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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100년

[주영하의 음식 100년](9) 배추김치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진수성찬도 김치 없으면 허전”… 켜켜이 감칠맛…그립다 ‘조선배추’


“김치라 하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밥 다음에는 김치 없이 못 견디나니 만반진수가 있더라도 김치가 없으면 음식 모양이 못될 뿐 아니라 입에도 버릇이 되어 김치 못 먹고는 될 수 없나니 어찌 소중하다 아니 할까부냐.그런고로 봄과 여름과 가을은 일기가 춥지 아니한 고로 조금씩 담가 먹어도 무방하거니와 겨울은 불가불 한데 하여야 오륙삭을 먹나니 그런고로 진장(珍藏)이라 하는 말은 긴할 때 먹기로 보배로 감춘다는 말이라.” 이 글은 이용기가 1924년에 펴낸 근대조리서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나온다.여기서 만반진수는 한자로 ‘滿盤珍羞’ 곧 상 위에 가득히 차린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가리킨다. 김치가 없으면 밥 먹을 맛이 나지 않는 조선 사람들의 식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용기는 이와 같은 김치 논설을 펼친 다음에 30가지에 이르는 조리법을 소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통배추김치 조리법이 가장 먼저 나온다. “배추를 누른 잎은 다 제쳐 버리고 통으로 속속이 정하게 씻어서 아무 그릇에든지 절이나니 물 한 동이에 소금을 반 되 가량을 타서 배추에 넉넉히 부어 절여 가지고 광주리에 내어 놓아 물이 다 빠지게 해 놓고 마늘·파·고초·생강 채 치고 또 갓·파·미나리와 청각은 한 치 길이씩 썰어 함께 섞어서 배추 잎사귀 틈마다 조금씩 깊이 소를 박고 잎사귀 한 줄기를 잡아 돌려서 배추 허리를 매고 또 무를 정하게 씻어서 칼로 이리저리 비슷비슷 어여서 마치 비늘 박힌 모양으로 한 후에 소금에 절였다가 고명을 그 어인 속마다 넣어서 김칫독에 놓나니”라고 했다.

하지만 바로 이어서 이 방법은 옛날 방법이라 하면서 “요사이는 통김치 담그는 법이 조금 다르고 모양이 썩 있나니”라고 적었다. 옛날 방법과의 차이는 여러 가지다. 조기를 통째로 넣는다든지, 북어나 건대구를 굵게 썰어 김칫독 바닥에 깐다든지, 낙지나 전복 혹은 소라를 고명으로 넣는다든지, 설렁탕 국물을 식혀서 기름을 걷고 맛 좋은 조기젓국을 끓였다가 식혀서 함께 섞어 그릇이 가득 차도록 간을 맞추어 붓는 방법 등이다. 심지어 “통김치에 넣었던 왼조기를 대가리를 따고 꼭 짜서 몇 개든지 정한 그릇에 한 개씩 놓고 설탕 쳐가며 켜켜이 놓고 돌로 누르고 봉하여 두었다가 수일 후에 꺼내어 쭉쭉 찢어 술안주에 먹으면 절품이니라”고 했다. 온갖 재료만 잔뜩 들어간 요사이 배추김치와도 사뭇 다른 맛을 느끼게 해준다.

좋은 배추를 구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다. 특히 서울 안에서 이름난 배추산지가 구체적으로 나온다. “좋은 배추는 서울 안에서는 이름난 방아다리 느리골이나 훈련원 것이 제일이요 다른 곳 것으로는 이 두 군데를 당할 배추가 없나니”라고 했다. 방아다리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충신동, 느리골은 효제동이다. 훈련원은 조선시대에 병사의 무재(武才)시험, 무예 연습, 병서(兵書) 강습 등을 맡아보았던 관청을 가리킨다.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운동장 근처에 있었다.

