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릴케는 노래했습니다. 사랑은 햇살처럼, 꽃보라처럼 또는 기도처럼 온다고. 그런데 앙리루소의 저 그림 ‘뱀을 부리는 여자’(1907년, 캔버스에 유채, 169×189.3㎝, 오르세 미술관, 파리)를 보면 사랑은 달빛을 타고 오는 것 같습니다. 저 그림에서 달이 없다면…? 숲은 얼마나 적막했을까요? 여인은 피리를 불지도 않았을 거고, 그렇다면 뱀도 춤을 추지 않았겠지요?
그나저나 이번 추석에 보름달은 보셨나요,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비셨나요? 달을 보면, 꽉 찬 보름달을 보면 괜히 기원하게 되지요? 루소의 그림을 보니 그 기원은 뜨거운 눈물이 빚은 결핍의 절규가 아니네요. 보름달이 자극하는 것은 심장이어서 거기서 생겨나는 기원은 심장의 두근거림에 걸맞은 것입니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짝을 찾아가고 싶은 거지요. 그래서 보름달은 관능입니다. 달밤과 뱀은 그렇게 연결됩니다.
달은 생명일까요, 아닐까요? 보름달을 망원경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해질녘부터 해진 이후까지. 해질녘 오렌지빛이었다가 노란빛이 되었다가 마침내 백색의 빛으로 변한 달은 신비 그 자체였습니다. 분화구까지 다 보이는데, 물론 토끼도, 계수나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생명체도 없다고 실망하게 되는 게 아니라 우주는 거대한 생명이고 거대한 신비라고 탄성을 지르게 되는 건 왜일까요? 우리가 생명이라 생각하는 개체적 생명만이 생명인 게 아닌 게지요.
아이를 보면 엄마를 알 수 있듯 밀물과 썰물, 그리고 풀벌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면 달의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달밤 풀벌레들의 노랫소리, 들어보셨습니까? 풀벌레들의 아카펠라는 달밤이 마련한 생명의 잔치입니다. 봄에는 개구리들부터 시작해서 두꺼비들이, 여름엔 매미들이, 요즘엔 귀뚜라미들이 합창을 하지요?
달밤에 사랑을 나누며 생명을 잉태하는 모든 존재는 달이 낳은 달의 아이들입니다. 그러니 달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어머니입니다.
앙리 루소의 그림을 보십시오. 달밤의 숲입니다. 강이 흐르는 것으로 봐서 열대의 낙원이지요? 거기 한 여자가 있는데, 눈만 형형한 그녀는 온통 까맣습니다. 더 이상 순진하지도, 무구하지도 않은 검은 이브란 생각 들지 않으십니까? 애욕이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기만 한 낙원의 이브가 피리를 불고 있습니다. 피리를 불고 있는 여인이 스카프처럼 감고 있는 것은…, 아, 뱀이네요.
뱀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어찌 달빛 가득한 숲에서 피리를 불 수 있겠습니까? 뱀을 두려워하면 피리를 불지 못합니다. 아십니까? 뱀은 물어뜯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춤추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검은 이브는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검은 이브의 피리소리에 맞추어 춤추는 뱀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위험한 열정이 있어야 삶의 춤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생명의 나무를 타고 노는 뱀, 풀밭 위에 있는 뱀, 여인의 목에 걸려 있는 뱀, 모든 뱀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것은 검은 이브가 피리를 불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달밤이 그저 어둡기만 하지 않고 환합니다, 몽환적입니다.
원래 루소는 세관원이었지요? 낮에는 세금 계산을 하는 성실한 일상인이었으나 아마 그 일상을 지켰던 것은 밤의 환상, 그림이었나 봅니다. 루소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운 적도 없고, 그래서 작가 그룹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908년, 피카소가 그를 발견해 주기까지는 거의 무명이었던 거지요. 그럼에도 평생 그림을 그렸으니 그림을 진짜진짜 좋아한 거지요. 그에게 그림은 본능이고 꿈이었습니다. 꿈 같은 저 그림을 보고 있으면 차라투스트라가 부르는 ‘밤이 노래’가 올라옵니다.
“밤이다. 이제 솟아오르는 샘물은 한층 더 소리를 높인다. 나의 영혼 또한 솟아오르는 샘물이다. 밤이다. 이제야 사랑하는 자들의 노래 모두가 잠에서 깨어난다. 나의 영혼 또한 사랑하는 자의 노래다. 내 안에는 진정되지 않는 어떤 것, 진정시킬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다. 때가 되니 그것 또한 나서서 사랑을 속삭인다.”
진정되지 않는 그 에너지가 피리를 불게 만듭니다. 피리를 부는 자는 밤의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달밤이 환합니다. 꿈이 달밤을 완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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