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평론가 김형수 = 지난번에는 한반도적 자아가 태동하는 과정을 술회하셨습니다.
고은 = 논리 정연한 외가닥 길은 삼거리나 오거리를 만나 어느 길로 들어설까 머뭇거리지. 귀뚜라미가 이따금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는 듯이 촉각을 곧추세우고 울음소리를 그치잫아. 좀 시야를 넓혀본다 해도 우리가 자신의 과거를 돌아다본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그 과거를 산 사람들이 새삼 현재로 재생해서 그들의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을 대신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 과거 이후의 현재가 처음으로 과거를 내 것으로 삼아보는 행위이지. 나는 고대인도 근세인도 아니니 말이네.
김형수 = 고대인도 근세인도 아니라는 말씀은 선생님의 당대를 환기시키는 말씀인데, 맥락이 실뿌리처럼 많은 곳에 닿고 있어서 존재의 뒤쪽을 말씀하시는지 앞쪽을 말씀하시는지 잠시 가닥을 놓쳤습니다.
김형수 = 대지의 유구함에 비추어 인간의 삶은 얼마나 유한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짧은 동안에 겪게 되는 적막과 소란, 두려움과 위안, 출생과 이별의 기억들을 단일한 언어로 산맥처럼 길게 쌓아둘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큰 축복이 아닌가 합니다.
고은 = 우리 향가나 고려가요는 국문학 해독 없이는 외국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지. 그것뿐이 아니야. 역대 왕조의 역성(易姓)은 왕조만 바뀌었어.
김형수 = 대륙도 없고 대양도 없이 해변에서 시달리는 나룻배 한 척처럼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고은 = 설사 몽골족과 만주·여진족이 지배하더라도 끝내 그것들을 중국화해 버리지. 오늘날의 중국이 중국 사상 가장 강대한 소수민족 지역을 다 삼켜버린 영토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것은 여진족 청이 확장해 놓은 터전이야. 이제야말로 중국은 ‘천하’이지.
김형수 = 정착문명에 대한 문제제기의 절정이라 할 칭기즈칸은 언젠가 북경을 굽어보면서 쓸모없는 축조물을 쓸어버리고 초원의 상태로 되돌리고 싶어 했습니다. 후손들에게도 벽돌 냄새가 나는 곳에 안주하는 날 제국이 망할 것이라 유훈을 남기지만 그런 정신이 손자대를 벗어나지 못했어요. 쿠빌라이는 원나라 중국의 황제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중원을 이렇게 끝없이 중화로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요? 한반도는 그것이 끌어당기는 자력을 내내 벗어나지 못한 겁니까?
고은 = 이런 중국에의 사대적 생존기술로 그들의 대륙문화를 체화함으로써 자신의 문화를 일구어온 우리는 그만큼 오랜 기간의 동행 못지않게 현대사의 시련도 동반한 셈이지. 일본의 탈아입구(脫亞入歐)주의가 동아시아를 철저히 짓밟는 야만으로 만주사변 중일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과 중국은 상호 연민을 다졌지.
김형수 = 좀 벗어나는 이야기입니다만, 가끔 축구 경기를 보면서 저는 한·중·일 세 나라가 아시아에 대해서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지는 것을 느낍니다. 중국은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어서 변두리 의식이 없고, 일본은 유럽에서 떠내려온 섬처럼 탈아시아를 지향해도, 한국은 2002년 월드컵 때 보여주었듯이 ‘프라이드 오브 아시아’를 외칩니다. 큰 눈으로 볼 때 이런 건 작은 차이에 불과할까요?
고은 = 아마도 우리네 역대 체제는 고대 중국 율령이나 제도를 수행한 이래 우리의 자아가 중국과 무관할 수 없었어. 고려 초의 김부식이 송나라 소식의 식(軾)자를 자신의 이름자로 삼아 개명한 것이나 아우의 이름조차도 소식의 아우 소철의 이름 그대로 철자를 빌려서 부철로 바꿔 줬어. 이런 사례로 당송에 그대로 익숙해지는 것이 해동의 시가였어. 허균이 자기 스승으로부터 당률(唐律)에 충실하다는 격찬에 오히려 반발해서, 저는 이백 두보를 흉내 내지 않고 허균 저 자신의 시를 쓰고 있다고 호언장담한 것이나 조선 후기 실학 문화에서 조선의 시를 지향하기 시작함으로서 다산이 노래한 바, ‘나는 조선인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시를 쓰리라’고 새삼 강조한 것도 중국으로부터의 자아이탈이라 할 수 있지. 사실 한말 의병의 원칙은 화이론(華夷論)의 사대주의적 자기표현이기도 했어.