아래 왼쪽부터 화심(花心)배추(비결구), 경성배추, 개성배추, 반결구배추. 위쪽은 모두 결구배추다. | 조선총독부농업시험장 자료 사진

1923년 11월9일자 동아일보에서도 당시 서울 사람들에게 인기를 모았던 배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대개 시내에서 중요히 치는 배추밭은 방아다리배추밭(충신동), 훈련원배추밭(동대문내), 구리안뜰배추밭(동대문외남편), 섬말배추밭(종로통오정목) 등이요, 그 외에 지방에서 오는 것으로는 개성배추를 제일 중요히 치던 것인데 개성배추는 지난번 수해로 거의 전멸에 돌아가서 배추시세는 작년보다 일할 내지 이할가량 비싸진 터인데 훈련원배추는 보잘 것이 없으며 구리안뜰 배추는 상당히 되었으나 속이 차지를 못하다 하며 그 중에서 제일 쓸 만한 곳은 방아다리배추로 이왕직을 위시하여 각 대가에서는 대개 이곳에서 사드리기를 시작한 모양이다. 작년부터 이름을 얻은 섬말배추도 방아다리 다음은 가겠는데 요사이 시세로 보면 섬말배추는 백통에 칠원 오십전, 구리안뜰치이면 육원 오십전, 방아다리배추이면 팔원 내지 구원가량에 살 수 있다는데”라고 했다. 역시 방아다리배추가 으뜸으로 꼽혔다. 사실 동대문 근처와 그 동쪽의 배추밭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조선초기의 학자 성현(1439~1504)은 <용재총화>에서 배추를 언급하면서 “한양 도성 동문 밖에 사는 사람들이 이것을 잘 길러서 이익을 챙긴다”고 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김시습(1435~1493)은 ‘왕심연허(枉尋煙墟)’란 제목의 시에서 “연로한 부녀자가 도성에서 채소를 팔고 돌아오니 어린 아이는 기뻐 맞이하며 허술한 문턱을 뛰어넘네”라고 읊조렸다. 이를 두고 김시습보다 거의 1세기 후 사람인 권문해(1534~1591)는 <대동운부군옥>에서 “왕심은 지금 도성의 동문 밖에 있는 마을 이름이며, 이곳 사람들은 대대로 채소를 파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고 설명했다. 왕심은 지금의 서울 왕십리 일대를 가리킨다.

그렇다고 배추김치가 조선초기부터 김치의 으뜸은 아니었다. 일찍이 고려 중기의 이규보(1168~1241)는 청(菁)으로 여름에는 간장에 절이고 겨울에는 소금에 절여서 먹으면 좋다고 했다. ‘청’은 순무일 가능성이 많다. 1670년께 쓰인 <음식디미방>에서는 꿩으로 침채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면서 ‘나박침채’를 언급하였다. 나박은 한자 나복(蘿)에서 나온 말이다. 정약용(1762~1836)은 ‘죽란물명고발(竹欄物名考跋)’에서 “내복(萊)은 방언으로 무우채(蕪尤菜)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후채(武侯菜)의 와전”이라고 했다. 곧 무후(武侯) 제갈량이 좋아했던 채소라는 설화에서 ‘무우’의 조선식 이름이 나왔다는 주장이다. 그 진실 여부는 아직 확인할 길이 없지만, 동치미와 섞박지와 같이 무는 조선 후기까지 김치 재료의 대명사였다.

1890년대에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시의전서>에서 비로소 배추통김치 조리법이 처음 나온다. 이 김치의 한자 이름을 송침채(沈菜)라고 적었다. 정약용은 앞의 글에서 “송채(菜)를 조선에서는 배초(拜草)라고 하는데, 이것은 백채(白菜)의 와전이다”라고 질타했다. 배추의 겉잎이 소나무의 푸른 색을 띠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 송채고, 그 속이 하얗기 때문에 백채가 되었다. 알다시피 배추의 원산지는 중국의 북부지역이다. 유중림이 1766년(영조 42)에 쓴 필사본 <증보산림경제>에서는 중국 품종(唐種)이 가장 품질이 좋다고 밝혔다. 하지만 배추는 국을 끓이거나 쪄서 먹는 채소였다. 18세기 이후에 배추가 점차 김치의 주재료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것이 19세기가 되면 무에 버금가는 김치재료로 부각되었다. 결국 1910년대 이후 배추김치는 김장김치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올랐다.

