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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영성의 뿌리, 유럽 수도원을 가다](상) 기도와 노동, 베네딕도회 수도원

뮌헨 | 조운찬 선임기자 sidol@kyunghyang.com

ㆍ수도사가 소·돼지 치고 바느질하는 자급자족 공동체

‘가지 않는 길’을 묵묵히 걷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을 비워냈다. 가난은 일상이 되었다. 말 많은 세상에는 침묵으로 응대했다. 남들이 분노, 원망, 괴로움을 얘기할 때 그들은 희망과 평화를 갈구했다. 묵상과 기도, 노동. 삶은 단순했지만, 울림은 컸다. 수도승들의 영혼은 1500년 유럽 역사와 문화를 지켜낸 버팀목이 되었다. 그들의 삶터인 수도원은 마르지 않는 ‘영성의 샘’이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가 주관한 ‘가톨릭 영성 순례’(11월14~24일)를 따라가며 유럽 수도원의 심처로 들어간다.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 수도사들이 지난 15일 성당에서 열린 저녁기도에서 성경 구절을 낭송하고 있다.

독일 바이에른주 뮌헨시의 신청사에는 85m 높이의 첨탑이 솟아 있다. 첨탑의 꼭대기를 차지한 주인공은 수도승이다. 인구 130만의 뮌헨시가 굽어보이는 시청사의 첨탑에 수도원의 수도승을 모셔놓은 이유는 뮌헨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알 수 있다. 뮌헨은 10세기께 가톨릭 수도사들이 몰려들면서 공동체 마을을 형성했다. 이후 마을은 도시 형태를 갖추어갔고, 뒷날 바이에른주의 최대 도시가 되었다. 첨탑의 수도승 상은 뮌헨 발전사의 산증인이다. 뮌헨은 ‘문니히’(Munich)라고도 불리는데, 문니히는 바로 수도승(Monk)을 의미한다.

1000년 수도원 문화를 전승·보존하고 있는 뮌헨과 바이에른주에는 아직도 20~30여곳의 수도원이 흩어져 있다. 대부분은 베네딕도회 소속이다. 뮌헨시 서쪽 50㎞ 떨어진 상트 오틸리엔이라는 농촌마을에 자리한 오틸리엔 수도회도 그 가운데 하나다.

베네딕도 수도회를 이해하려면 베네딕토 성인을 알아야 한다. 그는 베네딕도 수도회의 창설자일 뿐 아니라 수도생활의 아버지다. 그를 거치지 않고는 유럽의 수도회를 말할 수 없다.

성 베네딕토(480~547)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방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로마로 유학했으나 그를 억누른 것은 퇴폐스럽고 황량한 시대 분위기였다. 당시 동콥트족, 랑고바르드족 등 이민족의 대대적인 이동이 있었다. 로마는 이민족들로부터 집중적으로 약탈을 당했고, 선진문화를 간직한 로마인들의 혼란은 심화됐다. 베네딕토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은 멀어져 갔다. 그가 선택한 길은 은수자(隱修者·은둔해 수도하는 사람)의 삶이었다.

베네딕토가 은수자의 첫발을 디딘 곳은 이탈리아 수비아코였다. 그는 수비아코의 동굴에서 3년 동안 생활했다. 그는 혼자서 수행자의 길을 걷는 ‘독수자’를 꿈꾸었다. 그러나 수도자로서의 명성이 알려지자 수비아코 근처의 수도자들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는 수비아코 비코바로 수도원의 원장으로 추대됐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수도사들은 베네딕토가 정한 엄격한 수도원의 규칙을 견뎌내지 못했다. 일부 수도사는 베네딕토를 독살하려고까지 했다.

베네딕토는 몬테카시노로 피신했다. 그곳에 수도원을 창설하자 많은 제자가 몰려들었다. 베네딕토는 수도자들을 단일의 공동체로 조직했다. 떠돌아다니며 하는 수도가 아니라 한 곳에 머물러 ‘일하고 기도하는’ 정주(定住)수도회가 시작됐다. 베네딕토는 수도원 생활의 규율을 잡기 위해 ‘규칙서’를 만들었다. 그는 규칙서에서 ‘수도승(monacus)’은 ‘하느님을 찾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수도원은 ‘하느님 섬기기를 배우는 학원’으로 칭했다. 또 수도 생활의 기본적인 덕을 순명(수도원의 규칙에 따름)과 침묵, 겸손으로 제시했다.

