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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100년

[주영하의 음식 100년](15) 당면잡채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중국의 당면·일본의 간장·한국의 손맛
ㆍ삼국 합작으로 무친 잔칫상 단골 음식

1923년 10월28일자 동아일보 3면에는 ‘우리 손으로 제조하는 재래지나제 당면·분탕·호면’에 대한 광고가 실렸다. 이 광고를 낸 업체는 경의선 사리원역전에 있던 광흥공창 제면부였다. 대리점으로 평양에 있는 삼정정미소를 별도로 표기해 둔 것으로 보아, 광흥공창은 생산 공장인 것으로 보인다. 이 광고는 그 후 10월28일, 11월5일, 그리고 다음해인 1924년 4월24일과 5월9일에도 같은 신문에 실렸다. 그런데 1939년 5월23일자 매일신보의 사리원 특집면에서 이 광흥공창의 사장이 양재하라는 인물임을 밝혔다. 그 기사에 의하면, 당면 제조의 원조인 광흥공창의 사장 양재하가 사리원상업학교 부지로 1만평을 희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양재하는 “청년 후대에 만지(만주)를 만유하고 돌아와 무엇이나 우리의 손으로 못 만들 것이 없다는 굳은 결심 밑에 현재 광흥공창이라는 당면공장을 20여년 전에 설립하고 종업원이 120명에 연 매상고가 23만원에 달한다”고 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양재하는 1910년대 말 사리원에 당면공장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당면은 그 이름만 보더라도 중국이 원산지인 음식이다. 그렇다고 당나라 때의 음식이라는 뜻은 아니다. 만주족이 아닌 한족의 음식이란 의미에서 호(胡)가 아니라 당(唐)이 붙었다. 하지만 한국인의 입장에서 그것이 당면이지,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결코 당면이 아니다. 오늘날도 중국에서는 이 당면을 펀탸오 혹은 펀쓰라고 부른다. 고구마나 감자의 전분, 곧 녹말의 일부를 뜨거운 물을 붓고 반죽하여 풀처럼 만들고, 여기에 다시 나머지 녹말을 붓고 저으면서 그것을 40도 정도의 더운물을 붓고 치댄다. 이 반죽을 국수틀에 눌러서 뜨거운 물이 담긴 솥에 뽑아낸 다음에 식혀서 햇볕에 말리면 펀탸오, 곧 당면이 만들어진다.

19세기말 조선으로 이주해온 중국인들은 1900년대가 되면 전국의 근대 시가지에 소규모의 만두집이나 호떡집과 같은 중국식당을 개업하였다. 1909년 서울 수표교와 남대문 근처에는 그 이름도 찬란한 아서원·금곡원·대관원·사해루와 같은 간판을 내건 대규모의 중국요리옥이 성업을 하였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의 도회지에도 중국요리옥은 반드시 시가지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을 찾는 조선인 손님들이 즐겨 먹었던 메뉴는 탕수육·양장피·잡채, 그리고 ‘백알’로 불렸던 고량주였다.


비록 1966년의 자료이지만, 1920년대 경성의 중국요리옥에서 먹었던 잡채도 이와 비슷한 조리법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돼지고기·둥근파·당근은 채로 썰고 부추는 4센티 길이로 썰어놓는다. 당면은 끓는 물에 데쳐서 10센티 길이로 자른다. 목이는 물에 불려서 큰 것은 반으로 자르고 잔 것은 그대로 둔다. 마늘과 생강을 채로 썰어서 기름에 볶다가 돼지고기·당근·목이·둥근파·당면·부추의 순서로 넣으며 볶는다. 양념은 당면을 넣기 바로 전에 한다.”(경향신문 1966년 5월23일자, 호기화 여사의 중국요리법 잡채) 이것은 요즘도 화상(華商) 중국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잡채의 조리법이다.

