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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과의 대화

[고은과의 대화](6)인간은 문화의 분절을 몸으로 겪는 ‘시간 속의 양서류’와 같다네

김형수(소설가·평론가)=이제까지 선생님은 인간의 신체에 쌓인 거대한 시간의 크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속에서 당대 문명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패러다임에 불과하다는 것, 또 인간의 수명은 길어지고 정신의 크기는 작아졌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양 세기의 달빛’을 말씀하시는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고은=양 세기에 걸친 삶이란 내가 내 부모의 자식인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선택 불가능한 삶이겠지. 또한 인간의 시간관념이 만든 시대라든가 세대라든가 세기라든가 하는 것이 우연하게 적용됨으로써 단(單) 세기를 사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에 지나지 않겠지. 그럼에도 그저 20세기만이 아니라 두 세기에 걸친다는 것은 시간관념의 차원을 넘어서 복합적 역사단위가 되지 않을 수 없네 그려. 이것은 문화의 분절을 몸으로 겪는 일이기도 하지. 일종의 양서류와 같단 말일세.

김형수=양서류라니! 참 절묘한 비유입니다. 어려서는 아가미로 수중호흡을 하면서 물에서 살고, 자라면 폐와 피부로 호흡하며 땅에서 사는 것처럼 우리도 두 세기에 걸쳐, 서로 다른 복수의 문명 위에서 실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림 임옥상 화백

고은=그래서 하나의 세기도 버거운 삶이거늘 그 버거운 것이 이중으로 배가되는 것이지.

김형수=알에서 깨어 나방이 되는 곤충과도 다르게, 양서류는 올챙이와 개구리의 역사를 하나의 척추로 살아야 한다는 뜻까지 얹어서 말씀하신 거지요?

고은=그렇기도 하겠네. 그런데 지구상의 생물종 멸종현황을 보면 양서류의 소멸이 다른 생물종의 그것에 비교될 수 없게 심각한 지경이라네. 시간 속의 양서류인 당대의 우리 생존이나 삶의 의미에도 시사하는 것이 적지 않네 그려. 그만치 우리는 일상으로서의 위기 속에 처해 있지 않은가. 심해의 수압 같은 시대 진행의 압력도 더 받고 있네. 여기서 ‘나’라는 것, 자아라는 것, 인간이 인간 자신을 의식하는 그 제1인칭에 대해서 좀 더 보태줘야 할 말이 있을 성 부르네.

김형수=한 존재가 문명의 양 패러다임에 걸쳐 있더라도 인위적으로 쪼개거나 나눌 수 없다는 논지를 저번에는 잘 못알아들었습니다.

고은=근본적으로는 나라는 것을 말하는 일이야 끝간 데 모를 일이기도 하지. 도대체 나라는 것 떠나 무엇이 있겠는가. 나라는 것 앞에서 하늘도 하늘이고 땅도 땅 아니겠는가. ‘세계 내 존재’라는 그럴싸한 관념 어휘가 엄숙해질수록 그 엄숙한 뒤란에서는 차라리 세계나 세계 내보다 그 끝에 따라붙은 존재라는 나의 별칭이 그 어휘의 핵심 아닌가.

김형수=나는 언제나 비어 있다, 내가 하늘을 본다고 해서 내게 하늘이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인식할 때 세계가 존재한다…. 이런 사르트르적 실존주의가 선생님을 오랫동안 젊게 하시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고은=그런데 한국어 용례로서는 나라는 주어가 부재하거나 유령으로 되지. 아니 그 용도가 쉽사리 나타나지 않지. 이것이 근대문학에서의 서술주체로서는 하나의 표현구성에서 치명적이기까지 한 난점이기도 하지. 그만큼 서구 문체에서의 주어가 표현의 주체가 된 나머지 목적어에 절대적으로 군림하기도 하겠네. 그래서였는지, 1950년대 한 젊은 세대의 주자가 나타나 ‘주어 없는 비극’을 부르짖기도 했다네.

김형수=저는 ‘주어 없는 세계’에 대한 시골사람으로서의 연민을 좀처럼 버리지 못합니다.