김형수 = 겸재나 단원 혹은 한석봉 같은 이름들도 그렇게 볼 수 있을까요? 조선후기를 ‘진경시대’라 표현하는 글도 있지만, 조선성리학을 거점으로 ‘소중화 의식’이 싹트는 것을 평할 만한 수준이 못 되어서요. 역사라는 것이 참 괴물 같습니다.
고은 = 나는 역사란 삶의 행성에서는 군더더기 개념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고대 농경사회의 자연부락에서 비 올 때 비 오고 바람 불 때 바람 불어 풍년의 격양가가 들리면 누가 왕이든 말든 알 바 없는 그 비정치적 평화에는 역사가 끼어들 필요가 없이 기껏해야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과거의 기억에 애틋할 정도이겠지. 그러나 그런 삶이 난관에 부딪힐 때, 이를테면 전쟁이 나거나 어떤 시련이 올 때의 위기의식이 바로 역사의식이 되는 것이라 여겨. 다시 말하면 위기야말로 역사의 탄생이야.
김형수 = 위기의식이 역사의식이라는 말씀이 화살처럼 박힙니다. 되짚어보고 싶은 것은 ‘비정치적 평화’라는 표현인데, 가령 유목민은 목초지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초원에 넓게 흩어져서 이웃을 지평선 바깥에다 두고 사는 게 이상이지만, 그렇게 되면 고립의 위험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여 살다 보면 이번에는 큰 나무의 그늘에서 작은 나무들이 햇볕을 쬐지 못하는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나서, 사람이 그늘 때문에 죽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상의 삶이 전투가 되는 걸 피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정치는 없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배면에 숨어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정치적 전망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을 잃지 않는 조건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고은 = 갑자기 이제까지의 긴 사대체제에 길들여진 삶의 역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역사가 시작되고 그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할 주체로서의 ‘나’를 발견하게 되면서 한말을 전후해서 조선 후기 사회 변동과 외세의 개입에 의한 자아의 역사화가 가능했던 것이지. 근대라는 시대개념이 전근대의 어느 시기부터 스스로 터득한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근대라는 타자에 의한 위기에 맞서 근대의 자아가 깨어나는 데서 자신의 몫이 될 수 있었어. 비로소 풍운 가득한 동서남북을 돌아다보는 동안 자아란 이미 자아의 조건이 교차되거나 유전된 복합적인 악조건 위에서 눈을 떴지. 그래서 식민지 시기의 그 줄기찬 저항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지.
김형수 = 근대적 가치관이 만들어낸 영혼들이 떠오릅니다. 총칼에 짓밟힌 폐허의 대륙에서도 노신은 허광평의 사랑을 살고, 주작인은 군화짝 춤추는 뒷골목을 살고, 반면에 영광과 찬가가 넘치는 일본에서 다자이 오사무는 강에 뛰어들고, 미시마 유키오는 할복하고….
고은 = 세계사의 진행을 통해서 근대가 자아의 시대라면 우리 역시 자아의 시대를 살아야 함에도 살아야 할 자아가 없을 때 자아만치 절대적인 것이 될 것은 없지. 그래서 20세기 이래의 자아란 정치적으로는 잃어버린 ‘독립’이었지. 1945년 중국의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임시정부 지도자 김구가 절절이 표명한 바, ‘나의 소원은 첫째도 독립이요, 둘째도 독립이요, 셋째도 독립이요’ 운운한 육성도 그런 자아의 홀로서기를 말하지. 사실인 즉,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사회에서의 자아 개념은 독재나 외세 모순과의 싸움이라는 민주화나 자주화의 정치·경제적 주체의식의 바탕이기도 하지.
김형수 = 어떤 시대는 흘러가면서 돌에 새긴 듯한 흔적을 남기고, 어떤 시대는 뜬 구름이 흘러가듯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속에서 형성된 불완전한 상식의 세계를 흔들며 지나가고자 하신 거지요?
