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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100년

[주영하의 음식 100년](11) 조선요리옥의 탄생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광화문 인근 ‘명월관’이 효시… 일본·청요리옥과
‘맛 삼국지’

※ 우리 음식의 역사, 그 음식에 깃든 문화와 삶을 풍성한사료를 토대로 맛있게 요리해온 ‘주영하의 음식 100년’이 두 번째 주제를 시작합니다. ‘가장 오래된 외식업, 국밥집’을 주제로 설렁탕 등 9개 음식을 소개한 데 이어, 18일자부터는 ‘조선요리옥의 탄생’을 주제로 신선로에서 묵까지 새로운 아홉 가지 음식을 들고 찾아갑니다.

“삼사십여년 과거지사나 그때에 우리 조선은 그윽이 적막하야 인정(人定)을 진 후면 사람의 왕래가 끊어지고 국도(國都)에 내외국인간 여인교제(與人交際)할 자리가 없었으니 이천만 민중지국으로서 이러한즉 한심한 생각을 하고 보니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외국인이 다녀갈 적엔 그 나라 정도(定度)를 알고자 할진대 요리점과 병원과 공원을 한 두 번씩 본 후라야 그 나라 진중함이 어느 정도에 이른 것을 알지니 이러함에 이르러서는 그 수치를 면코자 우리나라에서 남의 나라 사람에게 자랑꺼리 될 만한 조선요리를 발명하야 관민상하 없이 혼례피로와 각항 연회며 내외국인 교제하는 데와 모든 사업 기초상 의논하는 자리를 만들고 우리나라도 이런 것이 있다는 표시가 되게 타인을 사용하야 영업기관을 설비한 바 매삭 수백호주가 고용함에 생활 자료가 근어삼십년간이나 되얏는지라.”

이 글은 1933년 조선유교회총부에서 출판한 <조선유교회선언서급헌장>의 제9장에 실려 있다. 집필자는 안순환이다. 그렇다면 안순환은 누구인가? 대체로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요리사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요리옥이라고 여겨지는 ‘명월관’을 1909년 지금의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 자리에 세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안순환과 명월관에 대한 지금까지의 정보는 상당한 오류를 지니고 있다.


안순환은 1871년 음력 2월8일 참봉을 지낸 아버지 안순식과 어머니 청주 한씨 사이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2세 때 친모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집안의 쇠락으로 어려서 생활고를 심하게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친은 16세의 안순환을 서당에 보내 한학을 공부시켰다. 1890년에 혼인을 한 안순환은 자립을 하기 위해 이듬해에 서화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1895년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하고 이어서 무관학교에 들어갔으나 생활의 어려움으로 중간에 그만두었다. 하지만 안순환의 실력과 성실함을 알고 있던 주변 사람들이 천거를 하여 1898년 탁지부 전환국의 건축 감독이 되었다. 그 후 판임관 육등, 전환국 기수 등을 거쳤다. 안순환은 1909년 1월21일에서 1910년 8월29일 사이에 전선사 장선을 맡았다.

<曲阜聖廟慰安事實記>(녹동서원 편·1931) 147쪽에 실린 안순환의 사진. 녹동서원의 도감으로서 조선시대 관복을 입고 있다.

전선사 장선이란 직책은 어떤 일을 하는 자리였는가? 1905년 3월4일 시행된 궁내부 관제 개정 때, 전선사는 “임금의 음식상과 연회를 맡아본다”고 했다. 전선사의 장선은 황실의 연회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우두머리 벼슬이었다. 안순환은 이 자리에서 종3품까지 했다. 그러니 안순환을 두고 직접 음식을 만들던 요리사라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임금의 음식상과 연회를 책임진 부서의 행정 책임자였을 뿐이다. 당연히 대한제국의 마지막 주방장이었다는 말은 잘못되었다.