고은=그런데도 이 같은 사실, ‘나’ 없이도 통상의 서술이 가능한 오랜 국어의 관습은 지구상의 언어생활 일반에서는 특수한 것이지만 자아탐구의 이쪽에서 나라는, 자아라는 주어가 생략된다는 의미는 그야말로 의미심장한 바 있네.

김형수=달팽이와 달팽이의 껍데기가 하나이듯 자아와 세계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시는 겁니까?

고은=바로 말하지만 자아란 끝내 무아이고 무에 닿아있다는 것 말이네. 이것은 고대인도의 브라만사상의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우주와 자아의 일치를 말할 때의 자아가 그 사상을 전복해버리는 종합사상인 불교에서 부정되어 버리는 것하고도 상통하겠지. 불교의 제법무아의 그 무아 말일세.

김형수=저는 선생님의 시 ‘부활’에도 주어가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통사의 질서가 근대문법에 의존되어 있지도 않고요. 선생님의 언어들이 이데올로기를 쌓기보다 무너뜨리는 쪽으로 움직일 수 있었던 경지도 그곳에서 나온다고 보는 겁니다. 사실 ‘나’라는 주어가 강조되면 될수록 ‘나’라는 주체가 권력화되는 것 아닙니까?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주어 없는 비극’을 혹시 곡해하는 겁니까?

고은=그런데 서양의 사상은 오랜 자아의 사상으로 요약될 수 있지. 하고 많은 세월이 자아의 세월이었어. 중세봉건 속에서도 신의 의존체인 인간이 자연에 대한 이원론으로서의 자기중심을 관철해왔지. 21세기 벽두에 유네스코 제정의 ‘세계 시의 날’을 선포하는 국제시인축제를 그리스에서 개최했을 때 그곳 델피신전에 가 있었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곳 신전에 ‘세계의 배꼽’을 설치하고 있지. 그동안 내가 다닌 곳의 여러 군데에 자신들의 곳이 세계의 중심이고 배꼽임을 과시하고 있었어. 고대 인도나 티베트 사람들은 히말라야 연봉(連峰) 중앙쯤에 별도로 독립된 카일라스산(수미산)을 우주의 배꼽이라 하지. 이런 곳은 라틴아메리카 아즈텍 유적지에도 있어. 심지어 미국 하버드대 구내에 설치된 조각작품 ‘세계의 배꼽’도 있어서 자신들이 세계 학문의 중심임을 은근히 말하고 있지. 그리스도 중국 못지않게 자신들의 ‘중화사상’이 있었어. 그래서 그들의 영역 밖의 사회를 야만의 땅으로 치부하고, 특히 그리스 동쪽의 사람들을 바바리즘으로 부정해 버렸지.

김형수=늑대의 신체에 늑대가 잡아먹은 양의 세포가 아로새겨진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고은=지구 위의 어디나 자신들의 거처를 신성한 집단자아의 원점으로 삼아 세계의 중심으로 조작해오고 있어. 이것이 오늘날 자본의 욕망과 결합된 허브이고 중심개념의 사유화야. 모두 다 중심지상주의에 빠져있지. 저 시골학교의 구호조차 세계의 중심 운운을 내걸고 있지 않은가. 모조리 자기도취에 빠져있는 자아병이야. 내가 그리스 델피신전의 신탁선언 ‘너 자신을 알라’를 말하려고 중언부언했네. 지금이야 지난날의 신탁 무녀들의 영감 가득한 신성 분위기가 있을 까닭이 없지. 그저 문화재이고 관광객의 상품일 뿐이야. ‘너 자신을 알라’ 하는 자아에의 사명감은 소크라테스 기본명제 아닌가. 지금은 어린아이도 입만 열면 나올 그런 상투어가 되었지.

김형수=모든 중심이 ‘중화’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다산 선생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정오가 되면 내 머리 위에서 태양이 빛난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중심이다! 엊그제 몽골 유목민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에서도 보았지만, 유목민은 자신들의 성산 보르칸산을 이사할 때도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세계의 모든 곳을 섬길 줄 아는 대지의 정신이 아닌가 합니다.