고은 = 근대가 서구 중세 이래의 신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를 뜻하는 것과는 좀 다르게, 우리에게는 인간 하나하나의 개체가 자아라는 깨달음을 갖게 되는 일이기도 하고, 또한 전근대적인 봉건성으로부터 근대 산업화 시대의 시민적 복지에 닿아있는 일이기도 했어. 그러므로 자아개념 역시 전기에는 주체화를 지향하고 후기에는 현대화로 기울었지. 특히 남한에서의 근대화는 서구의 근대화 또는 일본의 근대화를 압축하는 숨 가쁜 질주였어. 대륙에서의 적극적 독립운동에 기초한 자아의식은 점차 해양세력의 산업전선의 자립의식이 되었어. 여기서 내적 개발독재와 외적 개방교역의 시대가 21세기 세계화로 나아가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지.
김형수 = 내적 개발독재와 외적 개방교역의 시대가 세계화로 나아간다는 말씀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말씀처럼 또 다른 격동을 예고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고은 = 20세기 세계사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얄타체제, 즉 동서냉전 체제가 영구적으로 이어지고 그것 자체로 양자 대결의 안정기가 보장되다시피 했어. 물론 두 체제라고 해도 서방자본주의세력의 우위에 대한 사회주의체제의 도발적 지속들이었고, 진보적 이론 제공자의 진영 노릇을 해왔지. 대중에게는 007영화에서의 적화(赤化) 음모로 그려지는 한편 서구 지식인 계층은 좌파 이데올로기를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현상도 있었지. 아무튼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냉전은 20세기 전반기의 엄청난 인명희생 같은 비극은 주춤한 상태였어. 그래서 평화공존이란 둘 사이의 적대적 상호의존관계도 생겨나고 전술핵 군축도 일구어 냈지.
김형수 = 저도 어디에선가 20세기의 상징물로 007영화를 든 적이 있습니다만, 어느 날 갑자기 저의 인식론이 체제적·패권적 사고의 근거로 작동하는 것들과 어떻게 다른지, 혹시 국가주의적이지 않은지 고민하다 보니 자꾸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령, 겨울 새벽의 눈길을 헤치고 가는 늑대를 가난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요.
고은 = 그런 안정으로서의 긴장 속에서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지. 고르바초프의 운명과 함께하는 동부 소련의 해체라는 역사적 격변이 지구 전체를 놀라게 했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독일 유학생으로부터 나에게 우송되어 온 벽돌 조각을 받고 나 자신도 한반도 통일 감정 때문에 울음을 터뜨렸으니까.
김형수 = 아, 한 세기가 부서지면서 남긴 벽돌조각이었네요. 선생님의 체험담에는 언제나 알에 갇힌 상상력을 쪼아주는 것 같은 경이로움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선생님께서 공동체 전체의 문제를 가치관의 중심축에 놓고 계시는 점을 큰 귀감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도 ‘겨레말큰사전’을 하고 계시잖습니까.
고은 = 그런 20세기 종결로서의 현실 사회주의 체제 소멸로 21세기를 맞이하게 되었지. 이는 20세기 후반에야 인류 역사의 크기에 대한 시간표인 세기 감각이 자신의 것으로 되었던 것으로부터 현대사의 정회원이 되는 것을 뜻하는 바라, 타자의 역사 공간이던 지난 세기의 민족적 결핍을 떨치고 나 자신이 세계의 주인공으로 나선다는 긍지도 얼마든지 허용되었지. 거의 반동적으로 21세기를 맞을 때 우리는 세계 어느 지역 못지않게 떠들썩한 잔치를 연출했지. 새 밀레니엄에 새해맞이는 일종의 겹경사이기도 했어.
김형수 = 실제로 남다른 감회를 가지실 일이 있으셨네요.
고은 = 나는 그 광화문 새천년맞이 새해맞이 축제로서의 21세기 영접의 현장에는 없었어. 마침 미국 하버드 체류기간을 마치고 돌아올 때 공교롭게도 태평양 상공 대신 대서양 상공을 건너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신전의 21세기 영시(零時) 축하에 가 있었지. 이 고대문명의 발상지 그리스의 밀레니엄 축제에 질세라 이집트의 장기집권자였던 무바라크도 거의 마누라를 내세워 피라미드 밀레니엄 대축제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어.
