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소설가·평론가 김형수 = 저는 이 대화의 주제를 ‘고은에게 관찰되는 고은의 자아’, 즉 고은의 시적 페르소나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아는 역시 ‘길 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거듭 깨닫게 됩니다. 양 세기의 나그네가 현재의 좌표를 가리키면서 여기가 어디인지를 들려주는 느낌이랄까요. 지금 이야기가 그 방향으로 가는 게 맞지요?
고은= 나 야 자아에의 목마름의 시대를 살아오는 동안에도 시 속의 화자로서의 나를 많이 써 온 사람 아닌가. 시 속의 화자와 시 밖의 작가가 경계를 이루는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한 우리 근대시의 무자각적 행태에 나도 몽유병자로 끼어들지 않았나 싶지.
김형수 = 서구 시학의 본질은 고독에 있다고 말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비유나 상징은 세상을 혼자의 의지로 사용하는 시적 방법이었다고 하시면서 서구 모방으로 출발한 한국 근대시에 그 같은 본질적 측면이 결여된 점을 안타까워하셨어요.
고은= 나 야 자아에의 목마름의 시대를 살아오는 동안에도 시 속의 화자로서의 나를 많이 써 온 사람 아닌가. 시 속의 화자와 시 밖의 작가가 경계를 이루는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한 우리 근대시의 무자각적 행태에 나도 몽유병자로 끼어들지 않았나 싶지.
김형수 = 서구 시학의 본질은 고독에 있다고 말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비유나 상징은 세상을 혼자의 의지로 사용하는 시적 방법이었다고 하시면서 서구 모방으로 출발한 한국 근대시에 그 같은 본질적 측면이 결여된 점을 안타까워하셨어요.
그림 임옥상 화백
김형수 = 한국 근현대시의 역사에서 그토록 강렬한 소재로 사용되던 ‘빈집’의 탄생과 소멸에도 그 같은 맥락이 있다고 봅니다. ‘낡은 집’ ‘모촌’ ‘폐가’ ‘흉가’ ‘대밭’으로 변주되는 빈집이 ‘민족적 유랑’을 표상하는 징표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인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 거기에 농경사회에서는 천부적으로 존중해야 할 인격적 독립 단위가 가구 이하로까지 세분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숨어 있습니다. 산업사회는 유권자 수가 성인 인구수가 되지만 시골 이장의 머리 속에서는 소속 공동체를 구성하는 단위들이 언제나 호주의 숫자로 기억됩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 하층 사람들도 정주의 박탈로 소외되는 게 아니라 이동의 박탈로 소외되는 것, 이것이 양 세기의 달빛 아래서 펼쳐지는 풍경이 아닌가 합니다.
고은 = 20세기 후반 특히 한국전쟁 이후의 실존주의나 그 뒤의 사회의식의 확대에 의한 이른바 근대의 시민적 자아상은 더 이상 서구 자아모델만이 그 전형은 아니게 되었지. 낯선 개념의 수용이나 이식이라는 것도 끝내는 본래적인 재생에 이르는 것 아닌가. 내 구두 봐. 그게 바다 건너에서 온 신발 아닌가. 그러나 이제는 내 발에는 꼭 맞는 것이 되어 내 걸음에 날개를 달아주지 않는가. 모든 타자가 자아화된다는 것은 문화발생론에서 첫번째 정의이기도 해. 문화만치 고유하지 않고 여러 가지 혼교로 되는 것도 없지. 그래서 심한 말로 문화는 갈보 아닌가.
김형수 = 황지우 시인도 ‘격류 위의 나뭇잎’이라는 표현으로 전라도 촌놈이 모던을 체화하는 과정을 그린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걷잡을 수 없이 휩쓸어간 근대의 시간들을 회고하는 아주 감동적인 글입니다.
고은 = 내가 미국 동부의 어느 도시나 동남아 어느 지역에 가서 거기에 지난날의 내 고향을 볼 수 있는 것도 그만큼 우리의 문명 단위가 어리둥절하게 표변해가는 동안 너무나 낯선 체험을 하기 때문이지. 너도 나도 다 고향상실자야. 하이데거의 관념을 우리네의 삶이 다 삼켜버린 꼴이야.