대한매일신보 1908년 9월8일자에는 “명월관에서는 작일은 해관(該館) 설시(設始)하던 제5기념일인 고로 국기를 고양하고 기념식을 설행(設行)하였다더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렇다면 명월관은 1909년이 아니라 1903년 9월17일에 문을 열었다. 그 이름도 본래 명월루였다. 처음에 개인 집을 빌려서 시작한 명월루에 손님이 붐비자 안순환은 같은 자리에 1906년 9월 2층 양옥을 새로 짓고 이름을 명월관이라고 바꾸었다. 그 자세한 이야기가 1906년 10월2일자 만세보에 실렸다. “황토현 명월관에서 내외국 요리를 구비하고 각인의 청구를 수응하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니와 허다한 청구는 점증호대하고 가옥이 협착한 일이 있더니 대확장을 계획으로 2층 양옥을 신건축하고 각국 요리를 일신 준비하고 목욕탕을 정결하게 신설하는데 일전부터 공역에 착수하여 제반제도가 극히 굉장하다더라”고 했다. 황토현은 바로 ‘황토마루’라고 불렸던 지금의 광화문 사거리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렇게 확장된 명월관에서는 어떤 음식을 제공했을까? “국내외의 각종 술과 엄선한 국내외 각종 요리를 새롭게 준비하고 주야로 손님을 맞으려 합니다. 각 단체의 회식이나 시내외 관광, 회갑연과 관혼례연 등에 필요한 음식을 마련해 두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을 보내어 음식을 배달하기도 하는데, 진찬합과 건찬합, 그리고 교자음식을 화려하고 정교하게 마련해 두었습니다. 필요한 분량을 요청하면 가깝고 먼 곳을 가리지 않고 특별히 싼 가격으로 모시겠습니다. 군자의 후의를 표하오니 여러분께서는 많이 이용해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주요 음식물 종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새롭게 개량하여 만든 각종 교자음식, 각국의 맥주, 각종 서양 술, 각종 일본 술, 각종 대한 술, 각종 차와 음료, 각종 양과자, 각종 담배, 각종 시가, 각국 과일, 각종 소라, 전복, 모과.”(만세보 1906년 7월14일자 광고)

비록 조선음식이 주된 메뉴였지만, 그렇다고 오롯이 조선음식만을 내놓지는 않았다. 외국음식과 술, 심지어 담배도 명월관에서 다루었던 메뉴 중의 하나였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손님을 맞이했던 전문적인 요리옥이 없었다. “양반의 연회는 자기 집에서 하든지, 아니면 관청 소유 건물인 누정에서 기생을 명령으로 불러서 오게 하여 술을 따르게 하였다. 거기에서는 돈을 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요리옥의 필요가 없었다. 아울러 돈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 뻔질나게 다니는 곳으로는 기생집이 있었으며, 여기에서 노는 경우도 있었다.”(이마무라 도모에 <경성 화류계의 변천>, 1937년) 이에 비해 명월관에서는 일정한 시설에 정해진 메뉴, 그리고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영업을 했다. 당연히 이를 두고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조선요리옥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불행하게도 조선요리옥 명월관의 탄생에는 에도시대 말기에 형성된 일본요리옥이 영향을 주었다. 일본요리옥이 서울에 진출한 때는 대략 1885~86년쯤으로 보인다. 일본의 조선 침탈이 본격화하면서 서울의 일본요리옥은 더욱 번창하였다. 특히 조선통감부 설치 이후에는 일본요리옥이 서울에서 대단한 성업을 하였다. 여기에는 ‘풍류통감’이라고 불렸던 이토 히로부미(1841~1909)의 공도 있었다. 1906년쯤 서울에 있던 일본요리옥으로는 화월루·국취루·청화정 등이 일류였고, 송엽·명월·광승 등이 이류였다. 이 중에서 화월루에는 30여명의 게이샤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미 1890년에 개업한 화월루는 서울의 대표적인 일본요리옥으로 자리를 잡았다. 화월루의 성공이 사업가로서의 본성을 지녔던 안순환으로 하여금 명월관 전신 명월루의 문을 열도록 만들었다. 이토 히로부미 역시 명월관의 단골 고객이었다.