김형수 = 이제 현실 문명의 지평을 바라볼 만한 자리에 이른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은 = 아무튼 식민지시대의 한 궁벽 농가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자신의 영혼을 상실한 일본 왕의 연호 밑에서 목숨을 잇던 어린이가 고단한 세월을 감당한 기성세대로서 21세기라는 한 대시간의 첫머리를 누리는 감회는 깊고 깊었어. 그래서 나에게는 부재로서의 세기와 실재로서의 세기라는 양세기에 걸친 중층 시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
김형수 = 대안을 추구하는 시대가 아니라 낡은 대안의 한계가 모두 확인된 시대에 들어서신 거예요. 후배들은 오히려 중심의 주변성, 또 주변의 중심성 같은 것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고은 = 20세기가 상처투성이의 연대기로서 지나간다 해서 그 자리가 바로 물청소를 한 복도처럼 깨끗한 것은 아니겠지. 아직도 20세기의 잔재로서 많은 모순의 지속적 원인을 하나의 숙주처럼 담고 있는 것이 오늘이기도 해. 20세기를 누구의 결연한 지적 그대로 ‘야만의 시대’라고 단정하는 역사인식은 결코 험악한 표현이 아니었어. 그만큼 그 세기 안에 뿌리박힌 두 번의 세계대전이나 그 부산물로서의 여러 지역분쟁의 비극 역시 엄청난 문명 진행과 함께 인류의 절망이 희망보다 더 강하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게 해.
김형수 = 20세기를 물청소한 복도에 비유하시다니! 오늘도 참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유목민은 계절을 셋으로 나누어 부릅니다. 어린 가을, 젊은 가을, 늙은 가을. 젊은 가을에는 바람이 길을 잃습니다. 건강 잘 챙기세요.
고은 = 논리 정연한 외가닥 길은 삼거리나 오거리를 만나 어느 길로 들어설까 머뭇거리지. 귀뚜라미가 이따금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는 듯이 촉각을 곧추세우고 울음소리를 그치잫아. 좀 시야를 넓혀본다 해도 우리가 자신의 과거를 돌아다본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그 과거를 산 사람들이 새삼 현재로 재생해서 그들의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을 대신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 과거 이후의 현재가 처음으로 과거를 내 것으로 삼아보는 행위이지. 나는 고대인도 근세인도 아니니 말이네.
김형수 = 고대인도 근세인도 아니라는 말씀은 선생님의 당대를 환기시키는 말씀인데, 맥락이 실뿌리처럼 많은 곳에 닿고 있어서 존재의 뒤쪽을 말씀하시는지 앞쪽을 말씀하시는지 잠시 가닥을 놓쳤습니다.
고은 = 우리는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고자 할 때 과거를 확인하고 나서 미래를 상정하게 된다네. 가령 몇 천 년의 문화를 일관해온 중국 대륙을 들여다보세. 세계의 어느 문명과도 달리 그 계승의 일관성이 있어. 우선 고대문자가 현대문자 그대로 살아 있어. 근대의 백화문이나 현대 중국의 간자가 커다란 간극을 만들어 놓았다 해도 그것은 이백의 절구와 백거이의 대중 시가가 오늘에도 현대의 시가로 살아있는 거지 단절이 아니라네.
김형수 = 대지의 유구함에 비추어 인간의 삶은 얼마나 유한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짧은 동안에 겪게 되는 적막과 소란, 두려움과 위안, 출생과 이별의 기억들을 단일한 언어로 산맥처럼 길게 쌓아둘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큰 축복이 아닌가 합니다.
고은 = 우리 향가나 고려가요는 국문학 해독 없이는 외국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지. 그것뿐이 아니야. 역대 왕조의 역성(易姓)은 왕조만 바뀌었어.
김형수 = 대륙도 없고 대양도 없이 해변에서 시달리는 나룻배 한 척처럼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고은 = 설사 몽골족과 만주·여진족이 지배하더라도 끝내 그것들을 중국화해 버리지. 오늘날의 중국이 중국 사상 가장 강대한 소수민족 지역을 다 삼켜버린 영토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것은 여진족 청이 확장해 놓은 터전이야. 이제야말로 중국은 ‘천하’이지.
