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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100년

[주영하의 음식 100년](14) 약주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탁주에 용수를 박아 맑게 정제한, 갈색을 띤 연노랑의 투명한 술
ㆍ달큰하고 깔끔, 입에 감기는 여운의 맛

“선대의 유업이라면 듣기에 큰 사업인 것 같습니다만은 저의 선친께서 가난한 술장사를 하시다가 제가 20살 때에 돌아가셨는데 실상은 아무것도 아니 남겨두신 이 술장사를 제가 20세 되는 해 맡아가지고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돈 이백 원 하나를 융통하여 가지고 내 손으로 술을 만들며 팔며 외상을 걷으러 다니는 등 일절 일을 혼자서 하였었는데 바로 이 동안이 뭣보다도 오늘날의 성공을 있게 한 직접 원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매일신보, 1936년 6월10일자)

이 말을 한 사람은 일제시대 서울에서 가장 큰 술 공장 중의 하나였던 천일양조장의 사장 장인영이다. 천일양조장은 지금의 서울 종로5가에 있었다. 그가 말한 선친은 장근식이다. 호소이 이노스케가 엮고 조선주조협회에서 1935년에 발행한 <조선주조사>에 의하면 통감부 시대에 장근식은 11명의 서울 소재 약주가(藥酒家)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직 주세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전문적인 양조장이 서울에 별로 없었다. 대다수의 음식점에서는 스스로 술을 양조하여 음식과 함께 팔았기 때문에 양조업이 성립되기조차 어려웠다. 그러니 장인영의 말처럼 결코 그의 선친 장근식은 술장사로 큰돈을 벌지는 못했다.

약주와 오뎅탕

천일양조장은 1913년 1월22일에 조선총독부로부터 탁주 및 약주의 면허를 받았다. 한반도에서 술을 만들고 판매하는 일에 국가가 개입하기 시작한 때는 대한제국 시기인 1909년 2월13일이다. 바로 이날로부터 한반도에 주세법이 발효되었다. 이 법의 제1조는 주류를 제조하는 자에게는 본법에 의하여 주세를 매긴다고 했다. 아울러 제3조에서는 주류를 제조하고자 하는 자는 제조장 1개소마다 정부의 면허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결국 이 주세법에 근거하여 장근식은 양조장 면허를 받았다. 왜냐하면 조선을 병합한 일제는 1916년 9월1일에 기존의 주세법을 개정한 주세령을 발효하였기 때문이다.

일개 술장사에 지나지 않았던 천일양조장은 1917년 4월에 개정된 주세령에 근거하여 소주 제조 면허도 얻었다. 근대적인 양조장 시설을 갖춘 천일양조장은 1923년에 서울에서 열린 부업품공진회 때 제품을 내놓고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동대문 근처에서 경기도 일대까지 영업망을 확장했다. 장인영이 이렇게 영업망을 확장할 수 있었던 재력은 1919년 3월3일 고종의 인산 때 마련됐다. 시골에서 고종의 인산을 보기 위해 서울로 온 수많은 사람들이 그 슬픔을 술로 달랬고, 장인영은 한몫을 잡았다. 1930년대 초반 천일양조장에서는 주로 탁주와 소주로 장사 재미를 보았다. 탁주를 8500석, 소주를 650석이나 생산한 데 비해, 약주는 100석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후기 이래 약주는 양반의 술로 이해되었다. 주세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전까지 약주는 양반가에서 직접 만들어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에 사용했다. 19세기 말 이후 근대적인 도회지가 형성되면서부터 약주는 중류 이상의 사람들이 마시는 술로 이해되었다. 알다시피 약주는 누룩 가루를 물이 담긴 독에 넣은 다음에 여기에 찹쌀가루로 찐 떡을 넣어 밑술을 만들고, 여기에 멥쌀과 누룩, 그리고 물을 넣어 빚는다. 술독에 용수를 박아 맑은 술을 떠내면 약주가 된다. 갈색을 띤 연노랑의 투명한 술이지만, 아주 투명하지는 않다. 알코올 도수는 12~20%이며, 제법에 따라 특정의 약재를 넣어 빚기도 한다. 그래서 약이 된다고 약주라고 불렀다.

