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종철/김석종/고영재

[김종철의 수하한화]후쿠시마와 상상력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어느새 또 한 해가 저물고 있다. 금년에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적어도 내게는 2011년은 후쿠시마 사태로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해가 될 것 같다. 후쿠시마 핵 사고는 한마디로 묵시록적 재앙이었다. 그것은 일시에 인간생존의 근본토대를 파괴하고, 무고한 민중의 삶을 뿌리에서부터 망가뜨렸다. 더욱이 방사능에 의한 대기와 해양의 오염상황은 수습전망이 아직도 불투명한 채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지난 3월, 사고 직후부터 나는 다른 일이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비통한 심정을 금할 수도 없었지만, 원자력이란 첨단기술의 결말이 결국 이런 것인가, 한번 중대사고가 터지면 모든 것을 허사로 만들어버리는 이 기술의 배후에 있는 것은 어떠한 정신구조인가, 그것은 도덕적 니힐리즘이 아닌가 등등, 생각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나는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외롭게 싸워온 반핵활동가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관련 문헌과 자료를 열심히 찾아서 읽었다. 그리고 내가 알게 된 것을 이웃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글과 강연의 형식으로 많은 발언을 해왔다. 그럼에도 아직도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은 천박하고, 따라서 제대로 된 발언을 못했다는 미진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후쿠시마 사고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선진국에서 터졌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원자력이라는 것은 군사용이든 민수용이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제어능력을 벗어나는 가공할 기술임이 명확히 드러난 것이다. 물론 1979년의 미국 스리마일 핵발전소 사고와 특히 1986년의 소련 체르노빌 핵폭발 사고를 통해서 인류사회는 원자력이 더 이상 용납돼서는 안될 괴물임을 이미 분명하게 학습을 했었다. 그러나 군사독재체제를 깨고 어떻게 민주화를 실현할 것인가가 최대 현안이었던 당시의 한국사회에서는 원자력은 부차적인 관심사일 뿐이었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동안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대다수 시민들이 의식하기도 전에 어느새 이 나라는 세계에서 손꼽는 핵발전소 과밀 국가가 되었다. 그렇다면 후쿠시마 사태로 국토의 절반 가까이를 사실상 상실했다고 볼 수 있는 일본의 절망적인 상황은 결코 남의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우리 사회에 지금 원자력에 관한 긴장된 의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현상의 원인이 일차적으로 언론의 직무유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경향신문이나 한겨레 같은 ‘진보’ 매체조차 후쿠시마 사고 직후 잠깐 동안을 제외하고는, 도쿄 특파원이 보내오는 간단한 기사 이외에 원자력에 관한 집중된 논의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원자력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그것은 세계 어디에서나 정부와 업계, 어용언론, 어용학자들이 늘 진실을 끊임없이 왜곡하고 은폐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사고가 나기 전에는 핵발전소의 절대적 안전성을 장담하다가, 막상 사고가 터지면 방사능이란 게 자연에도 있는 것이므로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태연히 말한다. 후쿠시마 사태에서도 이 ‘거짓말의 공식’은 변함없이 되풀이되었다. 실제로, 막대한 돈을 들여 엉터리 홍보와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핵발전은 존립 불가능한 시스템이다. 안전성이나 경제성은 물론, 환경과 윤리적 문제 등 어떤 측면을 보더라도 핵발전 시스템을 정당화할 수 있는 합리적인 논거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거짓의 장막을 걷고, 진실을 심층적으로 집요하게 파헤치는 미디어가 없다. 언론이 말해주지 않는 이상, 일반 시민들이 진실을 접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낮을 수밖에 없다. 언론의 이러한 직무유기는 아마도 원자력이란 테마가 미디어소비자들의 시선을 끌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관계기관이나 업계로부터의 은밀하거나 노골적인 회유·압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지도 모른다.

후쿠시마 사태와 관련해서 내가 가장 궁금하게 생각해온 것은, 이 엄청난 참사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지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많을 텐데 어째서 공개적으로 사죄하고 벌을 받겠다는 개인이나 기관이 없는가 하는 사실이다. 사고 직후에, 사무라이의 전통을 이어받아 어쩌면 할복을 하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그것은 나의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현실은 내가 예측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대표적인 예는 아흔 살이 넘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였다. 그는 1954년, 국회에서 처음 원자력개발 예산안을 입안·통과시킨 주역으로, 말하자면 일본 핵산업의 정치적 대부인 셈이다. 그런 인물이 후쿠시마 사고에 대해 단지 “유감천만”이라고 가볍게 언급하고는 향후에도 원자력이 계속돼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고 있었다. 그동안 원자력업계의 대변인 노릇을 해온 일본의 주류언론이나 어용학자들도 별로 다르지 않다. 엄청난 사태 앞에서 대체로 기회주의적인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상당수는 오히려 산업경쟁력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논리를 다시 꺼내들고 원자력의 포기가 불가하다고 말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원자력 마피아들’에 의한 광범한 인명손상과 자연파괴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 혹은 테러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범에 준하는 책임을 추궁당하고,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들 자신이 스스로 사죄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이들에 대한 책임을 철저히 묻는 언론도 없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가장 불가사의한 것은, 후쿠시마라는 파국적인 재앙을 보면서도 도리어 이것을 한국이 원자력강국으로 도약할 기회로 삼자는 한국정부와 원자력관계자들의 정신구조이다. 이것을 단지 비윤리적인 태도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이 정신구조는 오늘날 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정신적 황폐화·빈곤화의 노골적인 표출에 불과한 것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사태로 인해 우리는 타자의 운명에 대한 근원적 관심-상상력-을 결여할 때, 한 사회가 어느 정도까지 추하고 짐승스러운 사회로 떨어질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수하한화’는 나무 아래서 나누는 한담을 뜻한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