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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과의 대화

[고은과의 대화](5)감옥에 있을 때 세계지도라도 붙여놓아야 내 가슴 속이 뚫렸지

소설가·평론가 김형수=5년쯤 전에 ‘눈 내리는 날’이라는 시를 발표하셨습니다. 한 나그네가 눈을 맞으며 ‘아아!’ 하는 감탄사를 내지르는데, ‘아아’가 인류 최초의 소리이자 마지막 언어일 거라 하면서, 어미 아비 없는 푸른 하늘에서 막무가내의 ‘아아’들이 펄펄 내려앉는 걸 “하늘의 마지막 손수건인가 보다”하고 노래한 시였어요. 얼마나 정신이 얼얼했는지 모릅니다. 선생님은 이제껏 시의 바깥에서 ‘자아의 형성’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자아’가 너무 커서 주어가 ‘자연인 고은’인지 ‘민족의 정신’인지 ‘시의 화자’인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고은=과분한 화두이겠네. 나는 선가(禪家)의 화두가 세상에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것을 그럴듯하다고 여기면서도 나 자신은 화두라는 말을 쓰지 않네만 자네의 얘기 허두의 뜻이라면 그건 괜찮네 그려. 나는 나 자신이 나라는 제한적인 생존 안에서 사육되기를 마다하네. 뭐랄까, 그러기를 필사적으로 피하는 건 아니네만 나는 나를 떨쳐버리고 싶은 것, 오늘은 오늘 이상이거나 오늘 이외여야 할 것, 그러므로 나는 나 이상일 것, 심지어 인간도 인간 이외의 인비인(人非人)까지 아우를 것과 끝내는 인간은 저 광막한 우주와의 새삼스러운 육화(肉化)일 것 말이네. 물론 이것은 고대 인도의 범아일여(梵我一如)라던가 그런 것에 충심으로 따르는 일은 아니라네. 출발점은 현재의 나에게 두되, 그 길목 길목은 나로부터 더 멀리멀리 떠나버리는 그런 길목의 원심력에 두고 싶다네.

김형수=‘우주를 육화하고 있는 자아’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고대 몽골 신화에는 우주가 태초에 바다였습니다. 푸른 하늘이 내려왔다가 쉴 곳이 없어서 거대한 거북이 한 마리를 뒤집어서 대지를 만듭니다. 식물, 동물, 사람 모두 거북이의 신체에 붙은 거웃들이라 거북이가 죽으면 만물이 죽습니다. 그래서 유목민은 흙에 박힌 돌멩이 하나도 함부로 뽑지 않고 길흉을 살폈는데.

그림 임옥상 화백

고은=그 바다는 신화의 토대에 사실이 있다는 것을 말하겠지. 실지로 인류 이전의 어느 시기에 고비 일대가 바다였을 것이네. 한반도 백두정맥이란 등뼈의 고지대도 그 밑바닥 암층에서 바다의 흔적이 나오거든. 그런데 나는 별 없이 못 사네. 저 대낮의 푸른 하늘, 한밤중의 캄캄한 하늘의 무정(無情) 없이는 숨 막혀 살 수 없다네. 감옥에 있을 때는 세계지도라도 한 장 벽에 붙여놓아야 내 가슴 속이 뚫렸지. 저 인도의 유마(維摩)가 아주 작은 단칸방에서 삼천대천세계를 꿈꾼 것하고도 남남이 아닐 걸세. 그래서 내 현재라는 것도 과거와 미래의 씨앗이 아니라면 그것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겠지.

김형수=선생님이야말로 ‘정서적 조국은 고구려요 영혼적 혈통은 유목민’이라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버스터미널 같은 데서 볼 때는 21세기의 중절모가 잘 어울리는, 디지털문명에 위축되지 않는 서울의 노신사이신데 말입니다. 방대한 저술을 생각하면 술로 저수지 하나쯤은 비웠을 거라는 말이 실감나지만 평소에는 감기에 드실까 염려되는 마른 체구 그대로입니다. 한데, 독자가 저자 서명을 받으러 가서 만나는 것은 그런 현재적 표정입니다.