실제로 약이 되는 술도 있었다. 빙허각 이씨가 1800년경에 쓴 <규합총서>에서는 약주로 구기주와 오가피주 두 가지를 언급했다. 특히 구기주를 마시면 회춘을 한다고 적었다. 곧 고대 중국의 신선으로 알려진 백산보의 생질이 구기주를 마시고 390세에도 얼굴빛이 열대여섯 소년 같았다고 했다. 또 이 구기주를 마신 한 사신은 100일 만에 흰 머리가 도로 검어지고 빠진 이가 다시 나서 해가 가되 늙지 않았다고도 적었다.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약주는 몸을 상하게 하는 술이 아니라 약 그 자체라고 빙허각 이씨는 여겼던 것 같다.

이렇게 약이 되는 약주도 있었지만, 보통의 약주는 앞에서 말했듯이 멥쌀로 빚은 맑은 술로 통했다. 양반가에서 마시던 약주가 19세기 말 이후 음식점이나 양조장에서 만들어 팔기 시작하면서 일반인들도 맛볼 기회를 가졌다. 그래서 19세기 말에 조선에 와서 일본식 청주를 생산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조선주의 으뜸으로 약주와 탁주를 꼽았다. 그러자 약주라는 말의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도 생겨났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약주가 약산춘(藥山春)의 줄임말이라는 것이다. “광해조시대의 서유거란 분이 약현(藥峴·지금의 경성부 중림정)에 살며 아호 역왈(亦曰) 약봉(藥峯)이라 하야 그 댁이 명문거족으로 유명하거니와 양조로도 유명하야 그 댁 청주는 별 달리 말이 있었다. 그 당시 인사는 그 댁 술을 약봉주, 약현주라고 부르다가 필경은 약주라고 약칭하였다. 그러다가 지금은 경성에서는 청주를 약주라고까지 불러온다.”(동아일보 1937년 11월6일자)

그런데 같은 신문에서는 그 다음날 바로 정정 기사를 실으면서 “서유거가 아니요 서빈씨의 오(誤)요”라고 했다. 하지만 서빈 역시 잘못된 정보이다. 서유구(1764~1845)는 <임원경제지·정조지>에서 ‘약산춘방(藥山春方)’을 언급하면서, “곧 서충숙공이 담그기를 즐겼는데, 공의 집이 약현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술을 약산춘이라 불렀다”고 했다. 여기에서 서충숙공은 조선 중기의 문인인 서성(1588~1631)을 가리킨다. 약산춘의 춘은 술을 지칭하는 고대 중국의 다른 표현에서 나왔다. 서울 사람들이 술 하면 약주라고 부르니 문헌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지식인들이 서성을 서유거라고도 하고, 약산춘의 줄임말이 약주라고도 하는 오류를 만들어냈다.

여하튼 조선약주는 분명 고급술이었다. 1908년 1월10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명월관 확장광고’에서도 명월관에서 구비하고 있는 술 중에서 약주가 가장 먼저 나온다. 그만큼 조선요리옥의 수준에 약주는 잘 어울렸다. 하지만 문제는 여름에 쉽게 변질된다는 데 있었다.

명월관을 설립했던 안순환은 1923년 1월1일자 동아일보에서 조선요리를 개량해야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첫째 우리 음식은 밥이면 밥, 국이면 국 한 가지만을 먹을 수 없는 것이 병이외다. (중략) 둘째는 우리나라 음식에는 따뜻한 것을 필요하게 아는 것이 병이외다. 이 까닭으로 만드는 즉시에 먹지 않고는 그 음식은 다시 데이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버리든지 하게 됩니다. (중략) 셋째는 오랫동안 감장하여 둘 수 없으며 또는 감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맛이 쉽게 변하여지게 되는 것이 결점이외다. 우리나라 구기자약주 같은 것은 실로 맛도 있고 위생에도 훌륭합니다. 세계에 내놓아 아무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하나 위스키라든지 브랜디와 같이 오래 둘 수 없습니다.”