김형수 = 정착문명에 대한 문제제기의 절정이라 할 칭기즈칸은 언젠가 북경을 굽어보면서 쓸모없는 축조물을 쓸어버리고 초원의 상태로 되돌리고 싶어 했습니다. 후손들에게도 벽돌 냄새가 나는 곳에 안주하는 날 제국이 망할 것이라 유훈을 남기지만 그런 정신이 손자대를 벗어나지 못했어요. 쿠빌라이는 원나라 중국의 황제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중원을 이렇게 끝없이 중화로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요? 한반도는 그것이 끌어당기는 자력을 내내 벗어나지 못한 겁니까?
고은 = 이런 중국에의 사대적 생존기술로 그들의 대륙문화를 체화함으로써 자신의 문화를 일구어온 우리는 그만큼 오랜 기간의 동행 못지않게 현대사의 시련도 동반한 셈이지. 일본의 탈아입구(脫亞入歐)주의가 동아시아를 철저히 짓밟는 야만으로 만주사변 중일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과 중국은 상호 연민을 다졌지.
김형수 = 좀 벗어나는 이야기입니다만, 가끔 축구 경기를 보면서 저는 한·중·일 세 나라가 아시아에 대해서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지는 것을 느낍니다. 중국은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어서 변두리 의식이 없고, 일본은 유럽에서 떠내려온 섬처럼 탈아시아를 지향해도, 한국은 2002년 월드컵 때 보여주었듯이 ‘프라이드 오브 아시아’를 외칩니다. 큰 눈으로 볼 때 이런 건 작은 차이에 불과할까요?
고은 = 아마도 우리네 역대 체제는 고대 중국 율령이나 제도를 수행한 이래 우리의 자아가 중국과 무관할 수 없었어. 고려 초의 김부식이 송나라 소식의 식(軾)자를 자신의 이름자로 삼아 개명한 것이나 아우의 이름조차도 소식의 아우 소철의 이름 그대로 철자를 빌려서 부철로 바꿔 줬어. 이런 사례로 당송에 그대로 익숙해지는 것이 해동의 시가였어. 허균이 자기 스승으로부터 당률(唐律)에 충실하다는 격찬에 오히려 반발해서, 저는 이백 두보를 흉내 내지 않고 허균 저 자신의 시를 쓰고 있다고 호언장담한 것이나 조선 후기 실학 문화에서 조선의 시를 지향하기 시작함으로서 다산이 노래한 바, ‘나는 조선인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시를 쓰리라’고 새삼 강조한 것도 중국으로부터의 자아이탈이라 할 수 있지. 사실 한말 의병의 원칙은 화이론(華夷論)의 사대주의적 자기표현이기도 했어.
김형수 = 겸재나 단원 혹은 한석봉 같은 이름들도 그렇게 볼 수 있을까요? 조선후기를 ‘진경시대’라 표현하는 글도 있지만, 조선성리학을 거점으로 ‘소중화 의식’이 싹트는 것을 평할 만한 수준이 못 되어서요. 역사라는 것이 참 괴물 같습니다.
고은 = 나는 역사란 삶의 행성에서는 군더더기 개념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고대 농경사회의 자연부락에서 비 올 때 비 오고 바람 불 때 바람 불어 풍년의 격양가가 들리면 누가 왕이든 말든 알 바 없는 그 비정치적 평화에는 역사가 끼어들 필요가 없이 기껏해야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과거의 기억에 애틋할 정도이겠지. 그러나 그런 삶이 난관에 부딪힐 때, 이를테면 전쟁이 나거나 어떤 시련이 올 때의 위기의식이 바로 역사의식이 되는 것이라 여겨. 다시 말하면 위기야말로 역사의 탄생이야.