김형수 = 저도 여러 대륙에서 제 고향의 장터를 보았습니다. 지금은 할머니의 젖가슴처럼 되어 있을지라도 고향 장터가 그냥 오지의 재래시장이기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세계 시장경제체제에 그대로 흡수된 약 40억 인구의 삶의 거점이라는 사실, 그래서 부끄러운 기억 속에 숨겨둔 코리아의 시골 장터가 아니라 지구의 보편적 삶의 장소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고은 = 20세기 명제로서 그토록 처절한 자아가 고대의 무아 사상 말고도 20세기 후반 프랑스 담론에서 여실해지는 것만 봐도 더 이상 길고 긴 자아의 연대기는 보장될 수 없는 것 같네. 끝내 자아가 우주의 공허 가운데 있는 이런 귀환불능점을 지나쳐서 사라진 것 아닌지 몰라. 특히 인터넷 세기의 그물망이라는 것하고 고대 인도의 인드라망하고 하나도 다를 것 없지 않은가. 이런 관계의 무한발전 속에서는 진리란 것도 어느 한 꼭짓점을 점유하지 못하고 전방향으로 확산되어 버리고 말지. 그래서 들뢰즈가 진리는 한 곳에 있지 않다고 씨부렁거렸어.
김형수 =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를 대하는 순간, 이제 삶의 어떤 형식들은 우리가 먼저 사용해서 퍼져가는구나 싶었어요. 자유를 만끽하던 개인들이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선택하는 것도 그렇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익명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지혜가 공동의 목표를 찾아내는 과정도 너무나 ‘촛불’을 닮아 있습니다.
고은 = 우리 근대사에서의 자아 주체 그리고 독립이라는 것이 그것을 제대로 터득하거나 실현하지도 않은 역사 분열의 진행 앞에서 여전히 외세라는 열강의 자기이익의 대상이 되어 부대끼는 것이 우리 아닌가. 근대 정치명제인 독립을 완성하지도 못한 채 관계의 타자로밖에 될 수 없는 현실 설정이지. 휴전선 이북의 그 고집스러운 주체라는 일원체제도 이제는 과시되기보다 시대의 속도로부터 낙후되는 것이 현실 아닌가. 이를테면 독립이 고립이 되어버린 것이지. 내가 일찍이 1980년대 후반부터 북한을 농성체제라고 한 것이나 일본의 와다 하루키가 ‘유격대국가’라고 한 것, 그 유격대야말로 식민지 시대 전반기의 절대 노선 아니던가. 유격전이나 빨치산 싸움이란 뭔가, 그것은 정규전으로는 안 될 때의 치고 빠지기, 때리고 튀기 아닌가. 이제 그런 자기표현이란 일부 재래식 국지전이나 테러리즘으로 임시화하고 있네. 요컨대 자아나 독립은 금세기의 전천후적인 관계문명에서는 무척이나 힘겨운 생존 방식이지. 구식 총기 같은 것인지 몰라.
김형수 = 독립이 고립이 된다는 말씀은 참 뼈아프게 들립니다. 다만 북을 ‘농성체제’라고 표현하신 대목에는 약간의 의문이 없지 않습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에게 닫힌 상태의 사회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고비 때마다 중국·러시아 등과 형성된 네트워크가 우리를 배제하는 걸 경험합니다. 아시아·아프리카문학페스티벌을 준비하느라 남아공에 갔을 때 아프리카 작가들이 남한은 제3세계적 연대에서 고립되어 있다고 말하는 걸 들으면서 지상에는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관계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았거든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소는 두렁을 타야 양쪽의 풀을 뜯을 수 있다고 말했던 것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고은 = 이 점에서는 남쪽은 갖은 식민지 잔재 내지 신식민지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관련 방식에 단련될 대로 단련된 상태, 그야말로 세파에 시달릴 대로 시달리며 살아온 생존의 질긴 섬유질을 체내에 갖추고 있어. 말하자면 간·쓸개를 내주며 세계를 학습해 온 것이 터전이 되어 인터넷 제1주자까지 이룬 것 아닌가.
김형수 = 세계는 다양한 중심들이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으니 모든 자아는 다중심적으로, 양쪽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고은 = 내가 자주 현 세기의 현상은 불가불 ‘관계의 세기’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자아는 때려치우고 타자들과의 존재, 타자들 속에서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자아해체의 맹신만은 아닐세. 아마도 이제 막 서론을 끝낸 본론으로서의 인터넷 시대, 세계화 시대는 일종의 세계사 순환의 현상임을 충분히 예감하고 있네. 물론 이 엄청난 파고로 너울지는 첨단 문명을 근대의 민족주의 따위의 일정한 경험에 대비할 생각은 아니네만 그 어떤 문명의 위력도 자기 한계를 태생적으로 안고 있다는 것만은 우주와 세계의 성·주·괴·공(成住壞空), 그 흥망성쇠로부터 능히 터득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언어 없던 긴 시대도 끝이 있고 문자 언어가 종이를 만나 활자문명으로 번영을 누린 시대도 그 전성시대를 지나고 있는 것처럼 영원불멸의 전자 문명이라는 것도 온갖 작동을 다한 나머지 한갓 문화재로 남게 될 때가 왜 없겠는가.