일본 사쿠라정종 광고.

안순환 역시 <규합총서>에서 언급한 구기주, 곧 구기자약주를 조선의 자랑으로 내세웠지만, 오래 둘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개량할 대상이라고 보았다. 사실 일본 청주 역시 조선의 약주와 비슷한 제법으로 만드는 술이었다. 1895년 청일전쟁에 이긴 메이지 정부는 기존의 술과 관련된 법령을 ‘주조세법’으로 개정하면서 양조업에 깊이 개입하였다. 특히 청일전쟁으로 받은 배상금으로 네덜란드의 미생물학 전문가를 일본으로 초빙하였다. 발효의 핵심인 효모를 제어하기 시작하면서 일정한 맛을 지닌 청주가 일본열도의 각 양조장에서 자신의 상표를 지니고 판매되기 시작했다. 장기간 보존의 문제 역시 해결되어 갔다. 이미 일본인들은 1883년 1월 부산에 일본청주 공장을 설립하였다. 이어서 마산·인천·서울 등지에 연이어 일본청주 양조장이 문을 열었다.

비록 여름을 나기 위해서 서울 사람들은 조선 후기 이래 증류주 소주를 약주에 탄 과하주(過夏酒)를 만들어 여름을 넘겼지만, 19세기 말부터 일본청주에 풍덩 빠진 조선의 주당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1920년대 조선에서 양조장을 운영한 일본인들 입장에서 조선은 “원료가 저렴하고 노동임금도 저렴하며 부패의 염려가 없는 모든 조건을 구비하여 있음”(동아일보 1924년 2월5일자)으로 해서 사업하기에 매우 좋은 곳이었다. 1921년 통계에 의하면, 일본청주는 조선에서만 5만7600석이 넘게 생산되었다. 그 중에서 ‘국정종주(菊正宗酒)’는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일찍이 1908년 명월관 광고에서도 이 술은 메뉴로 잡혀 있었다.

결국 1920년대 이후 일본청주를 조선 사람들은 한 회사의 상표인 정종으로 대체하여 부르게 되었다.

이에 비해 약주는 주세령에 의해서 면허사업자의 독점사업이 되면서 재료비를 아끼기 위해 찹쌀과 멥쌀 외에 다른 것을 섞어 만들어졌다. 약주를 마시고 나면 약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되는 부작용이 자주 발생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사정은 지속되었다. 약주는 이름뿐 그 실체는 가정에서 밀주를 담그지 않는 한 제대로 맛보기 어려웠다. 특히 1962년 박정희 정부는 밥으로 먹을 쌀도 부족한 상황에서 쌀로 술을 담그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결국 그 해 12월4일 당시 재무부 장관은 약주 제조에 40% 이상을 잡곡으로 대체할 것을 행정 조치로 발표하였다. 1965년에는 이 정책이 더욱 강화되었고, 8월4일 농림부에서는 약주에 쌀이나 잡곡의 사용도 일절 금지하고 고구마 전분만을 쓰도록 입법 조처를 취하였다. 이미 증류주가 사라지고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희석식 소주가 술상을 점령한 상태에서 이 조치는 약주의 존재가치마저도 없애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로부터 22년 후인 1977년에 쌀로 빚은 약주가 다시 시장에 나왔지만, 사람들의 입맛은 약주를 버린 지 오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민속주란 이름으로 그리고 한 양조장의 고집으로 약주는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너무나 생소하고 어색하여 1908년 명월관의 식탁에 올랐던 영광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