서 저도 그만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습니다.
과거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다룬 책이 그리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아니, 한 권 있긴 하네요. IMF 사태 직후인 1998년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미치 앨봄)입니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30대의 방송작가가 루게릭병으로 투병 중인 스승을 매주 화요일 찾아가 자기 연민, 후회, 죽음, 나이 드는 두려움 등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14가지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입니다. 이 책은 ‘카드대란’이 벌어진 2003년에도 다시 인기를 끕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책이 얼마나 안 팔렸으면 이 책에는 죽음에 대한 어두운 이미지를 불식시키려고 산뜻한 이미지로 포장한 흔적이 확연합니다.
하지만 한때 활개를 치던 ‘성공 신화’가 무너지고 글로벌 금융위기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던 2007년부터는 ‘죽음’과 ‘늙음’을 다룬 책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2007년에는 <인생수업>이 있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호스피스 운동을 의료계에 불러일으킨 죽음을 연구해온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주도해 쓴 이 책은 ‘죽음의 강’에 내몰린 사람 101명이 들려주는 삶에 대한 위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2008년에는 췌장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던 공대 교수 랜디 포시가 들려준 <마지막 강의>가 있습니다. 그는 1, 2, 5세인 어린 자식들에게 “우리 앞에 벽이 존재하는 건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시험하려는 것”이라는 눈물의 ‘유언’을 해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2009년에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있습니다. 170만부나 팔린 이 소설에서 늘 곁에서 보살펴주고 무한정한 사랑을 주기만 하던 ‘늙은’ 엄마는 아들의 생일잔치 때문에 상경했다가 지하철에서 실종되고 맙니다. 가족이 엄마를 찾아나서는 과정이 큰딸, 큰아들, 남편과 엄마 자신, 다시 큰딸의 시점에서 그려지는 이 소설에서 엄마는 사라짐(실종이지만 사실상 죽음입니다)으로써 역설적으로 가족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이 소설에서 가족은 따뜻한 느낌을 안겨주는 그리움의 상징이 아닙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홀로 서야 하는 절대 고독의 개인이 그려지고 있지요.
2010년에는 아예 ‘죽음’을 간판에 내걸었습니다.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입니다. 영화 <버킷리스트>에서 자동차 정비사 카터(모건 프리먼)와 재벌 사업가 에드워드(잭 니컬슨)가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서 살아있는 동안 꼭 해보고 싶은 10가지를 실천해보는 것을 연상시키는 책이지요. 1000명의 죽음을 지켜본 호스피스 전문의 오츠 슈이치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회한 25가지를 들려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더라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조금만 더 겸손했더라면” 등은 단순하고 평범하지만 후회 없는 삶과 죽음을 위해서 누구나 되새겨볼 만한 키워드들입니다.
2010년에는 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도 있습니다. 투병 중이던 스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순간이어야 한다”는 ‘법문’을 남겨놓고 이 세상을 떠나셨지요. 그래서 출판시장에서는 한때 ‘법정 태풍’이 불었습니다. 가난과 무소유를 강조한 법정의 가르침은 세상이 힘겨울 때마다 등장해 대중을 위로해주었지요. 2010년에는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와 <김대중 자서전>, <리영희 평전> 등이 출간되어 한해 내내 추모 분위기가 작동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성공 우화’가 상종가를 치고 있을 때 장기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에서는 70대 이상의 노인들이 들려주는 ‘늙음’과 ‘죽음’을 다룬 우화들이 크게 인기를 끌었지요. 이제 우리 사회도 일본의 모습을 그대로 뒤따라가고 있습니다. ‘죽음’이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바람직한 ‘삶’을 노래하는 것이지만 성공을 꿈꾸던 활력에 비견될 바는 아니지요.
실제적인 정년이 43세까지 낮춰지고 30대 초반이면 인생 땡이라는 ‘삼초땡’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는 세상입니다. 꿈을 잃은 청소년들이 죽음을 떠올리는 세상이다 보니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 1위를 달리는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늙지 않는 한 노인이 계십니다. 부자감세, 규제완화, 민영화, 노동유연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일관하는 바람에 빈부격차가 갈수록 심해지는 데다 전세대란, 고물가, 구제역 파동까지 겹쳐 서민들 거의 모두가 죽음의 유령을 헤매고 있음에도 “대통령 해먹기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는 이명박 대통령 말입니다. 그분은 관객의 마음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그야말로 ‘1인극’을 벌이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의 독선을 막연하게 지켜보기만 해야 하나요? 그래서인지 혹독한 추위 끝에 맞이한 따뜻한 봄도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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