김형수 =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고은 = 지금의 세계화라는 것이 특히 구 소련 동구권의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뒤의 ‘위대한 자본주의’로 일극화(一極化)되다가 바로 그 자본주의의 난숙 또는 타락으로 팍스아메리카나 체제가 마구 요동치고 있지 않은가. 20세기 직후와 21세기 벽두의 그 부푼 가슴 속의 지구의 시장사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미국의 내리막 비탈에 대해서 중국의 오르막 언덕배기는 또 무엇인가. G2로서의 두 대국 동행의 시대가 지나면서 끝내 21세기 중화주의가 세계화를 떠맡을지 누가 아는가. 그런 중국 주도의 세계체제라는 것이 21세기 후반에 가동된다 해도 그것이 다음 세기와 22세기나 그 이상 몇 세기의 미래를 천년제국으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과거 이상으로 불안의 극한으로 가고 있다는 깨달음 위에서 새삼 삶의 가치를 어디다 둘지의 침중한 문제제기는 어느 때보다 생생하지 않은가.
김형수 = “조심해, 악마는 나이를 먹고 있어”하던 격언이 생각납니다. 저는 자꾸만 개인이 각자 저마다 알아서 행동하는 때로 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생물 같은 유기적인 공동체가 출현하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고은 = 그 생각 속에 내 생각도 있고 싶네. 이런 불안 위에서의 삶이란 이전의 ‘자아’나 오늘의 ‘관계’도 한 시절의 꿈 아니겠는가. 아마도 지금 세계 도처에서 치켜세우고 있는 보편성이라는 것도 나는 의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네. 사실 보편성은 유치한 거야. 어린 아이들은 아무 아이들이나 거의 같지 않은가. 그런 동일성이 보편성의 기반 아닌가. 하늘의 별을 보고 꿈꾸는 소녀는 어디 아일랜드의 소녀나 한국 울릉도의 소녀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들이 집 떠난 아버지를 생각하는 그리움이라는 인간 보편의 감정은 또 무엇인가.
내 구두를 봐. 그게 바다 건너에서 온 신발 아닌가.
그러나 이제는 내 발에 꼭 맞는 것이 되어 내 걸음에 날개를 달아주지 않는가.
김형수 = 보편이라는 말이 잘못 쓰이는 사례는 꽤 많아 보입니다. 아프리카 작가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동안에도 그들의 모국어는 멸종되고 있었잖습니까? 가령, 우리가 문학을 문화예술의 일부라고 말하지만 문화가 정체성, 소속감, 관습, 전통과 관련된다면 예술은 장르라는 추상적 틀 위에 구축된 ‘범세계적 전문영역’인 셈이라 문학의 보편성에 충실해진다는 것이 오히려 자기 문화에서 멀어지게 하는 수도 허다합니다.
고은 = 저 오랜 스콜라파의 실재론이라는 성벽에 포격을 가하는 유명론(唯名論)은 중세의 반란이었지. 그러니까 부르주아 세계관의 단초이기도 한 셈이지. 유물론적 사유인데 여기서 ‘보편은 이름뿐이다’라는 폭언이 나오지. 그 때까지 신의 의도에 따라야 하는 신의 피동적인 자아가 자연의 주체로 군림해 왔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침 뱉는 꼴이지. 좀 고약한 아전이 현감 앞에 굽신대지만 백성한테는 폭군 아닌가. 중세 가톨릭의 의미가 ‘보편’의 의미와 닿아있었지. 이런 보편자를 부정하는 개별자의 출현이 곧 근대 아닌가. 그러나 이 보편 내지 보편성, 보편개념 말고도 사람이 살아오는 동안 만들어낸 사랑이나 자유나 정의 따위의 보편 개념은 유개념적(類槪念的)인 것이야. 전나무나 상수리나무가 다 나무인 것이니 거기에 토를 달 사람이 없지. 그런데 이 유개념으로서의 보편이 보편 자체의 세력 밖의 타자라는 개별체들을 억압하고 통합하는 명분이라면 이미 거기에는 타자 지배 의지가 개입되지 않겠는가.
