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식100년

[주영하의 음식 100년](26) 간략한 20세기 음식사

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예전엔 … 골목마다 달랐던 ‘요맛조맛’
ㆍ요즘은 … 어딜가나 똑같은 ‘이맛그맛’

“청진동 명물은 부랑자들이 좋아하는 내외주점이다. 호수 육백호에 내외주점만 열한 집이나 되고 보니, 이 동리의 대표적인 명물로 당당하지 않습니까. 이 당당한 명물이 작년에는 삼십여 호, 재작년에는 사십여 호나 있었답니다. 참 그때에야 굉장하였겠지요. 열 집에 내외주점 하나씩! 장관이었겠습니다. 내외주점의 역사를 캐어보면 옛날에는 이름같이 아낙네들이 술상만 차려 내보내고 내외를 착실히 하던 술집이었습니다. 이것이 차차 개명하여져서 내외법이 없어지고 술상 옆에 붙여 앉아 웃음을 팔면서 노래를 팔더니 결국에는 매음까지 하게 되어 요사이에는 내외주점 하면 밀매음이 연상되게 되었습니다. 내외주점을 찾아가면 으레 기름때가 꾀째재 흐르는 젊은 계집이 한둘씩 있지요. 이 계집들이 이제 말한 그것인데 너무 풍기를 괴란하므로 경찰서에서는 내외주점 허가를 안 내어 준답니다. 이 까닭으로 해마다 해마다 내외주점이 줄어들어 가서 요사이에는 이미 서산의 비경에 들었답니다. 이 동의 명물 내외주점도 칼 찬 나리 세력에는 꿈쩍을 못하는 모양입니다.”

이 글은 1924년 7월10일자 동아일보의 ‘내동리명물’에 실렸다. 오늘날 서울 중구 청진동에서 이름을 날렸던 내외주점의 모습을 짐작케 해준다. 1900년대 이래 경성의 식당업은 세계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일본요리옥이 지금의 용산과 명동 일대에 자리를 잡았다면, 청요리옥은 덕수궁 남쪽에서 남대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이에 비해 조선요리옥은 종로 이북에서 성업을 했다. 물론 각종 국밥집이나 선술집들이 북촌 일대는 물론이고 멀리 신당동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그만큼 사대문 안의 한양에 비해 경성이 그 도시적 면모를 확장시킨 결과였다.

비록 일본의 도쿄와 오사카를 경유해 경성에 도착했지만, 카페의 붐도 1920~30년대 경성의 또 다른 한 면모였다. “카페-랑자국(娘子國)에서는 소시민국 공주들의 ‘스위하-트’들을 흘려다가 ‘칵텔’과 ‘폭스트로트’에 소위 ‘곤약구’를 맨드는 한편, 자막대기를 잠짐에도 휘두르며 꿈속에서도 눗게 술 취해 드러오는 남편을 벼르는 녀성들은 그동안 이만저만하게 남편과 쟁의를 해보지 안은 게 아니지만, 33년에는 ‘매담’ 병대를 조직하야 몽둥이를 제각기 들고 카페- 문전에서 공략을 취할 것이다. ‘카페-’광들 카페- 출입에 ‘매담’의 몽둥이를 당해내일 전략을 생각하엿는가?” 이 글은 1933년 1월15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33년식 가정쟁의(1) 카페-성곽점령’이란 제목의 내용이다. 그러면서 카툰으로 카페 문 앞에 몽둥이를 든 부인들이 도열한 모습을 그렸다.

지금은 옛 모습을 잃어버린 청진동 해장국 골목./1920~30년대 카페광을 풍자한 신문의 삽화./서민들이 즐겨찾는 이태원 식당가의 밤풍경.(왼쪽부터)