김형수 = 위기의식이 역사의식이라는 말씀이 화살처럼 박힙니다. 되짚어보고 싶은 것은 ‘비정치적 평화’라는 표현인데, 가령 유목민은 목초지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초원에 넓게 흩어져서 이웃을 지평선 바깥에다 두고 사는 게 이상이지만, 그렇게 되면 고립의 위험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여 살다 보면 이번에는 큰 나무의 그늘에서 작은 나무들이 햇볕을 쬐지 못하는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나서, 사람이 그늘 때문에 죽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상의 삶이 전투가 되는 걸 피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정치는 없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배면에 숨어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정치적 전망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을 잃지 않는 조건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고은 = 갑자기 이제까지의 긴 사대체제에 길들여진 삶의 역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역사가 시작되고 그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할 주체로서의 ‘나’를 발견하게 되면서 한말을 전후해서 조선 후기 사회 변동과 외세의 개입에 의한 자아의 역사화가 가능했던 것이지. 근대라는 시대개념이 전근대의 어느 시기부터 스스로 터득한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근대라는 타자에 의한 위기에 맞서 근대의 자아가 깨어나는 데서 자신의 몫이 될 수 있었어. 비로소 풍운 가득한 동서남북을 돌아다보는 동안 자아란 이미 자아의 조건이 교차되거나 유전된 복합적인 악조건 위에서 눈을 떴지. 그래서 식민지 시기의 그 줄기찬 저항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지.
김형수 = 근대적 가치관이 만들어낸 영혼들이 떠오릅니다. 총칼에 짓밟힌 폐허의 대륙에서도 노신은 허광평의 사랑을 살고, 주작인은 군화짝 춤추는 뒷골목을 살고, 반면에 영광과 찬가가 넘치는 일본에서 다자이 오사무는 강에 뛰어들고, 미시마 유키오는 할복하고….
고은 = 세계사의 진행을 통해서 근대가 자아의 시대라면 우리 역시 자아의 시대를 살아야 함에도 살아야 할 자아가 없을 때 자아만치 절대적인 것이 될 것은 없지. 그래서 20세기 이래의 자아란 정치적으로는 잃어버린 ‘독립’이었지. 1945년 중국의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임시정부 지도자 김구가 절절이 표명한 바, ‘나의 소원은 첫째도 독립이요, 둘째도 독립이요, 셋째도 독립이요’ 운운한 육성도 그런 자아의 홀로서기를 말하지. 사실인 즉,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사회에서의 자아 개념은 독재나 외세 모순과의 싸움이라는 민주화나 자주화의 정치·경제적 주체의식의 바탕이기도 하지.
김형수 = 어떤 시대는 흘러가면서 돌에 새긴 듯한 흔적을 남기고, 어떤 시대는 뜬 구름이 흘러가듯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속에서 형성된 불완전한 상식의 세계를 흔들며 지나가고자 하신 거지요?
고은 = 근대가 서구 중세 이래의 신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를 뜻하는 것과는 좀 다르게, 우리에게는 인간 하나하나의 개체가 자아라는 깨달음을 갖게 되는 일이기도 하고, 또한 전근대적인 봉건성으로부터 근대 산업화 시대의 시민적 복지에 닿아있는 일이기도 했어. 그러므로 자아개념 역시 전기에는 주체화를 지향하고 후기에는 현대화로 기울었지. 특히 남한에서의 근대화는 서구의 근대화 또는 일본의 근대화를 압축하는 숨 가쁜 질주였어. 대륙에서의 적극적 독립운동에 기초한 자아의식은 점차 해양세력의 산업전선의 자립의식이 되었어. 여기서 내적 개발독재와 외적 개방교역의 시대가 21세기 세계화로 나아가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지.
김형수 = 내적 개발독재와 외적 개방교역의 시대가 세계화로 나아간다는 말씀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말씀처럼 또 다른 격동을 예고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고은 = 20세기 세계사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얄타체제, 즉 동서냉전 체제가 영구적으로 이어지고 그것 자체로 양자 대결의 안정기가 보장되다시피 했어. 물론 두 체제라고 해도 서방자본주의세력의 우위에 대한 사회주의체제의 도발적 지속들이었고, 진보적 이론 제공자의 진영 노릇을 해왔지. 대중에게는 007영화에서의 적화(赤化) 음모로 그려지는 한편 서구 지식인 계층은 좌파 이데올로기를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현상도 있었지. 아무튼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냉전은 20세기 전반기의 엄청난 인명희생 같은 비극은 주춤한 상태였어. 그래서 평화공존이란 둘 사이의 적대적 상호의존관계도 생겨나고 전술핵 군축도 일구어 냈지.