베네딕도 수도회의 삶은 ‘기도하며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베네딕도 수도사들은 노동으로 공동체를 꾸려가고 기도로 하느님과 만난다.

지난 15일 찾아간 독일의 오틸리엔 수도원도 1500여년 전 베네딕토가 제시한 수도회의 규칙과 이상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수도원에는 성당, 피정의 집, 수도승 숙소 등 종교시설뿐 아니라 밭, 축사·돈사, 출판사, 김나지움(중·고등학교)의 교사·체육관 등이 갖춰져 있다. 100여명의 수도승은 각자 맡은 소임에 따라 노동하며 성당에 모여 미사를 올리고 기도를 드린다.

동방의 순례객들을 맞이한 치릴 수도사는 이 수도원의 출판사 대표다. 이탈리아어영어에 능통한 그는 출판·번역 일에 제격이다. 대학에서 프랑스어와 역사를 전공한 블로머 마우루스 수도사는 김나지움에서 프랑스어와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일할 능력이 있는 한 수도사는 누구나 노동을 해야 한다. 마우루스 수도사는 “이곳 수도사들은 소와 돼지를 치고 감자를 재배하는 것은 물론 바느질, 목공도 직접 한다”며 “의식주를 자체 해결하는 자급자족의 공동체가 수도원의 이상이자 목표”라고 말했다.

베네딕도 수도사들에게 노동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 생활이다. 수도사들에게 하느님과 만나는 기도는 일과의 중심이다. 노동은 경제활동보다는 기도생활을 도와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오틸리엔 수도원에서는 아침기도, 낮기도, 저녁기도, 끝기도 등 4차례의 공식 기도 시간이 있다. 여기에 독서기도(말씀기도), 개인적인 묵상기도까지 합하면 하루 기도는 4~5시간이나 된다.

이날 수도원 성당에서 이뤄진 저녁기도는 중세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오후 6시 수도복을 입은 수도사 40여명이 줄지어 입장한 뒤 제단 좌우의 수사석에 자리한다. 이어 가톨릭 전례음악인 그레고리안 성가의 음률에 맞춰 수도사들이 ‘요한의 첫째 서한’을 봉송한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수도사들이 성경을 한 구절 한 구절 봉송하자 신자석에 앉은 참배객들이 뒤따라 낭송한다. 기도소리가 성당의 높은 천장으로 퍼져나갈 때 성당은 경건함으로 가득 채워진다. 이어 시편 독서, 신자들의 기도, 주의 기도가 계속됐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계속된 기도는 30분 만에 끝났다. 수도원의 기도의식은 시간을 중세로 되돌려 놓은 듯했다. 마우루스 수도사는 “베네딕도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공식 일과표에 들어있는) ‘시간 기도’”라며 “일에 바쁘거나 노동량이 많다고 기도 시간을 줄이는 법은 없다”고 말했다.

베네딕토 성인이 기도와 노동을 베네딕도회의 슬로건으로 표방한 이후 기도와 노동의 일치, 조화는 수도원의 중요한 가르침이 되었다. 현재 유럽 수도원 수도사들의 70~80%는 베네딕도회 소속이거나 베네딕도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베네딕도회 소속 수도원이라고 해도 창설 취지나 시대적 배경에 따라 수도원의 성격이 조금씩 다르다. 뮌헨 오틸리엔 수도원은 ‘노동과 기도’라는 베네딕도회의 소명을 따르면서 선교에 활동의 주안점을 두고 있다. 오틸리엔 수도원은 1884년 당시 가톨릭의 선교 요청에 부응해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라는 기치를 내걸고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에 의해 창설됐다.

오틸리엔은 창설 직후 탄자니아 등 동아프리카와 한국 등에 수도사를 파송해 수도원 건립 등 선교활동을 담당해왔다. 한국에는 1909년 2월 당시 조선교구 뮈텔 주교의 요청으로 수도사 2명을 파견했다. 당시 파송된 수도사들은 한국의 첫 남자 수도회인 베네딕도 수도회를 창설했다. 한국 베네딕도회는 현재 경북 왜관에 수도원 본부가 있으며 경기 남양주 등에 분원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 베네딕도회 소속 수도사는 9000여명으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오틸리엔연합회 소속 수도사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19개국에서 100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