김형수 = 예술의 역사에서도 지배자의 용모가 미의 표준이 되어왔습니다. 그것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수많은 약소문화에게 폭력적입니다.
고은 = 우리 현대가 서구 보편주의의 일반화로 하여금 행여 우리 자신의 보편타당성을 살려내는데 커다란 장애는 아닌가 새삼 식별해보아야겠지. 그렇다 해서 내가 개량한복만을 고집하거나 아니면 한술 더 떠서 갓 쓰고 출타할 생각은 추호도 없겠네. 다만 이 보편성이 행여나 세계화나 신자유주의의 이념 장치가 되는 것은 아닌가 따져보아야 할 것이네. 흔히 한국문학의 현재에 대해서 한 마디 거드는 사람들의 도식 발언이 한국문학은 보편성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나는 이 말처럼 우스꽝스러운 노릇도 없다고 여기네. 그래서 나는 요즘 나라 밖의 행사에 초대될 때마다 너무 진부한 보편성, 아니 너무 편한 헌 옷이 되어버린 보편성 말고 새로운 미지의 보편성을 찾아내야 한다고 역설한다네.
김형수 = ‘서구 보편주의’라는 말 속에 숨은 낡은 권력을 해체하려는 의지가 아시아·아프리카문학페스티벌 같은, 새로운 지구연대를 꿈꾸는 틀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고은 = 나는 불가에서 말하는 ‘세계는 한 송이 꽃’(世界一花)라는 것에 찬탄을 보내는 한편 반발도 일삼고 있네. 세계는 한 송이가 아니라 만 송이 꽃 아닌가. 억만 송이 꽃밭 아닌가. 사실은 궁극적으로는 보편은 의미 규정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은 지난 날 이래 유구한 세월을 통해서 인간의 염원이 자아낸 구조물임에 틀림없으나 그 이상으로 아직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의 가치인지 몰라. 그래서 보편논리에 전념한 사상들도 그것에의 정의를 내리기를 마다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는가.
김형수 = <만인보>를 그런 세계관에서 나온 작품이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저는 “천 개의 목소리가 만든 ‘유일하고 같은’ 하나의 함성”이라고 해설했습니다.
고은 = 보편이 세계이고 개별이 자아라는 단순한 유추는 그만두겠네. 모든 개념은 실로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기호의 운명을 면할 수 없다네. 그래서 진짜배기 아는 자는 무식에 있을지 몰라. 평생 농사만 지어온 늙은 농민이 기억 니은을 모르고 하늘천 따지 몰라도 기억 니은의 언어 이전과 하늘천이라는 글자 이전의 하늘에 대해서는 서로 합치되고 있어. 거기에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가 있게 되겠지. 주역의 역(易)도 농민의 사상 아닌가.
김형수 = 마치 시처럼 자유분방하십니다. 시는 언제나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찰나에 대한 실감을 포착하지만, 그 속에 담긴 화자의 세계를 구성합니다. 일상의 위기에 대한 반응이지만 일상을 지속시키는 물체이기도 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고은 = 시인이란 뭔가. 이런 세계 속에 드나드는 주술의 생명체가 아닌가. 나도 되고 나 없는 니힐이 되기도 하고 시대의 삶과 죽음에도 누구의 가슴 속에도 들어가며 세계의 율동을 연주해주는 악기 아닌가. 한 인간이 이 세계에 왔다가 몇십 년 동안 머물면서 세계의 변화무쌍한 삶의 자취를 숨 쉬고 먹고 그런 다음 그 삶의 마지막 꽃인 죽음을 맞이하는 일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리는 세월도 살고 역사도 살고 나로 살고 나 밖의 세상으로 살다가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마치는 것 아닌가. 이 무상(無常)만이 현실이고 그것 이외에는 오로지 한 개의 생각일 따름 아닌가.
김형수 = <만인보>의 ‘선제리 아낙네들’에서 보여주신 풍경은 인간세상의 묘사에 대한 한 절정 같습니다. 하늘 어디엔가 기러기들의 세상이 있고, 대지 어디엔가 인간의 세상이 있는데, 밤 기러기가 드높이 날며 추운 땅에 떨어뜨리는 소리처럼 인간 세상에서도 개 짖는 소리 사이로 ‘까 여 다 여’ 소리를 떨어뜨립니다. 얼마나 꿈속 같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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