고은=우리네 현실이란 늘 현재의 그것에만 의미를 부여하지. 정치의 풍경화 한 장 꺼내보세. 현 대통령과 동석한 전 대통령의 그 맥 빠진 인상 좀 보아. 무릇 현직의 만능은 전직의 무능에 극명하게 대조되지 않나. 이것은 현재가 과거보다 힘이 세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지. 그래서 어제는 오늘의 부모이기는 하나 오늘에 빌붙은 부양가족 아니겠는가. 나 역시 아무리 내 정서 공간의 초시간적인 확대에도 불구하고 이런 세속 일반의 실정과 다를 바 없는 현재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네. 지금 아픈 것하고 며칠 전 아팠던 기억이나 몇 년 전의 환자이던 나하고의 차이 같은 것이지. 여자들은 산통과 같은 그 고통의 절정을 겪고도 다음 아이를 잉태하고 기뻐하지. 그래서 지난날의 깊은 트라우마라는 것은 사실상 오늘 하루의 시시껄렁한 스트레스보다 더 강하지 않지. 신화와 역사의 차이이기도 해. 내 이런 현재로서의 삶이 최우선적인 시간 속에서만 내 감각과 의식도 가능하겠지. 저 산상의 차가운 기류 같은 투명한 정신이나 어느 심연의 바닥 모를 그 영혼의 존엄성 따위가 보장되는 것도 내 현재에서 가능한 것 아닌가. 가버린 시간이나 오지 않은 시간보다 나 자신을 떳떳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당장이니까.

김형수=현실, 모든 독자는 바로 그 ‘지금 이곳의 상황’을 안고 선생님 말씀을 기다립니다.

고은=산중에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時)라는 말이 있지. 지금 당장의 생사라는 절실성을 뜻하겠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현재야말로 얼마나 나 자신을 갇힌 자로 만들겠는가를 따지는 본질이 있지 않나. 현재라는 모든 보장이란 얼마나 착각인가 하는 것. 이럴 때 아인슈타인의 번쩍대는 한마디가 오지. 말한 그대로는 아니네만, 인간이 인간 자신의 존재 의식이나 감각이 우주 일부와 분리된 거라는 착시현상은 인간이 우주라는 전체의 일부인 시간과 공간 안에 갇힌 존재라는 사실을 가로막는 것 말이네. 바로 이 갇힌 상태로부터 튕겨나가는 것이 내 현재에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일과 다를 바 없겠지. 과연 이 현재라는 극심한 변화무쌍 속의 한 점인 불안이야말로 시작 없는 과거와 끝없는 미래로 이어지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이럴 때 나는 실컷 울고 난 뒤처럼 허전해져서 나 이전의 억만 겁 무시간이라는 과거에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네. 내가 추상할 수도 없는 고향 말일세.

김형수=지금 말씀 하시는 고향도 군산 옥구를 지칭하시는 게 아니라서 아득해집니다.

고은=사실 인간의 고향이란 기껏해야 몇 십 년 전의 그것 아닌가. 이런 현재에 바싹 달라붙은 근친적인 시간을 떠나서 아주 머나먼 기체(氣體)로서의 조상들의 우주 숨결 말이네. 137억년 전의 형언할 길 없는 무(無)로부터 탄생한 우주 이래의 그 우주사 카오스 속 어디엔가 내 생명 저쪽 조상종(祖上種)으로서의 생명 원소로 이어져오는 동안의 그 고향으로서의 허무에 대한 그리움 말일세.

김형수=선생님의 근년 저술에서 아주 감동 깊게 읽은 책이 <우주의 사투리>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행사에 초청되어서 발표한 강연, 인사말, 발제문을 보면서 고은 정신의 특징인 ‘언어의 일상적 기능을 벗어난 경지’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할까. 거기에서 더욱 분명해지는데, 우리가 오감으로 반응하는 우주의 사투리를 시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분명히 역사인데 앙상한 겨울 가지에는 남아있지 않는 것들 말입니다.

고은=그렇겠네. 우주의 사투리로서의 시! 무릇 역사란 역사의 한없는 외연으로 시가 되고 말지. 나에게는 역사도 우주도 끝내 시로 돌아간다네. 인류의 조상이란 것 한 번 떠올려 보세나. 이 우주 속의 한 작은 장소인 지구 위에서 나고 죽는 뭇 생명 종의 역사 뒤인 오백만년 전 처음으로 기웃거리기 시작한 것이 인류 아닌가. 그것도 현생 인류에 훨씬 앞서서 고생인류라 하기도 좀 겸연쩍은 ‘남방원숭이(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모독적인 이름이 붙여진 그 인류의 처음 말이네. 막말로 남아프리카 원숭이를 사람의 권속으로 빼돌린 바 아닌가 하는 혐의도 있을 만하지. 그런 조상이 생멸을 거듭하는 한편으로 진화를 되풀이하며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까지 되고 마는 것이지.

이 유장한 목숨들의 흐름 자체가 이미 우주적이지 않은가. 아니 우리네 생명의 원소들이 바로 우주로부터 온 원소 아니던가. 그러므로 내가 별의 적자다, 별의 사생아다, 라고 술 먹고 씨부렁대는 것도 진언이라면 진언 아니겠는가. 현생 인류의 사촌이랄까, 방계라 할까 그런 네안데르탈인이 십만 년 전 시체 매장장례식을 거행한 것이야말로 인간의 시작이었어. 이건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인 우리네 조상을 능가하는 인간 선언이기도 해. 장례와 죽음에의 애도 형식이야말로 인간이 원숭이가 아니라는 것, 인간이 다른 이웃 생명체와 결정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뜻하네그려.

