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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100년

[주영하의 음식 100년](12) 신선로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식지않게 먹는 색색의 산해진미…외국인도 반한

“마침 명월관 앞을 지나면, 이때 임비(마비)돼가는 뇌신경이 현기(어지러움)에 가까운 상상의 반역을 진압할 수가 있겠는가? 없을걸세.두어 고팽이 복도를 지나, 으슥한 뒷방으로 들어서거든, 썩 들어서자, 첫눈에 뜨인 것이 신선로. 신선로에서 김이 무엿무엿 나는데 신선로를둘러 접시·쟁반·탕기 등 대소기명(大小器皿)이 각기 진미를 받들고 옹위해 선 것이 아니라, 앉았단 말일세. 차(此) 소위 교자시라. 애헴 ‘안석’을 지고 ‘방침’을 괴고, 무엇을 먹을고 위선 총검열을 하것다. 다 그럴듯한데, 욕속수완(성급하게 서둘지 않고)이라, 서서히 차려보자. ‘닭알저냐’를 하나 초고초장에 찍어먹고, 댐으로 어회, 또 댐으로 김치, 이러다보니, ‘게장’과 ‘어리굴젓’이 빠졌구나. 이런 몰상식한 놈을 봤나. ‘여봐 뽀이 게장과 어리굴젓 가져오구. 인력거 보내서 광충교 밑 사시는 서생원 좀 뫼서와.”

이 글은 ‘내 봄은 명월관 식교자(食交子)’라는 제목으로 1935년 2월2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시조시인 김상용(1902~1951)의 수필이다. 봄이 오지만 돈 없는 신세에 생각으로만 조선요리옥 명월관에 가서 호사를 부릴 생각이 글에 담겨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명월관은 당초 안순환이 차린 곳이 아니다. 명월관은 “서울 창덕궁 궁궐의 큰길을 끼고 한참 내려 오느라면 양제 이층에 조선식을 병하여 지은 커다란 집 한 채가 있으니”(‘삼천리’ 제4권 제4호, 1932년 4월1일), 당시 안순환의 식도원과 함께 조선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조선요리옥이었다. 김상용은 이 명월관의 식탁 위에서 신선로를 가장 으뜸으로 꼽았다. 이러한 주장은 결코 김상용만이 한 것은 아니었다.

일제시대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도 요리옥이나 요정에서 차리는 식탁 위에서 신선로는 가장 화려한 음식으로 손꼽혔다.

사실 신선로는 음식 이름이 아니라 그릇 이름이다. 18세기 중반에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수문사설>이란 책에서는 ‘열구자탕(熱口子湯)’ 항목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신선로의 모양을 언급하고 있다. “별도로 삶아 익히는 그릇이 있는데, 커다란 그릇과 닮았다. 바닥에는 굽이 달렸는데, 한 개의 아궁이가 그릇 가운데 뚫려 있다. 한 개의 대롱이 그릇 뚜껑 바깥까지 솟았고, 그 대롱이 바깥으로 나오도록 그릇 뚜껑의 한 가운데를 도려냈다. 대롱 안에 숯을 피우면, 곧장 바람이 굽의 구멍으로부터 들어와서 불길이 그릇 뚜껑의 바깥으로까지 빠져나간다. 그릇의 가운데는 비워 있지만, 둘레는 한 바퀴를 돌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릇의 이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도로 적어 두지 않았다.