레코드에서 흘러나오는 ‘폭스트로트’는 1917년쯤 미국에서 생겨난 댄스음악이다. 이것이 일본으로 들어와서 엔카가 되었고, 그것이 다시 식민지조선에서 대유행했다. 칵테일 안주 ‘곤약구’는 구약(구蒻)의 일본식 발음 표기로 구약나물의 뿌리를 가루로 만들고 여기에 석회유를 섞어 끓여서 만든 음식이다. 원래 중국의 당나라 때 유행했던 음식인데 10세기 때 그 조리법이 일본열도로 전해졌다. 하지만 1933년에 카페에 나온 곤약구는 구약뿐만 아니라 다른 곡물가루까지 첨가해 개발된 일본 근대의 산물이었다. 이것이 도쿄와 오사카의 카페에서 안줏거리로 등장했고, 그것이 조선의 카페에 그대로 옮겨졌다. 비록 다방도 경성의 여러 곳에서 서양 클래식 음악과 함께 문인과 지식인을 매료시켰지만, 카페 역시 내외주점이나 선술집과 다른 묘미를 식민지 남성들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오로지 도시의 모던보이와 모던걸에게만 한정됐다. 더욱이 1939년부터 독일의 전쟁 야욕이 시작되자, 조선총독부는 절미운동을 시작했다. 이미 1920년대부터 농어촌은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죽으로 보릿고개를 넘기고 있었다. 비록 생활개선운동이란 이름으로 조선총독부는 농어촌의 증산에 박차를 가했지만, 사정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일반국민으로서는 우선 미(米)에 대한 절미사상의 함양이 지극히 중요한 부분인 것이 틀림없어서 미를 원료로 하는 주류의 제석(制石) 제한과 같은 조치 우(又)는 반미(飯米)로서의 대용식의 여행(勵行)에 또한 충분히 고려할 것이 잇다고 아니할 수 없어서 증산책의 확립과 병행하야 절미의 여행은 시국하 특히 필요할 것으로 보여지고 잇다.”(동아일보 1939년 8월1일자)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절미운동은 쌀 이외의 곡물로 밥을 짓도록 하는 혼식 장려로도 이어졌다. 심지어 밀가루를 이용해 쌀알을 만들어 대용식으로 먹도록 권장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혼란한 틈새에서 쌀값은 하늘보다 더 높이 솟았다. 미 군정청에서는 1946년 6월 미국 잉여농산물의 피점령지역 구호원조라는 명목으로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도입했다. 이때 들여온 밀은 서울과 인천 시민들에게 쌀 한 홉과 함께 매일 120g씩 배급되었다. 이때 설렁탕에는 밥이 들어가지 않고 밀국수만 들어갔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미국밀이 공짜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량으로 들여올 수는 없었다. 결국 보릿고개 때가 되면 절미운동을 계속해서 펼쳐야만 했다. 1949년 12월20일 서울시 경찰국에서는 “일반대중음식점, 식당, 요정 등에서는 백미 사용을 엄금하고 밀가루·메밀 등 잡곡을 사용하도록 지도 장려할 것”을 지시했다. “백미로 엿·떡 등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떡국집도 취체(관리)하여 미곡 출처를 규명할 것”이라는 지시도 내렸다. 심지어 “밀주 제조의 근절을 기하고 음식점·노점·병술집·식량상을 취체하여 밀주를 발견하여 백미 출처를 추궁할 것”을 경찰에게 명령했다. 한국전쟁은 식량 부족을 극단으로 몰고 갔다. 미군이 버린 쓰레기에서 먹을 만한 것을 골라 만든 꿀꿀이죽을 먹고 연명한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1954년 6월이 되면 수복된 서울에는 음식점 수가 전쟁 전보다 무려 3~4배로 는다. 다방(288곳), 요정(236곳), 대중식당(955곳), 목노집(675곳)이 성업을 했다. 피란민이 모여들면서 서울에 인구가 집중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부익부의 음식점 영업이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가족./입맛의 일반화를 상징하는 패스트푸드./외국인들에게 선보인 한식 세계화 요리 전시회.(왼쪽부터)