김형수=알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글에서 “저녁 낙조의 충만한 시간 속에서 누군가 울고 있었다”. 또 “태양 아래 어머니 없는 아이가 저쪽에서 혼자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나라 없는 여자가 바람 속에서 머리칼을 날리고 있었다.” 나아가 “별이 빛나는 것을 들짐승으로 아메바로 그리고 귀신으로 멀리서 도와주었다” 하는 문장들을 읽으면 분명히 우주의 사투리가 느껴집니다. 이것도 우리의 신체 안에 기나긴 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겠지요?

고은=그러니까 현생 인류는 이런 십만 년 이후 오만 년 전쯤 등장해서 오늘의 현대 인류의 종손들을 지구 도처에 퍼트렸어. 빙하기에 멈추고 간빙기에 나서고 하며 최근의 인류학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이 어느 겨를에 멸종되어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생물종이 아니라 우리 조상인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와의 상당한 혼혈 교배로 ‘통합’되었다는 학설이 있네 그려. 이런 것이 거인 종 네안데르탈인의 기억 이미지가 아직껏 우리에게 거인설화로 남아있는지도 모르지. 가장 오래된 서사시 주인공 길가메시도 거인이지. 사자를 강아지 취급하지. 우리네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중 가장 비극적인 아기장수 설화도 그 아기장수가 여느 사람 규모를 훨씬 넘는 거인 아니던가. 제주도 설문대 헐망은 제주해협에 주룩주룩 폭포오줌을 싸댔지. 그리고 이런 설화 그 안쪽에는 사뭇 공룡의 크기도 스며있을 거야. 우리가 뱀의 민간신앙 못지않게 뱀을 본능적으로 혐오하는 것도 그런 파충류에게 곤욕을 치르던 옛날 조상의 공포나 저주들의 유산인지 모르겠지.

김형수=그런 걸 교과서적으로 읽기는 하지만 육화시켜서 사는 경우는 없을 겁니다. 세계는 인간의 체험 속에서 신성하다고 하는데, 사유의 영토가 너무 광활해서요.

고은=이런 인류사의 시간 이쪽에서 그 장구한 과거의 공간을 어느 누구도 기억이 아닌 상상이나 추정으로만 다가갈 수밖에 없겠지. 과거가 거꾸로 미래의 형식으로 이해된다는 건 매혹적이네. 최근의 우주과학에서 결과가 원인에 앞서 발생하는 것이나 또는 미래가 과거에 어떤 신호를 보내는 것이 놀라운 가설로 떠오르고 있는데 여기서도 상상으로서의 과거와 기억으로서의 과거를 굳이 나눌 겨를이 없게 하는지 몰라.

김형수=선생님에게서 느껴지는 ‘원시에의 의지’에는 과학이 깔려 있다는 것이 경이롭습니다.

고은=나는 날이 갈수록 천문학 쪽에 홀리고 있다네. 아니 어린 시절부터 도진 본병이기도 하지. 어린 시절 그것밖에 여지가 없던 지상의 가난이 천상에의 풍요에 날아간 한 마리 종달새였을 것이야. 저 15세기인가 16세기인가 그 때, 페르시아의 시인 오마르카얌이 60세가 넘어서도 소년 같은 소원이 천문대를 갖는 거였어. 그런 소원을 그를 총애해서 총리 대법원장 등 다 시켰던 황제가 들어주었지. 그 하사받은 천문대에서 아주 웅숭 깊은 천문학에 빠져들었지. 그는 이슬람 관습 속에서도 특이하게 이백 못지않은 술꾼이었고 그의 연애시는 오늘날에도 국민적 고전 시가이기도 하지.

김형수=하하, 배가 고파서 꿈을 많이 드셨네요. 그래서인지 “마치 동굴 속의 울림을 아직껏 보전하고 있는 상고시대 원시인들의 혈거적(穴居的)인 성찰” 같은 촌평을 하시면 실감이 아주 큽니다. 그럴 때는 제 사유가 평소에 이를 수 없는 아주 먼 곳까지 다녀오는 경험을 하지요. 한데, 그런 걸 휴대전화의 문자 소통으로는 옮길 수 없습니다.