지금의 서울 옥수동 근처에 살았던 빙허각 이씨가 1800년경에 쓴 <규합총서>에서도 ‘열구자탕’이란 음식 이름이 나온다. 그릇의 이름도 단지 ‘열구자탕 그릇’이라고 적었다. 빙허각 이씨의 시동생인 서유구(1764~1845)는 <임원경제지·정조지>에서 열구자탕(悅口子湯)이라고 적었다. 아마도 그 한자는 이와 같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에 비해 홍석모(1781~1857)는 <동국세시기>에서 이 음식을 ‘열구자신선로(悅口子神仙爐)’로 칭해진다고 했다. 음력 10월에 서울 사람들이 먹는 음식으로 소개하면서 “쇠고기나 돼지고기에 무·외·훈채·계란을 섞어 장탕(醬湯)을 만든다”고 그 대강의 조리법도 적어 두었다. 비록 <수문사설>에서 적어둔 ‘열(熱)’의 한자와는 다르지만, 같은 음식임에 분명하다. 입을 뜨겁게 한다는 열(熱)이나 입을 즐겁게 한다는 열(悅)이나 그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사실 열구자탕이란 음식 이름만 들으면 그 정체를 알기가 어렵다. 신선로가 뒤에 붙으니 그 전모가 잘 드러난다. 그래서 홍석모는 사람들이 이 음식을 ‘열구자신선로’라고 부른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1938년 3월5일 경성의 조선요리옥 태서관에서 경성제대 교수이던 아카마쓰 지조(오른쪽에서 세번째)와 아키바 다카시(다섯번째)가 공동 출간한 <조선무속의 연구>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상 가운데 신선로가 있고 ‘니혼슈’라고 불리던 청주 도쿠리가 보인다. 국립민속박물관 손진태 사진·아카이브 소장.


1904년에 일본인 우스다 잔운(1877~1956)이 쓴 <조선만화>에도 신선로에 대한 글이 나온다. “조선요리 중에서 첫 번째의 명물로서 우리나라 사람(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것은 신선로이다. (중략) 조선요리는 냄새가 심하고 불결하다고 하여 먹어보지도 않고 얼굴을 찌푸리는 거드름쟁이도 이 신선로만큼은 젓가락을 든다. 조선요리를 먹는 일은 우선 신선로에서 시작해야 한다. (중략) 무엇보다도 화로와 냄비를 합체시켜 만든 것이 신선로의 특색이다. 선물로 내지(일본)에 가져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신선로로 불리는 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신선과 수명이 같아진다고 하는 의미라고 한다. 냄비의 제작은 조야하지만, 우리나라에 수입하여 정교하게 개조한다면 매우 재미있을 것이다.” 실제로 대한제국의 황태자는 1909년 7월12일에 신임 궁내대신이 된 하나부사 요시타다에게 신선로 한 개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신선로는 조선 사람은 물론이고 외국인에게도 상당히 주목을 받았던 그릇이었다.

특별히 조선왕실이나 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했던 신선로는 은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을 식사 전에 알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신선로는 주로 유기로 만들었다. <임원경제지>에서는 유납으로 그릇을 만들고 철로 숯불을 놓는 대롱을 만든다고 했다. 여기에서 유납은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것이다. 구리와 아연을 합금한 것도 황동이라 부르지만, 유납도 황동이다. 하지만 저급한 것은 백동으로 만들었다. 알다시피 백동은 구리와 니켈의 합금을 가리킨다. 1938년 4월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물가자료에 의하면, 신선로 큰 것 한 개의 값은 5원70전, 중간짜리는 4원70전, 작은 것은 3원70전이었다. 같은 자료에서 계란 100개가 3원80전 한다고 했으니, 그 값이 결코 싼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1938년 10월에 평북 정주에 있던 구리광에서 휴업을 하는 바람에 신선로의 값이 6원50전으로 올랐다. 겨울이 되면 신선로 수요가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값이 올라 걱정하는 여론이 있었다.

그만큼 1910~30년대에 신선로는 전성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맛은 어떠했을까? 1929년 12월1일자 잡지 ‘별건곤’ 제24호에서는 진품 중의 진품으로 신선로를 꼽았다. 우보생(牛步生)이란 필명을 내세운 저자는 그 맛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찬바람이 높아가는 이때부터의 식탁에서 맛난 냄새를 물큰물큰 피우면서 자글자글 끓고 있는 신선로를 치워버린다면 그는 섭섭한 일이다. 순배가 느직이 돌고 이야기가 차차 운치있어 부펴갈 때에는 조치도 식어지고 국그릇에도 기름이 끼지만은 더욱 더욱 맛이 나는 것은 신선로 맛이다. 완자 한개 부침한 점의 따끈한 맛도 생색 나는 것이어니와 장국에 말아내는 한사래 온면은 별미 중의 별미다. 그대로 지나기는 약주맛 절미가 좀 부실하고 따로이 준비하기에는 어짓 빠른 때에 신선로 장국에 말아내는 온면은 주당에게도 마땅하고 또 비주당의 입에도 마땅한 것이다.”

