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석|전농 강진군 정책실장
다음(daum)에 ‘이정희’를 입력하면 많은 ‘이정희’가 나옵니다. 대학교수, 현대무용가, 연극인, 스포츠 선수, 기업인 등 다양합니다. 흔한 이름이죠. 제 인생에는 이정희가 두 명 있습니다.
학생시절 같은 과에 이정희 선배가 있었습니다. 1학년 때, 한 시대를 풍미한 민중가요 ‘가야 하네’를 처음 가르쳐준 선배입니다. 그는 모르는 노래가사가 없었습니다. 그는 후배들에게 가사를 불러주는, 말하자면 가사 도우미였습니다. 가사 도우미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노래의 흐름과 분위기, 노래하는 사람의 감정상태까지 파악해 때론 축약하고, 때론 음률을 섞어가며 추임새처럼 넣는 고난도 기술의 소유자였습니다.
고향이 부산이었고 재수를 했던 것 같고 살집이 풍부하고 얼굴에 여드름이 많았습니다. 담배를 피우다 끊었던 것 같고 술을 먹어도 먹어도 취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전라남도에는 저를 낳아준 어머니가 있고 서울에는 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잠시 그의 포근함에 취해 이게 사랑이 아닐까 혼자 뒤척인 적도 있습니다.
그는 거의 모든 후배의 운동 고민, 진로 고민을 나누는 상담원이었습니다. 학교 앞, 지금은 없어진 것이 분명한 불새라는 카페에서 세상을 다 가질 만큼 당찬 결의로 맹세를 했습니다. ‘서서 죽더라도 무릎 꿇고 타협하지 말자’는, 조국해방 투쟁 48년(해방 이후 자주화·민주화 운동을 기리는 학생운동식 연호) 언저리쯤 되는 어느 해에 우리는 이 땅의 청년학도로서 의당 밟아야 하는 통과의례를 치렀습니다. 따뜻하고 신념있는 그는 그만큼 따듯하고 덜 신념있는 제 동기와 결혼했습니다.
요 며칠 통합진보당 이정희 공동대표가 화제의 중심입니다. 저는 그와 담소를 나눈 적이 없습니다. 지난해, 화순에서 군수 후보로 출마한 선배 선출대회에 참가해 악수를 나누었지만 그가 그것을 기억할 리 없습니다.
그는 말을 번드르르하게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실과 진심이 그가 하는 말무게의 전부입니다. 그는 ‘안녕하십니까? 당원입니다’, 이 말보다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인사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늘 마른자리에 있지 않고 진자리에 있었습니다. 용산참사 현장, 쌍용차 투쟁 현장, 한진중공업, 제주 구럼비에 항상 있었습니다. 난장판 국회에서는 온몸을 던져 서민의 삶을 대변했고 야권 단일화 협상에서는 자신의 지역구를 경선지역으로 포함해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진보당 통합문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될 때까지 설득하는 뚝심으로 어려움을 헤쳐 왔습니다. 그는 당 대표로서 당직자를 대하는 자세에서 지위나 나이, 출신, 이력을 묻지 않고 존중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그의 팬들이 참 많습니다.
서울 관악을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되기를 기원하는 ‘이정희를 지켜주세요’ 동영상을 보며 가슴 부여잡고, 관악에 아는 사람이 없어 절망했습니다. 그가 승리했다는 말에 저녁에 삼겹살에 소주를 먹었고, 그의 얼굴 밑에 여론조작이라는 무시무시한 방송자막이 걸려 있을 때 우리는 비가 오는데도 아무 말 없이 종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강진 끝자락 마량으로 지인을 만나러 가면서 그가 출연한 <이슈 털어주는 남자>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들었습니다. “사건이 터지자 사퇴를 생각했고… 그것은 개인적으로 아주 쉬운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 대표로서 야권연대의 성공을 위해 한 몸을 바칠 것이고 그것이 국민의 명령이라 믿습니다.” 잠시 같이 듣던 당 사무국장이 눈물을 훔쳤던 것 같고 우리는 마량에 도착해 호남 정치권력이 바뀌어야 한다고, 비료 반값을 실현하기 위해 통합진보당에 힘을 실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민주당의 전대협 출신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그의 사퇴를 주장하는 것을 보고 잠시 청년 시절, 신념있고 따뜻했던 선배 이정희를 생각했습니다.
진보정당은 기존 정당과는 다른 차원의 도덕적 잣대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고, 그것이 너무나 가혹하게 정치적 이해와 당리당략적 계산과 덧칠되어 해일처럼 몰려오는 것을 볼 때, ‘무릎 꿇고 타협하느니 서서 죽겠다’는 20년도 훨씬 지난 각오를 생각했습니다.
선배 이정희가 가르쳐준 ‘가야 하네’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가야 하네 /우리 모두 어깨 걸고 /억압과 착취 모두 깨부수고 /투쟁으로 우리 하나 되어 /사랑 가득한 평등의 세상으로.”