사리원 광흥공창의 양재하 역시 평안도 일대에서 성업을 하고 있던 중국요리옥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이 잡채에 주목한 듯하다. 중국인들이 제조하던 재래식 당면을 조선인인 그가 생산한 것도 조선인 손님들이 주로 먹는 당면 들어간 잡채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1920년대가 되면 전국 각지에 당면공장이 들어섰다. 당시 경성만 해도 중국요리옥이 200군데가 넘었으니 조선인의 당면 소비량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1922년에 열린 조선식량품평회에서는 조선장유·조선소주·약주와 함께 부천의 이계현이 출품한 당면이 조선인 수상자에 들었을 정도로, 당면은 더 이상 재조중국인이 만들지 않았다.

당면 생산이 늘어나면서 당면이 들어간 잡채가 조선 음식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1921년에 출판된 방신영(1890~1977)의 <조리요리제법>에서는 잡채를 나물의 한 종류로 분류하면서 사철음식이라고 적었다. 도라지·미나리·황화채·제육·표고·버섯을 채져 담고 “파를 이겨 넣은 후 간장과 기름과 깨소금 후춧가루를 쳐서 한참 섞어 가지고 기름에 볶아 내어 당면을 물에 불려 삶아 가지고 썰어서 다 함께 담고 잘 섞어서 접시에 소복이 담은 후 알고명 채치고 표고 석이버섯을 물려서 실과 같이 잘게 채쳐 기름에 볶아 가지고 맨 위에 뿌리고 또 잣가루를 그 위에 뿌리느니라”.

그로부터 9년이 지난 1930년 3월6일자 동아일보에서 경성의 동덕여고보 가정선생 송금선은 매우 구체적인 잡채 조리법을 소개하였다. “(가) 도라지를 하루쯤 물에 담가 불려서 잘게 찌저 참기름에 볶아 놓을 것(도라지는 부른 후에 소금 치고 잘 주물러 씻는 것이 좋습니다 (나) 미나리를 칠푼 길이씩 썰어 소금에 잠깐 절였다가 기름에 볶아 놓을 것 (다) 고기와 제육(살코기만 써도 좋습니다)을 잘게 썰어 약념(기름·깨소금·호초가루·파·마눌·사탕)하야 볶을 것 (라) 표고와 버섯 황화채를 물에 불려 칠푼길이씩 잘라 채를 처서 기름에 볶을 것 (마) 목이는 물에 불려 손으로 뜯어 기름에 볶을 것 (바) 석이는 더운 물에 불려 머리까락같이 가늘게 썰어 놓을 것 (사) 당면은 물에 불려 풀어지지 않게 살짝 데처 건저 놀 것 (아) 계란은 황백을 갈라 얇게 부처 실고초처럼 가늘게 썰어 놓을 것 (자) 파를 채 처 놓을 것(움파를 데처 많이 처도 좋습니다) 이상에 준비가 다 되었으면 조그만 그릇에다가 볶아 놓은 도라지·미나리·목이·황화채·표고·파·버섯·당면·고기 등을 한데 넣고 가진 양념(기름·깨소곰·호초가루)을 알맞치 넣고 맛 좋은 간장(이것은 일본장하고 반씩 섞어도 좋고 일본만만도 맛이 관계찮습니다. 모든 음식이 다 그렇지만 더구나 나물에는 장맛이 나쁘면 아무리 좋은 재료를 써도 맛이 나지 않습니다. 일본장도 상하 여러 질이 있으니 극상이 좋은 것은 물론입니다)을 간 맞쳐 잘 한데 섞어 접시에 보기 좋게 얌전히 담아 놓고 알(계란) 고명 황백과 석이 실고초 실백을 색 맞쳐 우에 얹어놓습니다. 이것을 먹을 때는 겨자나 초장을 찍어야 합니다.”

1923년 10월28일자 동아일보 3면에 실린 광흥공창 제면부의 당면 광고.