일본 화학조미료 회사 아지노모도의 신선로 광고.

그렇다고 신선로가 조선요리옥에서 가장 조선적인 음식으로 지속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한갓 이익에만 눈을 뜨고 영원히 조선요리의 맛깔 좋은 지위를 지속할 생각을 못한 결과 서양 그릇에 아무렇게나 담고, 신선로 그릇에 얼토당토않은 일본 요리 재료가 오르는 등 가석한 지경에 이르렀다”(1921년 4월4일자 동아일보, 조동원)는 비판도 나왔다. 심지어 “벌써 7년 전 과거가 되었다만은 나는 우리나라 요리집에를 갔다가 통탄할 현상을 구경한 일이 있다. 조선의 요리 독립까지 잃어버리는 것을 구경했다. 유수한 고등 요리집에서 내는 조선요리라는 것이 말이다. 스기야기라는 괴물이 신선로를 구축하고 밥상 중 중간에 진을 쳤으며 복신지라는 들척지근한 물건이 우리나라 짠지를 정복했다.”(1926년 3월3일자 동아일보, 김재은)

곧 조선요리옥에서 일본음식 스키야키가 신선로에 담겨서 신선로 행세를 하고 있음을 그들은 개탄하였다. 심지어 화학조미료 회사 아지노모도 역시 냉면과 함께 신선로에 주목했다. 1930년 3월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광고에서 그들은 ‘신선로 중에도 맛있난 신선로는 아지노모도 친 신선로’라는 카피를 내세웠다. 당연히 광고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신선로가 그려졌다. 결국 화학조미료가 들어가고, 맑은 조선간장이 아닌 단맛의 ‘왜간장’이 들어간 신선로는 “온갖 것을 마음대로 넣어도” 무방한 음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릇에만 주목을 한 사람들은 맛을 떠나서 신선로만 차려지면 밥상에 올라간 음식이 모두 조선음식이라고 여기게 되는 이상한 현상도 나타났다.

해방과 함께 서울에 입성한 미군들 눈에도 신선로는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들이 고향에 편지를 쓸 때, “궁전은 남향이고 성벽은 자취 없고 대감은 양반이고 제일 좋은 요리는 신선로라고 전한다”(동아일보 1945년 12월2일자)고 할 정도였으니. 당연히 맥아더 장군을 비롯하여 한국을 방문했던 미국 대통령에게 대접하는 음식 중에서 신선로는 빠지지 않았다. 1959년 1월30일자 경향신문에는 당시 아시아재단 한국지부장 부인 제임스 여사를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다. 기자는 “우리네 가정에 대한 말씀을 좀”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제임스 여사는 온돌이 좋다고 생각한다면서 “한국요리 중 신선로는 누구나 좋아해서 모두 그 조리법과 그릇들을 미국으로들 사 보내는데 아마 앞으론 신선로가 국제적인 요리가 될지도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적어도 1960년대까지도 외국사절 접대나 격식 있는 가정에서는 열구자탕을 신선로에 끓여서 먹었다. 너무 고가의 재료가 들어가서 만들어 먹기가 어렵다는 판단에서 쇠고기를 적게 쓰고 두부와 채소를 많이 넣는 경제적인 개량 신선로 요리에 대한 계몽이 일어나기도 했다. 1969년에는 전기신선로가 개발되었다. 15원이 드는 숯 대신에 전기료 2원이면 뜨끈뜨끈한 신선로를 맛볼 수 있다는 선전이 뒤따랐다. 연탄 온돌의 성행은 집안에서 화로와 함께 신선로도 몰아냈다. 결국 1970년대 이후 신선로의 명성은 오로지 일제시대 조선요리옥의 변형인 요정에서만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