왜 이 시대에 와서 배추김치가 부각되었을까? 여기에는 조선에 온 중국인들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는 우창칭을 내세워 4500여 명의 군대를 서울로 보낸다. 이로부터 조선에 중국인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했다. 제물포에서는 노동으로, 서울에서는 비단과 잡화 판매로, 그리고 김포 일대에서는 배추 농사로 그들은 생계를 이어갔다. 결국 그들을 통해서 또 다른 배추 품종이 한반도로 들어왔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김장 때마다 온 나라의 주목을 받는 결구(結球) 배추다.

고려시대 때 중국으로부터 들어와서 한반도에 정착한 배추는 비결구 배추였다. 1931년에 발간된 <조선총독부농업시험장 25주년기념지>에서는 “재래배추 중 유명한 것은 경기도 개성의 소위 개성배추와 경성의 경성배추 2품종이다”라고 했다. 또 1920년대에 “개성배추는 비교적 북쪽지방에 많이 보급되었고, 경성배추는 경성 이남 지방에 많이 재배되고 있다”라며 남한의 농민들은 경성배추를 주로 재배한다고 적었다. 경성배추는 다른 말로 앞에서 언급했던 서울배추이다. 그러면서 지부(芝부) 배추와 같은 “결구성 배추 재배가 점차 증가하고 있으나 아직 재래종 재배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지부’는 지금의 중국 산둥성 옌타이다. 20세기 초반에 유명했던 중국배추로는 지부배추를 비롯하여 산동배추·만주배추·금주배추 등이 있었다. 조선의 화교들은 춘절을 앞두고는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제비’로 불렸던 그들은 조선으로 돌아올 때 짐 속에 배추종자를 넣고 돌아왔다. 그래서 이 결구배추의 이름이 ‘호(胡)배추’가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호배추가 재래종 배추에 비해서 수확량이 훨씬 많아서 적극적으로 재배를 권장하였다. 더욱이 화학적인 재배법을 도입할 경우 겨울에 배추를 심어서 봄에도 수확할 수 있기 때문에 농가소득에도 효과적이었다. 1910년을 전후하여 일본에서도 지부배추 재배가 성공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호배추 장려는 당연한 것이었다.

결국 1930년대가 되면 결구배추인 호배추는 조선 전역에서 재배되었다. 1932년 8월17일 동아일보 보도에 의하면, 황해도 장연군의 장연종묘원 주인 김진구는 호배추 종자 채종장을 여러 곳에 설치하여 품종개량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서울배추든지 개성배추든지 비결구배추의 가장 큰 문제는 추위가 빨리 닥치면 11월 중순에도 얼어버린다는 데 있었다. 이에 비해 결구배추인 호배추는 속잎이 꽉 차서 얼더라도 겉잎을 떼어내면 괜찮았다. 그렇지만 호배추의 인기가 급속하게 퍼진 것은 아니다. 조선배추에 비해 감칠맛이 적고 우거지도 많지 않아 전폭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그래서 1960년대까지도 설날 전에 먹을 배추김치는 호배추로 담그고, 그 이후까지 먹을 것은 조선배추로 담가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값비싼 재래종배추에 비해서 호배추는 쌌다. 1970년대 초반 조선배추가 비싸서 서민들은 어쩔 수 없이 양배추로 김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맛은 조선배추로 담근 김치에 비할 게 아니었다. 결국 대량생산의 시대로 접어들었던 1970년대 중반이 되면, 농민들은 화학비료와 농약만 있으면 재배도 수월하고 무게도 많이 나가는 호배추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봄에도 출하할 수 있어 생산자나 소비자 모두가 호배추에 푹 빠졌다. 마침내 1980년대 초반이 되면 호배추로만 김장김치를 담갔다. 당연히 시장에서는 조선배추를 찾기도 어렵게 되었고, 호배추란 이름도 그냥 배추로 바뀌었다. 이제 별도의 뜻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조선배추로 담근 배추김치를 먹기가 쉽지 않다. 이것이 지난 100년 사이에 품종도 조리법도 그 맛도 변해버린 배추김치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