고은=그거 황홀한 자아로군. 얘기를 이어가세나.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이나 세계의 기원적 관심은 바로 소크라테스에 이르러 흐지부지된 것은 아니지. 아마도 그 사이에 헤라클레이토스라는 탁월한 형이상학적 경계인이 나타남으로써 우주론적 사상과 인간론적 사상의 양쪽에 두 다리를 걸치고 있었지. 그야말로 ‘양 세기적인 사상’이기도 한 것이 그의 쌍방향의 사상이야. 그가 유언처럼 말한 ‘나는 나 자신을 탐구하였다’라는 것도 우주의 비밀과 인간의 비밀이 서로 없어서는 안될 상호성이라는 자아의 철학을 낳은 것이지. 아무튼 그의 환경인 자연철학은 고대인도의 수많은 학파의 숲을 이룬 것처럼 현란했어. 그런 다양한 것이 소크라테스의 시장거리 아고라에서 인간 또는 자아라는 것으로 응결되기 시작하지. 또 그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기독교의 유일신적 역동성과 짝짜꿍이 되는 것 아니겠어. 그것이 저 헤겔의 ‘세계정신’이라는 것으로 색만 바꾸어 내려오는 것 아니겠어.

김형수=근대 이후 각종의 철학이 지금 말씀하신 자연철학에서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고은=니체가 헤겔을 타파한 일도 있지.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신의 지배설정을 용해시키지만 그것 역시 자연을 객체로 보는 자기 우월성이지. 나는 나이고 너는 나의 하인이거나 동물 또는 물상(物象)일 따름이야. 인간이란 자신의 진화과정에서 얼마나 자연의 진화나 변동에 직결된 것인지를 챙겨보는 일이 없지. 교만과 오만에 파묻혀 있어. 어릴 때 동물장난감 좋아하던 게 뭐야. 바로 그 동물세계의 일원이었다는 오랜 기억 밑바닥을 뜻하는 한편으로 선사시대 사냥꾼의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원시적인 욕구가 유전되어온 것이라는 진화생물학의 주장이 있지. 이런 판에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는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을 타파해 버렸어.

김형수=그래서인지 우리 사회에서도 마치 바람이 불고 눈비가 오듯이 천연덕스럽게 근대, 주체, 자아 이런 담론들이 지나갔습니다.

고은=사실 우리의 언어도 인간만의 순수이성이 만들어낸 것이기보다 인간의 몸에서 시작한 것이지. 그래서 신화가 역사나 사실에 앞선 것이 아니라 사실로서의 삶이 신화를 요리저리 꾸며낸 것이야. 상상은 기억의 변종인지 몰라. 그런데 인간과 자연이나 다른 생물을 둘로 나눠버리는 기독교나 서구사상의 이원론에 의해 인간은 세계의 주인노릇을 난폭하게 해왔어.

김형수=지구의 광범한 지역에서 그 근대가 작위적으로 발명되어 이데올로기적으로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자연이 낳은 것들을 ‘변방’ ‘비주체’ ‘야만’ 등의 낙인을 찍어 중심적 권력으로부터 추방합니다.

고은=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다르다 하지. 제자란 동양의 사제절대주의가 답습하는 것처럼 충성관계가 아니라 비판적 계승 내지 극복의 관계라면 응당 그래야 하겠지. 그래서 플라톤은 음악을 좋아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미술에 가치를 부여하지. 그 뒤 로마에서의 스토아학파도 향락주의 사상과 대립하지. 그런데 이들은 다 인간의 이성이나 자아의식에서는 하나같이 한 핏줄이야. 물론 종교는 이런 자아의식을 저주하지. 너희들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너희들 오만이야말로 죄악이다. 귀의하라, 귀의하라, 하고 경종을 울리지. 인간 자신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오직 신을 믿고 따르는 것만이 너희들의 길이라는 것이지. 이런 일이 인간과 자연을 구별할 때에만 유착되는데 그것이 근대의 새벽에 외쳐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생각하는 자의 궁극성 아닌가. 그 뒤의 인간오성론도 한술 더 떠 인간의 오성이 다른 존재에 대한 우월성을 가능케 하는 것이, 심지어 경제학에서의 인간만이 동물 따위와 달리 물물교환 물물교역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근세의 절대적 자아라는 실재론에 누가 함부로 대들 수 없었지.

