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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100년

[주영하의 음식 100년](17) 생복회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조선요리옥은 1920~30년대 대단히 번창했다.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1940년대에도 그 사정은 변함이 없었다. 해방 이후 민생이 최악의 상태였지만, 고급요정은 오히려 성업을 하였다. 결국 1948년 10월29일에 국회의원 김상돈이 ‘고급요정봉쇄’를 법령으로 제안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한국전쟁이 한반도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던 1951년 12월1일에도 정부에서는 위생감찰단까지 조직하여 고급요정의 음식물을 간소화시키고, 요리 가격도 통제하였다. 당시 자료를 통해서 요정에서 판매되었던 요리 종류를 추정할 수 있다. 그 중에서 ‘한국요리’로 분류된 요리와 가격을 살펴보자. “신선로 1만1천원, 맥운(매운탕) 1만1천원, 생복(生福) 8천원, 닭쁘꿈(닭볶음) 8천원, 게활기 7천원, 도미회 8천원, 홍초 1천원, 약식 8천원, 생밤 8천원, 이채 1만1천원, 식회(식해) 6천원, 과실 6천원, 건포 6천원, 새우덴통 8천원, 생선전어 8천원, 란(卵)알싸므(알쌈) 8천원, 천귀라류 6천원.”(동아일보 1951년 12월2일자)

요리 이름만 보면 요사이 이름으로 옮기기도 어려운 것들이 많다. 홍초·이채·새우덴통·천귀라류 따위는 그 실체를 알기 어렵다. 다만 생복은 그 한자로는 뜻이 분명하지 않지만, 전복으로 만든 요리일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생복은 한자로 ‘生鰒’이라고 적기 때문이다.

간혹 생복을 독이 있는 복어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생복은 익히거나 말리지 않은 전복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만 그 한자를 잘못 적어 ‘生福’이라 쓴 것으로 보인다. 그 가격이 닭볶음이나 도미회와 같은 8천원이니 살아있는 전복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특히 12월1일에 내린 정부 조치이니 전복 값이 비싼 계절에 해당되는 가격이라 하겠다.

생복이라고 적은 요리 이름의 실체는 생복회일 가능성이 많다. 생복회 조리법은 이용기가 1924년에 펴낸 조리서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나온다. “생복을 조갑이(조개껍질)에 떼서 정이 씻어 훔치고 가루 굵게 썰어 접시에 담고 잣가루를 뿌렸다가 초장에 먹으면 맛이 갑등(甲等) 가나니 아무쪼록 굵게 썰지니라. 생복 속에 푸른 고락이 있나니 통으로 가루 썰어서 생복 옆에 놓았다가 먹으면 맛이 좋으니라.” 그런데 이 책 이전의 조리서에서는 생복회에 관한 기록이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사실 조선후기 궁중음식의 종류를 기록한 진찬·진연 관련 의궤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음식이 전복초이다. 가령 조선왕조 제23대 왕 순조 29년(1829) 음력 2월12일에 있었던 궁중연회 과정을 기록한 <진찬의궤>에는 전복초 다섯 가지가 차려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성신문 1901년 6월19일자에 실린 전복통조림 광고

그렇다면 전복초는 어떻게 만드는 음식이었을까? 홍선표가 집필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1938년 1월4일자 조선일보에서는 전복초를 수라상에 오르는 찬수로 꼽았다. “전복을 물에 불린 뒤 가장살이를 도리어 내고 얄게 저미고 푹 물으도록 삶어서는 조흔 진간장을 치고 비치 까마케 다시 한번 끄립니다. 그 다음엔 쇠고기를 곱게 다저서 양념해 너코 파 마늘을 곱게 다저서 조금 너코 설탕을 치고 해서 간을 마칩니다.” 한여름에 채취한 전복을 말려 두었다가 겨울에 물에 불려서 전복초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요사이와 달리 조선시대 전복은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식재료였다. 서유구(1764~1845)는 <난호어목지>에서 “강원도와 고성 등지에서 나는 놈은 껍질이 작고 살이 메마르며, 울산·동래·강진·제주 등지에서 나는 놈은 껍질도 크고 살이 두텁다”고 적었다. 비록 크기가 작았지만, 평안도 진남포 앞바다나 함경도 원산 앞바다에서도 채취되었을 정도로 한반도의 삼면 바닷가는 전복의 산지였다.

날 것을 생복이라고 했다면, 찐 것은 숙복, 말린 것은 건복·명포·회포라고 불렀다. 정약전(1758~1816)은 <자산어보>에서 전복은 말려서 포로 만들어 먹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보았다.

이렇게 말린 전복은 사계절 내내 유통되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경상북도 상주에 사는 사람이 19세기 말에 적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시의전서·음식방문>에서는 전복을 이용한 음식이 많이 나온다. 어채에는 흰 파와 미나리, 그리고 생선과 함께 전복과 해삼이 재료로 쓰였다.

전복이 주재료인 음식으로는 전복숙·전복쌈·전복다식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전복숙 만드는 방법을 살펴보자. “좋은 큰 전복을 삶되 첫번 삶은 물은 퍼 버리고 황육(쇠고기)과 해삼·문어·홍합 등속을 넣어 무르게 고아 건져서 전복을 저미든지 통을 열십자로 잘라서 잘게 어이셔라 파와 마늘 다져서 후춧가루·기름·깨소금·꿀 넣어 삶은 물에 졸여야 좋지 지령(간장)을 치면 맛 같지 못눌고 푼 후에 잣가루를 많이 섞어 뿔고 그릇에 담은 우에 잣가루를 자욱이 색리라 황육은 건져내고 문어 해삼은 잘라 넣고 홍합은 고을 때 다 녹나리라.”