김형수 = 저도 어디에선가 20세기의 상징물로 007영화를 든 적이 있습니다만, 어느 날 갑자기 저의 인식론이 체제적·패권적 사고의 근거로 작동하는 것들과 어떻게 다른지, 혹시 국가주의적이지 않은지 고민하다 보니 자꾸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령, 겨울 새벽의 눈길을 헤치고 가는 늑대를 가난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요.
고은 = 그런 안정으로서의 긴장 속에서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지. 고르바초프의 운명과 함께하는 동부 소련의 해체라는 역사적 격변이 지구 전체를 놀라게 했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독일 유학생으로부터 나에게 우송되어 온 벽돌 조각을 받고 나 자신도 한반도 통일 감정 때문에 울음을 터뜨렸으니까.
김형수 = 아, 한 세기가 부서지면서 남긴 벽돌조각이었네요. 선생님의 체험담에는 언제나 알에 갇힌 상상력을 쪼아주는 것 같은 경이로움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선생님께서 공동체 전체의 문제를 가치관의 중심축에 놓고 계시는 점을 큰 귀감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도 ‘겨레말큰사전’을 하고 계시잖습니까.
고은 = 그런 20세기 종결로서의 현실 사회주의 체제 소멸로 21세기를 맞이하게 되었지. 이는 20세기 후반에야 인류 역사의 크기에 대한 시간표인 세기 감각이 자신의 것으로 되었던 것으로부터 현대사의 정회원이 되는 것을 뜻하는 바라, 타자의 역사 공간이던 지난 세기의 민족적 결핍을 떨치고 나 자신이 세계의 주인공으로 나선다는 긍지도 얼마든지 허용되었지. 거의 반동적으로 21세기를 맞을 때 우리는 세계 어느 지역 못지않게 떠들썩한 잔치를 연출했지. 새 밀레니엄에 새해맞이는 일종의 겹경사이기도 했어.
김형수 = 실제로 남다른 감회를 가지실 일이 있으셨네요.
고은 = 나는 그 광화문 새천년맞이 새해맞이 축제로서의 21세기 영접의 현장에는 없었어. 마침 미국 하버드 체류기간을 마치고 돌아올 때 공교롭게도 태평양 상공 대신 대서양 상공을 건너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신전의 21세기 영시(零時) 축하에 가 있었지. 이 고대문명의 발상지 그리스의 밀레니엄 축제에 질세라 이집트의 장기집권자였던 무바라크도 거의 마누라를 내세워 피라미드 밀레니엄 대축제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어.
김형수 = 이제 현실 문명의 지평을 바라볼 만한 자리에 이른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은 = 아무튼 식민지시대의 한 궁벽 농가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자신의 영혼을 상실한 일본 왕의 연호 밑에서 목숨을 잇던 어린이가 고단한 세월을 감당한 기성세대로서 21세기라는 한 대시간의 첫머리를 누리는 감회는 깊고 깊었어. 그래서 나에게는 부재로서의 세기와 실재로서의 세기라는 양세기에 걸친 중층 시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
김형수 = 대안을 추구하는 시대가 아니라 낡은 대안의 한계가 모두 확인된 시대에 들어서신 거예요. 후배들은 오히려 중심의 주변성, 또 주변의 중심성 같은 것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고은 = 20세기가 상처투성이의 연대기로서 지나간다 해서 그 자리가 바로 물청소를 한 복도처럼 깨끗한 것은 아니겠지. 아직도 20세기의 잔재로서 많은 모순의 지속적 원인을 하나의 숙주처럼 담고 있는 것이 오늘이기도 해. 20세기를 누구의 결연한 지적 그대로 ‘야만의 시대’라고 단정하는 역사인식은 결코 험악한 표현이 아니었어. 그만큼 그 세기 안에 뿌리박힌 두 번의 세계대전이나 그 부산물로서의 여러 지역분쟁의 비극 역시 엄청난 문명 진행과 함께 인류의 절망이 희망보다 더 강하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게 해.
김형수 = 20세기를 물청소한 복도에 비유하시다니! 오늘도 참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유목민은 계절을 셋으로 나누어 부릅니다. 어린 가을, 젊은 가을, 늙은 가을. 젊은 가을에는 바람이 길을 잃습니다. 건강 잘 챙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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