송금선의 잡채 조리법 역시 방신영의 것과 같이 당면이 들어갔다. 특히 잡채의 간을 맞추는 부분에서 방신영은 단지 간장이라고 적은 데 비해 송금선은 일본장이라고 적었다. 여기에서 일본장은 곧 일본간장을 가리킨다. 송금선은 여러 가지 재료에 양념을 한 다음에 조선간장과 일본간장을 반반씩 하여 간을 맞추든지, 아니면 일본간장만으로 간을 맞추면 좋다고 하였다. 조선간장과 일본간장은 그 맛이 다르다. 보통 ‘왜간장’이라고도 불렸던 이 일본간장은 메이지 유신 이후 끊임없는 개량의 길을 걸어온 결과물이었다.

1882년 이후 메이지 정부는 일본간장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 결과 온도조절을 통해 황국(黃麴) 미생물을 배양하는 방식이 도입되면서 공장마다 단일한 맛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석탄으로 불을 때서 강제로 온도를 높이면서 발효시간도 단축시켰다. 1904년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5000명을 넘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일본간장 공장이 서울 청파동에 들어섰다. 다카미 장유양조장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양조간장인 일본간장은 조선인들에게 인기를 끌지 못했다. 조선간장과는 너무나 다른 맛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1921년에 방신영이 제시한 잡채 조리법의 간장은 조선간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에도말기부터 간장 생산에 전념했던 노다가(野田家)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 호황에 힘입어 1918년에 간장 생산을 완전히 공업화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일본열도 각 곳에 대량 생산체제를 갖춘 간장공장이 설립되었다. 이로부터 양조간장이 일본음식의 맛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조간장의 문제는 주재료인 대두의 공급에 있었다. 바로 아미노산 간장의 개발이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아미노산 간장은 콩가루·콩깻묵·땅콩깻묵·간장비지·밀 등 단백질 원료를 염산으로 가수분해하여 가성소다나 탄산소다로 중화시켜 얻은 아미노산에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재래식 간장의 색·맛·향기를 내는 화학약품을 첨가하여 만들어졌다. 일본간장이 조선간장에 비해 덜 짜면서 단맛이 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 송금선의 잡채는 방신영의 잡채에 비해 그 맛이 달았을 것이 분명하다.

1930년대 이후 송금선 방식의 잡채도 중국식 잡채와 함께 점차 대중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37년 경성여자사범학교 가사연구회에서 펴낸 <할팽연구>란 책에서도 조선음식으로 당면이 들어간 잡채 조리법이 소개되었다. 일본음식과 조선음식의 가사과학 교육에서 ‘당면잡채’가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더욱이 1937년 7월7일에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당면잡채는 가정에서 만들어 먹어야 하는 음식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3만명이 넘는 중국인이 귀국을 하였고, 경성에 있던 중국요리옥도 292군데 중에서 237군데가 문을 닫아 겨우 55군데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동·탕수육·잡채는 고만두고 그렇게 흔하고 천하든 호떡조차 맛볼 수 없다”(동아일보 1937년 9월20일)는 한탄이 조선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해방 이후에 당면잡채는 한정식을 판매하는 식당은 물론이고 심지어 분식점에서도 중요 메뉴로 대중화의 길을 걸었다. 1976년에 출판된 황혜성의 <한국요리백과사전>에서는 잡채를 궁중음식 중에서 숙채로 다루었다. 당연히 당면이 들어간 잡채였다. 쇠고기·양파·당근·오이·도라지·숙주·송이·표고·목이·석이·당면 등의 재료가 들어갔고, 여기에 양조간장·설탕·깨소금·참기름·후춧가루 등으로 양념을 하여 무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결국 무치는 방식의 당면잡채가 1970년대에 한국음식의 시민권을 얻게 된 것이다.

사실 조선후기의 문헌에서도 잡채라는 음식은 나온다. 하지만 당면도 들어가지 않았고, 양조간장도 들어가지 않았다. 1930년대 이래 지금까지 생일상·돌상·회갑상과 같은 잔칫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당면잡채는 20세기 전반기 제국일본에 편입되었던 중국의 동북지역과 한반도에 살았던 조선인·중국인·일본인의 합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