학생시절 같은 과에 이정희 선배가 있었습니다. 1학년 때, 한 시대를 풍미한 민중가요 ‘가야 하네’를 처음 가르쳐준 선배입니다. 그는 모르는 노래가사가 없었습니다. 그는 후배들에게 가사를 불러주는, 말하자면 가사 도우미였습니다. 가사 도우미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노래의 흐름과 분위기, 노래하는 사람의 감정상태까지 파악해 때론 축약하고, 때론 음률을 섞어가며 추임새처럼 넣는 고난도 기술의 소유자였습니다.
고향이 부산이었고 재수를 했던 것 같고 살집이 풍부하고 얼굴에 여드름이 많았습니다. 담배를 피우다 끊었던 것 같고 술을 먹어도 먹어도 취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전라남도에는 저를 낳아준 어머니가 있고 서울에는 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잠시 그의 포근함에 취해 이게 사랑이 아닐까 혼자 뒤척인 적도 있습니다.
저보다 두 살 많았지만 살기는 한 20년 더 산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MT를 가면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밥을 했고 누가 다치면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먼저 약국으로 달려가 약을 사왔습니다. 행사 때는 전대처럼 만든 가방을 허리에 항상 차고 다녔습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일을 도왔고 뒤풀이 때는 마지막까지 남아 기어이 먹은 것을 확인하고야 마는 초보 술꾼들의 뒤를 봐주었습니다.
그는 거의 모든 후배의 운동 고민, 진로 고민을 나누는 상담원이었습니다. 학교 앞, 지금은 없어진 것이 분명한 불새라는 카페에서 세상을 다 가질 만큼 당찬 결의로 맹세를 했습니다. ‘서서 죽더라도 무릎 꿇고 타협하지 말자’는, 조국해방 투쟁 48년(해방 이후 자주화·민주화 운동을 기리는 학생운동식 연호) 언저리쯤 되는 어느 해에 우리는 이 땅의 청년학도로서 의당 밟아야 하는 통과의례를 치렀습니다. 따뜻하고 신념있는 그는 그만큼 따듯하고 덜 신념있는 제 동기와 결혼했습니다.
요 며칠 통합진보당 이정희 공동대표가 화제의 중심입니다. 저는 그와 담소를 나눈 적이 없습니다. 지난해, 화순에서 군수 후보로 출마한 선배 선출대회에 참가해 악수를 나누었지만 그가 그것을 기억할 리 없습니다.
그는 말을 번드르르하게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실과 진심이 그가 하는 말무게의 전부입니다. 그는 ‘안녕하십니까? 당원입니다’, 이 말보다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인사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늘 마른자리에 있지 않고 진자리에 있었습니다. 용산참사 현장, 쌍용차 투쟁 현장, 한진중공업, 제주 구럼비에 항상 있었습니다. 난장판 국회에서는 온몸을 던져 서민의 삶을 대변했고 야권 단일화 협상에서는 자신의 지역구를 경선지역으로 포함해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진보당 통합문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될 때까지 설득하는 뚝심으로 어려움을 헤쳐 왔습니다. 그는 당 대표로서 당직자를 대하는 자세에서 지위나 나이, 출신, 이력을 묻지 않고 존중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그의 팬들이 참 많습니다.
서울 관악을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되기를 기원하는 ‘이정희를 지켜주세요’ 동영상을 보며 가슴 부여잡고, 관악에 아는 사람이 없어 절망했습니다. 그가 승리했다는 말에 저녁에 삼겹살에 소주를 먹었고, 그의 얼굴 밑에 여론조작이라는 무시무시한 방송자막이 걸려 있을 때 우리는 비가 오는데도 아무 말 없이 종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강진 끝자락 마량으로 지인을 만나러 가면서 그가 출연한 <이슈 털어주는 남자>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들었습니다. “사건이 터지자 사퇴를 생각했고… 그것은 개인적으로 아주 쉬운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 대표로서 야권연대의 성공을 위해 한 몸을 바칠 것이고 그것이 국민의 명령이라 믿습니다.” 잠시 같이 듣던 당 사무국장이 눈물을 훔쳤던 것 같고 우리는 마량에 도착해 호남 정치권력이 바뀌어야 한다고, 비료 반값을 실현하기 위해 통합진보당에 힘을 실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민주당의 전대협 출신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그의 사퇴를 주장하는 것을 보고 잠시 청년 시절, 신념있고 따뜻했던 선배 이정희를 생각했습니다.
진보정당은 기존 정당과는 다른 차원의 도덕적 잣대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고, 그것이 너무나 가혹하게 정치적 이해와 당리당략적 계산과 덧칠되어 해일처럼 몰려오는 것을 볼 때, ‘무릎 꿇고 타협하느니 서서 죽겠다’는 20년도 훨씬 지난 각오를 생각했습니다.
선배 이정희가 가르쳐준 ‘가야 하네’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가야 하네 /우리 모두 어깨 걸고 /억압과 착취 모두 깨부수고 /투쟁으로 우리 하나 되어 /사랑 가득한 평등의 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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