명월관은 1912년에 3층 양옥으로 증축되었다. 또 1918년에 안순환은 광화문의 명월관 규모가 작다고 판단하여 인사동 194번지에 명월관 지점을 열었다. 원래 태화관은 이완용의 개인 집인 순화궁으로 안순환이 1918년에 이 집을 사들여 조선요리옥으로 바꾸었다. 이곳에서 1919년 3월1일 오후에 연회를 마친 33인의 지식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명월관 기생들의 가무장면을 담은 일제강점기 사진엽서.


그렇다면 명월관의 내부 정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917년 2월에 발간된 ‘신문계’ 5호의 ‘경성유람기’라는 글에 그 대강이 묘사되어 있다. 이 글의 스토리는 함경남도 금성에 사는 이승지가 우연히 만난 모던보이 김종성과 함께 기차를 타고 경성으로 가서 문명개화의 성공을 감탄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당연히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선전하기 위해 지어진 글이기도 하다. “때는 열한시 반이라. (중략) 이때 인력거 두 차가 황토현을 향해 몰아가니, 이는 김종성이 이승지를 연회 대접을 하려고 명월관 요리점으로 가는 것이라. (중략) 조란화동(彫欄畵棟)과 분벽사창(粉壁紗窓)이 황황한 전기 광선에 비치여 영롱찬란한 광경이 그릇, 수정궁궐에 들어감을 깨닫지 못할지라. (중략) 두 사람은 보이의 안내를 따라 3층루 한편 처소에 좌정하였는데” 술을 몇 잔씩 마시다보니, 문이 열리면서 “종용히 들어와 날아가는 듯이 앉으며 ‘안녕하세요’ 하고, 두 사람을 향하여 인사하는 여자는 곧 광교 조합에 유명한 기생 춘외춘과 매홍이니, 이는 김종성이 이승지를 접대하기 위하여 청한 것”이었다. 손님과 기생이 서로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매홍은 거문고, 춘외춘은 양금을 연주하였다. 당시 광화문 명월관의 시설은 3층에 20호가 넘는 방이 있었다. 더욱이 기생들이 조합을 만들어 요리옥과 유곽 등을 전전할 때이다. 이승지와 같은 시골 양반이 명월관에서 이런 호사를 누리는 일 자체가 조선총독부 덕택임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안순환 역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더하여 1919년 5월23일 새벽에 기생과 놀던 한량의 부주의로 광화문 명월관의 집고각이 불에 타면서 전체가 소실되어버렸다. 결국 명월관을 다른 사람에게 판 안순환은 1920년대 초반에 지금의 서울 중구 명동2가에 식도원이란 조선요리옥을 다시 설립하였다. 1920년대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의 근대도시에는 일본요리옥과 청요리옥, 그리고 조선요리옥이 도심의 중심가에 자리 잡고 성업을 하였다. 서울에는 앞에서 언급한 식도원과 명월관은 물론이고 명월지점·국일관·장춘원·고려관·태서관 등이 지금의 서울 강북 도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안순환은 식도원을 1929년까지 직접 운영하면서 엄청난 돈을 모았다. 그런데 선친이 항상 강조했던 조상 안향(1243~1306)에 대한 흠모를 버리지 못했다. 결국 1930년 봄에 지금의 시흥시에 녹동서원을 세우고 황해도 해주에 있던 안향의 묘소도 옮겼다. 또 명교학원을 세워 젊은이들에게 유학 교육을 시켰다. 1935년 4월28일에는 도쿄에서 개최된 동양유도대회에 다른 유림 대표들과 함께 조선 대표로 참석하는 등 공자교 운동에도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안순환은 근대적 지식인이면서 사업가였다. 아울러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음식업 창시자였고, 후에는 조선음식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1942년 8월20일 72세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