이로 보아 <시의전서>의 전복숙은 곧 전복초임을 확인한다. 동아일보 1934년 9월5일자에서는 전복을 ‘점복’이라 적었다. “생량한 날씨 입맛 돕는 가을음식 연하고 맛있는 ‘점복’ 요리제법”이란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기사에서는 점복전골·점복장아찌와 함께 점복찜 조리법을 소개하였다. 일명 ‘점복초’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이것이 아마 점복요리에 제일 첫째 자리를 점령하는 요리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조선후기에는 생복보다 말린 전복을 주재료로 사용하였다. 당연히 생복은 유통 과정에서 안전을 담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정은 1900년대가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황성신문 1901년 6월19일자에 전복이 통조림에 담긴 광고가 나온다. 지금의 서울 종로구 광화문 남쪽에 있던 구옥상전이란 가게에서 낸 광고로, 포도주·가배당(각설탕에 든 커피)·우유·밀감주·목과·맥주와 함께 전복이 나온다. 이 광고는 이후에 계속해서 황성신문에 등장했다. 그만큼 신기한 제품이었고 제법 팔렸던 모양이다.

이 통조림전복은 아마도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알다시피 통조림은 1810년 영국의 피터 듀란드가 금속제 용기에 식품을 넣는 방식을 개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통조림 제품은 그 포장 값이 매우 비쌌기 때문에 유럽인들이 장기간 여행을 할 경우에만 이용되었다.

일본에서의 본격적인 통조림 생산은 1877년 홋카이도의 공장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내수용보다는 수출용으로 주로 쓰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미국으로부터 제공된 지원 물자 중 식품들이 통조림에 담겨 왔다. 이 때부터 일본에서 통조림은 식품을 담는 용기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 사정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1920년대 중반 이후에 한반도의 바닷가에서 잡힌 전복은 삶아서 건조시킨 후 통조림에 넣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했던 전복은 주로 제주도에서 올라왔다. 16~17세기 제주도에는 남자 잠수부로서 전문적으로 전복을 채취하는 포작인(鮑作人)이 존재했다. 18세기 이후 해초를 주로 채취하던 잠녀(해녀)가 이 역할도 맡았다. 그래서 전복하면 잠녀를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30년대 전복의 값은 다른 어떤 채취 어물에 비해서 비쌌다. 제주도는 물론이고 전국의 바닷가에 제주도 출신 잠녀가 진출하였다. 일종의 계절제 노동을 위한 이동이 이루어진 셈이다. 특히 제주 잠녀의 육지 진출은 제빙공장이 주요 항구에 가설되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1930년대 초반 제빙공장은 서울 4개소, 부산 2개소를 비롯하여 함흥·영진·포항·양포·마산·통영·여수·거문도·나로도·목포·제주도·군산·인천·대구·대전 등지에 1개소가 있었다.

외수용 통조림전복과 함께 냉동전복이 1920년대 이후 포항을 중심으로 내수용으로 유통되었다. 그래서 제주 잠녀의 경상북도 동해안 진출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 전에 비해 쉽게 생복을 구입할 수 있게 되자, 전복을 오래 살리는 방법이 가정상식으로까지 소개되었다.

“점복이라 많이 생겼는데 한 번에 다 잡수실 수는 없고 두어두자니 상할 염려가 있으시거든 숯을 점복마다 살에다가 붙여 두십시오. 그러면 이 주일은 간답니다.”(동아일보 1934년 9월7일자) 또 생산량이 늘어나자 전복은 여러 가지 음식에 들어가는 부재료로도 쓰였다. 신선로·배추김치·마른안주는 물론이고, 국수비빔에까지 부재료로 전복이 들어갔다. 그야말로 1930년대 중반은 생복의 전성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대량 채취는 전복의 씨를 말리는 일을 발생시켰다.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전복이 보이면 쏙쏙 채취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경상북도 영일만 근처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통조림전복 공장에서는 잠녀들이 잡아들인 전복을 통조림으로 가공하여 중국 만주로 수출하였다. 결국 1932년 5월, 경상북도에서는 ‘채복금지’를 법으로 정할 지경에 이르렀다. “종래와 같이 함부로 잡는다면 얼마 안가서 씨족이 멸하게 되리라는 장사와 당국자의 걱정을 받는 바다 가운데의 전복이 법령으로까지 보호를 입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잡아먹고 살던 제주도의 해녀도 아무리 애를 쓴 대도 못 들어오게 되고 경북도에서는 불원간 도령을 발표하여 금후 2개월 동안은 아무도 못 잡아먹게 금지하리라 한다.”(동아일보 1932년 5월6일)

본래 일제시대 전복 채취는 면허제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방의 도청에서는 면허를 남발하였고, 전복의 씨가 한반도의 바닷가에서 말라갔다. 해방 이후 그 사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결국 풍부했던 전복은 더 이상 일반인의 밥상에 오르기 어려운 식재료가 되었다. 그래도 1940~50년대 고급요정에서 생복회가 간혹 제공되었지만, 1960년대가 되자 그것도 사라졌다. 1980년대까지도 전복은 공동어장이나 마을어장에 치패를 살포하여 그것이 자라면 잠녀나 잠수부가 채취하는 방식으로 초보적 양식을 했다. 당연히 그 생산량은 많지 않았다.

수산학자들의 노력으로 겨우 2000년대가 되어서야 해상가두리 방식으로 양식을 하면서 전복 생산량은 급격하게 증가되었다. 하지만 생복회의 조리법을 아는 이는 드물어졌고, 결국 일본식 생복사시미가 간혹 횟집에서 나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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