김형수=그러한 일이 비서구 국가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을 근대화라 부르고, 외부에서 압박하는 것을 식민지화라고 부르잖습니까.

고은=그렇지. 그렇고 말고. ‘나는 나 자신을 모른다’고 말한 괴테를 보게. 그의 운명은 ‘나’의 확대로 그 당시로는 드물디 드물게 80세를 넘겼어. 그가 그려낸 만년의 대작 <파우스트> 2부는 사실은 1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지. 거기에는 100세의 눈먼 노인 파우스트가 동정녀 같은 천사 베아트리체의 인도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으로 끝나지. 그 100세라는 시 속의 시간이야말로 자신이 산 80세에서 살지 못한 20세를 더한 것인지도 모르지. 그런데 이런 자아의 주류사상에 도전한 것도 동양의 무 또는 무아가 아니라 그 주류사상의 내부에서 깨치고 나오는 고도의 이단적 지혜에 의해서 가능했지.

김형수=그 이단적 지혜가 중요할 것 같은데 제가 소양이 부족해서 잘 못 헤아리고 있습니다. 당대 문명이 하나의 패러다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패러다임으로 구성된 세계 안에서 자신을 맞춰가려는 욕망 때문에 그런 감수성이 둔해진 건지도 모릅니다.

고은=서양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을 말할 때 그것이 서구중심사관에 고개를 숙인다는 오해가 없다면 서양 안에는 사실 오래전부터 또 하나의 동양이 들어있네. 아니 우리가 아시아적 인식이나 동양권을 말할 때 고대인도 사상을 필두로 삼기 십상이지만 그곳은 인구어(印歐語)로서의 산스크리트 문자에 토대를 두고 있고, 그 문자는 당연히 서양의 언어망의 원조가 아닌가. 그리고 그들의 사상이나 문학이 바로 서양 고대로 건너가 그곳에서 재생된 것이지. 탄생이기보다 재생이야. 가령, 뒤의 고대 그리스문학을 그 앞의 인도문학에 견주어 보세나. 인도는 인류의 조국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지. 서구문화 전반의 기초인 신화와 언어는 인도에서 나온 것을 두고 하는 소리이지. 인구어계(印歐語係)라는 언어 분화도표 그대로 서구어는 전부 산스크리트에서 펼쳐나간 발달이라고 하더군. 정작 고대 산스크리트어는 이제 사어(死語)야. 일부 학자의 방구석에서만 숨넘어가는 소리가 날 뿐이지.

김형수=그 많은 공부를 언제 하셨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도 인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긴 합니다만.

고은=심지어 그리스의 조형(造形)도 인도의 거리에서 나간 형상세계라네. 나중에 간다라 예술이 그리스 알렉산드로스 원정에 동행한 그리스 조형기술로 가능한 것은 사실은 역수입인지 몰라. 인도의 하라카리가 헤라클레스로, 티사아가 테세우스로, 데야우스가 제우스로, 마누가 미노스로 된 것 아닌가.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어드>는 인도의 <라마야나>의 창조적 복제지. 그 인도의 영웅서사시는 아내 시이타를 빼앗은 세일론의 왕 라아보아서에 대한 라마전기(戰記)라 하네. 요컨대 산스크리트에서 서쪽, 북쪽으로 뻗어나간 언어세계이고 기독교의 삼위일체도 브라마(아버지), 비쉬느(아들), 시바(성령)와 다를 바 없어. 노아의 홍수설화도 사실은 수메르 전기(前期)의 대홍수에 연원을 두고 있어.

김형수=그새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시간 속의 양서류’라는 말에서 느낀 것이 많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지속시키는 ‘몸’은 있되 ‘인식’은 사라져버린, 그래서 ‘존재의 근원을 잃어버린 존재’들에 대한 위기감을 생각하면서 선생님의 최근 시를 다시 읽고 싶어졌습니다. 더 새로워 보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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