고은=옛날은 시간이 느릿느릿 완만하고 유장했어. 인간의 수명은 짧았으나 도리어 인간 정신에는 역사 단위의 시간이 넘쳐났지. 이런 선사시대적 시간이야말로 그 뒤의 역사시대를 통해서 점차 속도가 나붙어 인간 생활을 눈 코 뜰 사이 없게 다그치는 속도전의 생존으로 만들어버린 것이 문명이야. 호주 원주민 에보리진에게는 시간 단위가 한나절이더군. 문명이란 인간 두뇌와 손이 만든 기계 행위로 멈추지 않고 거기에 인간이나 자연의 생물 상태와는 또 다른 괴물로서의 생물종이란 사실을 우리는 뒤늦게 체감하지 않으면 안 되지. 이제 인조인간이나 컴퓨터 프로그램이 펄펄 살아서 인간 세상에 쿠데타를 일으켜가고 있지 않나. 요즘 젊은이들의 이동통신 삼매경 좀 봐. 인간은 몇 달 만에 바뀌는 첨단 기기의 순박한 객체가 되었지 뭔가. 자본주의의 ‘유행’은 흑사병이기도 하고 숨통이기도 해.

김형수=인간의 신체라는 자연이 문명에 점령당해 식민지적 상태에 들어갔나 봅니다.

고은=우리 자신들이 발 디디고 있는 지상만이 우주의 부분적 지층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심신 속 지층에도 저 광막한 선사시대와 그 선사의 작은 단층인 역사시대의 여러 내력들이 켜켜이 압축되어 있지. 나는 내 조상의 무한이지.

김형수=방금 ‘우리 자신의 심신 속 지층’에 있는 광막한 시간을 말씀하시는 순간 고은 전집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이 이해되었습니다. 그것은 연보의 서두를 장식하는 문장들인데, 저자의 이력을 적는 난에 전생에 대한 기록이 왜 들어가 있는지 오랫동안 납득할 수 없었어요. 그런 건 문자로 기록할 수 없는, 설령 우리와 관련이 있더라도 자아에 포함시킬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고은=고대사는 근대사의 시간과도 달라. 저 이집트 고왕조 파라오 역사는 무려 몇 천 년 아닌가. 아니 한반도 옆의 중국사도 오천 년의 역대 왕조의 세월 아닌가. 이런 사례에 질세라 해방 직후 우리도 유구한 역사시간에 편승해서 단군 이래의 반만 년을 내걸었지. 오백만 년 인류사에서 그 양으로는 티끌에 지나지 않지만 그 질에 있어서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바로 문자의 시대가 열린 것 아닌가. 문자의 오천년이야말로 인간의 시대이고 역사의 시대 아닌가.

김형수=시는 ‘역사의 음악’이라 하셨는데, 음악은 문자 이전의 상태를 안고 있잖습니까? 저는 문자 이전을 역사 이전이라 하는 것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고은=역사의 음악이라 했을 때는 차라리 시는 현실 안에 두었었지. 이런 일과 상관없이 문자를 통해 정착이 한층 더 구조화될 수 있었네. 물론 문자는 철저한 지배층 독점의 행위였지. 그것은 ‘문화’라는 의미가 ‘밭 갈기’에서 나왔음에도 그 문화의 핵심인 문자는 밭 가는 백성의 그것이 아니라 그 백성의 수확물에 세금을 매기는 권력의 소유였어. 즉 왕과 신관(神官)의 신성한 기호였단 말이지. 이집트 상형문자를 신성 문자라고 그리스인들이 이름 붙여준 것은 정곡을 찔렀어. 문자는 신성한 것, 그러므로 아무나 거기에 끼어들 수 없었지.

김형수=한국인은 문자의 시초를 암각화 같은 것에서 상상해 오는 게 아니라 훈민정음부터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를 지나칠 때 우리가 쓰는 말이 왜 중국과 같아야 할까 하는 저항감을 느끼는데, 존재의 온전성을 상실한 까닭일까요?

고은=중국의 한자 역시 지배집단의 주술과 얽히고설킨 상형 기호들이야. 공자의 ‘인(人)’은 높은 계층이야. 가로되 군자 노릇이지. 그러니 민(民)은 통치자가 항상 다스려야 하는 대상이었어. ‘민’은 인간의 눈에 화살을 쏘아 장님으로 만들어 시키는 노역만 열중하게 하는 상형이야. 이런 백성에게까지 공자의 인(仁)은 닿아있지 않아. 그래서 묵자의 무한한 사랑이 유가세력에게 유린되어 버리고 묵자의 시대가 불가능했지. 나라 국(國)자는 커다란 국가사회라는 장벽 안에 무기와 작은 입(口)이 갇혀 있어. 그것은 인민을 가축을 헤아리는 숫자의 작은 입(口)으로 표현하고 있어. 이런 문자의 폭력성으로부터 우리는 문자의 개체성, 창조성을 이끌어 낸 것이네. 아 나의 언어, 나의 문자 하나하나는 이렇게 피눈물이라네.

김형수=우리들의 표정, 예컨대 일상에서 느끼는 꿈, 열망, 좌절, 낙담…. 이런 걸 나타내는 언어로 이야기하는 자리에 어느덧 이른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가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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