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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의 사회학

[도시·사회·시민 이야기](16)정경유착이 서울을 ‘아파트 도시화’

테오도르 폴 김 theodorepaul@naver.com

도시의 예술성을 정의하는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은 스키마(Schema)와 악티알리자시옹(Artialisation)이다.

스키마는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된 ‘틀, 기초’라는 뜻으로 인간의 감각적 지각을 이론과 사상으로 연계한 것이다. 악티알리자시옹은 예술화하는 과정을 뜻한다. 칸트는 스키마를 직관과 감성의 ‘현상’과 철학의 ‘범주’를 중재하는 매개 개념으로 인식했다. 보이는 자연은 아름답지만 자연을 (자연그대로) 표현한 예술도 아름답다고 말했는데, 자연을 직관에 따라 다르게 표현할 수 있어도 자연의 본질을 왜곡하지 않아야 함을 뜻한다.

카시러(Cassirer)는 시골 농부를 예로 악티알리자시옹을 설명한다. 농부가 밭에서 일을 하다 자연 풍경이 아름다워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농부는 그림을 그릴수록 그간 무심코 바라봤던 자연에서 심오한 신비로움을 발견한다. 농사 짓는 땅으로만 인식했던 자연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의 세계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이것이 악티알리자시옹이다. 예술적 사고로의 변화는 인간 개인의 관념·욕망에서 벗어나 본질을 직관하려 노력할 때 스스로 일어난다.

여자의 아름다움을 외모가 아니라 전체적·객관적 지성과 마음으로 판단한다면, 성형수술·화장을 안 해도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다. 예술적 사고는 자연을 부동산으로만 보는 정치권력자·재벌기업의 망상으로부터 도시와 자연을 보호해 인간에게 예술적 삶을 베푼다. 도시는 현 시대의 유행·상징·건설경기촉진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파리의 오페라 극장은 바로크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공간이자 시민들의 공공장소다. 이 장소의 예술적 가치는 건물의 화려한 양식과 지역과의 조화뿐만아니라 이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인간의 품격 있는 삶에서도 드러난다.


사회학 관점에서 도시의 예술성은 장소의 공공성·사회성에서 탄생한다. 그 장소에서 살아가는 시민의 삶에서 예술적 가치가 형성되는데, 인류의 평등·평화·박애·자유가 지켜지는 인간사회의 실현이 바로 도시의 예술이다. 그래서 도시는 성스러운 가톨릭 미사나 전통의례처럼 질서·예의를 갖춘 공동의식의 사회가 형성됐을 때 아름답다. 공공 장소가 없는 도시는 그림 한 점 없는 미술관처럼 존재 이유를 잃는다. 부르디외는 도시의 예술 가치를 만들어진 형태의 결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실제 인간이 살았던 삶의 내용과 질로 평가했다. 그는 칸트의 예술을 판단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능력, 게쉬마크(맛·취향)에 따라 사회의 계급과 발전이 구별됨을 강조했다. 예술에 대한 사회의 전반적 인식은 사회체제를 형성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간주돼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한다.

서울 시민이 강남 고층아파트를 최고의 주거지역으로 선호했기에 서울은 ‘도시’가 아닌 ‘아파트 수용소’가 돼버린 것과 같다. 왜 한국에서는 도시의 삶에 대한 사람들의 취향이 아파트 수용소의 삶으로 와전되었는가? 예술에 대한 한국인만의 민족 성향이 아니라 자본·권력이 유착한 불균형의 사회체제로 인한 후천성 관례가 원인이다. 소시알리자시옹(사회화)과 아비투스(Habitus)에서 문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사회화는 사회공동체의 공동생활이며, 아비투스는 인간의 모든 행동·정신상태·품위 등을 말한다. 즉 공동의식·공동책임의 사회체제가 확립돼야 사람들이 올바르고 정상적으로 사고·판단하는 사회가 된다. 사회공동체는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문법과 같다. 언어의 문법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말이 아름답거나 거칠고 상스럽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아비투스다.

우리가 도시를 ‘예술적 삶의 장소’가 아닌 ‘아파트 분양의 장소’로 보았기에 문화·자연·인간의 존엄성이 마구 짓밟혔다. 일제 압제와 한국전쟁에서도 살아남은 문화의 흔적과 자연환경이 경제성장을 외치는 무지의 관료들에 의해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아직도 구 시대 정경유착의 방종을 정치권력으로 착각하는 세력들이 국토를 망치고 있다. 올바른 사고를 가진 정치체제가 아름다운 사회와 도시를 만든다는 사실을 이제 자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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