한국전쟁 이후 미국 정부는 그들의 농부들이 과잉 생산한 농산물을 강제로 사도록 강요했다. 그 근거는 ‘MSA 402조’란 법이다. MSA는 상호안전보장법을 가리킨다. 1954년에 기존의 것을 개정하면서 원조를 제공받는 국가가 원조액의 일정 비율로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구매하도록 한 규정인 402조가 삽입되어 생겨난 이름이다. 사실 미국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농촌의 생산시스템을 대량체제로 전환시켰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과잉 생산이 발생했다. 마침 전쟁에 참전하면서 군인들 식량으로 이것들이 소비되었다. 전후에는 서유럽에 군사동맹을 내세워 농산물 수입을 강요했다. 한국전쟁도 잉여농산물의 또 다른 소비처였다. 하지만 휴전 이후 새로운 조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생겨난 법이 ‘MSA’였고, 다시 강제 구매조항을 넣었다. 아울러 1954년 7월 미국의회는 MSA를 개정해 PLO480법(통칭 잉여농산물처리법)을 성립시켰다. 이 법에는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원조국의 빈곤층 원조, 재해구제 원조, 그리고 학교급식에는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1955년 이후 한국의 국민학교에 식빵과 밀가루가 무상으로 공급되었다. 교사들 손에도 악수 그림이 그려진 원조 밀가루 포대가 쥐어졌다. 이로부터 밀가루를 재료로 한 수제비·칼국수·잔치국수와 같은 음식이 가정에서는 물론이고 식당에서도 끼니를 해결하는 데 쓰였다. 더욱이 PLO480법에는 구입한 잉여농산물을 효과적으로 소비시키기 위해 영양교육을 시행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당시 숙명여대 교수였던 김병설은 쌀의 양을 줄여서 영양가를 높이자는 주장도 펼쳤다(경향신문 1955년 11월4일자). 비록 주식인 쌀 조리법에 대한 연구를 강화하자는 주장을 그는 내세웠지만, “면류를 장려하여 면요리법을 더욱 연구하여 칼국수, 수제비 같은 것의 조리법을 점차적으로 개선하여 좀더 영양가가 높은 합리적인 조리법을 연구하여 봅시다”라는 제안도 빠트리지 않았다. 미국의 잉여농산물 전입은 밀가루·설탕·면직물의 삼백산업이 경제의 중심축이 되도록 만들었다. 당연히 대한민국의 식품산업도 제분업과 제당업을 통해서 그 기반을 다졌다. 1960년대에 들어오면 그러한 사정은 더욱 강화되었다. 인스턴트 라면이 1963년에, 인스턴트 칼국수가 1969년에 상품으로 나왔다. 특히 제3공화국이 줄기차게 추진한 혼분식 장려운동은 밀가루 음식의 소비를 더욱 부추겼다.

1980년대가 되면 한국 경제의 성장만큼 먹고 마시고 노는 산업도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다. 1983년 소설가 겸 언론인 최일남의 지적은 지금도 따끔하다. “산업화가 몰고 온 일일생활권까지는 좋았으나, 그 바람은 사람들의 사고 또는 지금 말하고 있는 음식문화까지도 동질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은 감이 없지 않다. 어디를 가나 설렁탕·냉면·비빔밥이 판을 치고 손님대접을 위해서는 서울이나 지방이나 불고기를 으뜸으로 친다. 그것이 편리한 교통 탓인지 아니면 무엇이든 같은 빛깔로 색칠해 놓기를 좋아하는 산업사회가 안겨다준 결과인지는 몰라도 어느 도시에 가든 음식이 똑같다. (중략) 그래서 서서히 4천만 입맛이 일체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발전도 좋고 변모도 좋지만, 도시의 개성이 무시된 이런 식의 획일화는 딱 질색이다.”(경향신문 1983년 11월16일자)

더욱이 음식의 세계화 체제는 음식업을 외식산업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1950년대 이후 미군부대를 통해서 전달된 미국식 피자·햄버거·소시지·콜라 따위가 누렸던 특수한 권력은 1980년대 이후 더 이상 한반도에서 특수하지 않게 되었다. 여기에 1970년대 초반부터 이루어졌던 각종 육류의 수입은 날이 갈수록 증가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은 육류 소비와 함께 평행선을 그으면서 고조되었다. 그러자 도시의 번화가에는 생선 횟집과 스시집이 줄줄이 자리를 잡았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인의 외국관광 경험은 2000년 이후 한국의 어느 도시에서도 외국음식을 본토처럼 맛보게 만들어주었다. 그러자 한식을 세계화하자는 주장이 구호를 넘어서 정책으로 구현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한국의 농어촌과 농수산물은 100년 동안 앓아온 큰 병으로 인해 이제 죽을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연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