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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100년

[주영하의 음식 100년](7) ‘보양의 상징’ 삼계탕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1987년 8월에 주요 일간지에 실린 소화제 광고는 헤드카피로 ‘삼계탕이 아니고 계삼탕입니다’를 내세웠다. 그 내용은 이렇다.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삼계탕의 본래 이름은 계삼탕(鷄蔘湯)입니다. 유득공의 경도잡지, 김매순의 열양세시기, 홍석모의 동국세시기 등에는 계삼탕에 대한 기록이 두루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우리말 사전에도 ‘어린 햇닭의 내장을 빼고 인삼을 넣어 곤 보약’이라고 계삼탕에 대해 풀이하고 있으니, 삼계탕이란 단어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던 계삼탕이 삼계탕으로 바뀌게 된 것은 6·25동란 이후부터입니다. 본래 양반계급의 음식인지라 대중성이 없었던 계삼탕이 대중음식점에서 음식으로 만들어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삼계탕이라 잘못 불렸던 것입니다.”

이 광고의 카피 문안은 치명적인 오류를 지니고 있다. 조선후기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책인 <경도잡지>, <열양세시기>, <동국세시기>를 아무리 뒤져봐도 계삼탕이란 음식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동국세시기>에서 삼복 음식으로 먹는 구장(狗醬)에 닭을 넣으면 좋다든지, 음력 6월에 먹는 음식으로 “밀로 국수를 만들어 배추의 푸른 잎과 닭고기를 섞고 어저귀국에 말아 먹는다”든지 “미역국에다 닭고기를 섞고 국수를 넣고 물을 약간 쳐서 익혀 먹는다”는 정도의 기록이 나올 뿐이다.

조선시대 전체 시기에 걸쳐서 닭은 계란을 얻기 위해 집에서 키우는 귀중한 가금류였다. 그래서 사위가 와야 계란을 낳는 씨암탉을 잡는다는 말이 생겨났다. 1670년(현종 11년)쯤 안동 장씨가 쓴 <음식디미방>에는 주로 꿩고기를 이용한 음식이 여럿 등장한다. 원래 17세기까지만 해도 음식의 재료로는 닭보다 꿩을 더 높게 여겼다. 꿩도 알을 낳지만 그것이 계란에 버금가지는 못했다. 겨울에 매로 사냥을 해서 잡는 꿩이 없던 여름이 되어야 꿩 대신 닭으로 고기를 삼았다. 그런 사정이 앞의 <동국세시기> 음력 6월편에 담겨 있다.

방신영(1890~1977)이 쓴 1917년 판 <조선요리제법>에서야 비로소 닭이 주재료로 된 닭국이 나온다. 심지어 이용기가 1924년에 펴낸 조리서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닭국과 영계백숙의 두 가지 닭고기 조리법이 적혀 있기도 하다. 사실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 이후 전국의 농촌 가정에서 부업으로 양계를 하도록 적극 권장하였다. 하지만 양계 권장의 목적은 계란을 많이 생산하는 데 있었다. 서유럽을 비롯하여 미국과 일본의 좋은 종계를 보급해서 질 좋은 계란을 생산하도록 유도하였다.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는 수시로 우수한 품종의 암탉과 크고 질이 좋은 계란을 선발하기 위한 가축공진회가 열렸다. 1925년 10월4일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그 전 해에 전국적으로 닭을 1000만마리나 잡았다고 했다. 비록 그 중에서 1만마리는 외국으로 수출되었지만, 조선후기에 상상도 못했던 닭고기 소비가 1920년대에 한반도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조선요리제법>이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닭고기를 이용한 음식이 많이 등장했던 것이다. 아울러 중국요리·일본요리·서양요리의 유행도 닭고기 소비량을 증가시키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렇다면 1917년 판 <조선요리제법>에 나오는 닭국은 어떻게 만드는 음식이었을까? “닭을 잡아 내장을 빼고 발과 날개 끝과 대가리를 잘라버리고 뱃속에 찹쌀 세 숟가락과 인삼가루 한 숟가락을 넣고 쏟아지지 않게 잡아맨 후에 물을 열 보시기쯤 붓고 끓이나리라.” 그런데 1942년 판 <조선요리제법>에는 닭국이 ‘백숙’이란 이름으로 변했다. 그 조리법은 1917년 판과 거의 같지만, 마지막 부분이 다르다. “물을 열 보시기쯤 붓고 끓여 한 보시기쯤 만들어서 짜서 먹나니라”고 했다. 고기는 고기대로 먹지만 먼저 국물을 짜서 약처럼 먹기를 방신영은 권유하고 있다. 사실 백숙은 한자로 ‘白熟’이라고 적는다. 여기서 한자 白에는 ‘그저’라는 뜻이 담겨 있다. 곧 소금이나 간장으로 간을 하지 않고 그냥 익혀서 내는 음식을 가리킨다. 국물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간을 별도로 하지 않았으니, 1942년 판의 음식도 백숙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 소개한 닭국은 한자로 ‘鷄湯(계탕)’이라 적는다고 했다. “닭을 잘 퇴하여 굵게 찍어서 장치고 파를 썰어 넣고 후춧가루를 치고 주물러서 솥에 넣고 물을 조금 치고 볶다가 다시 물을 많이 붓고 무나박을 썰어 놓나니 다 끓은 후에 고춧가루 쳐서 먹나니라.” 여기에서 ‘퇴하여’라는 말은 닭의 털을 뽑기 위해 끓는 물에 잠깐 넣었다가 꺼낸다는 뜻이다. ‘굵게 찍어서 장치고’는 토막을 굵게 내는 것을 말한다. 이 조리법은 한때 ‘닭도리탕’이라고 잘못 불렸던 닭볶음탕이다. 그런데 이용기는 닭국 조리법의 마지막에 또 다른 방법도 적어 두었다. “또는 닭의 내장을 빼고 뱃속에다가 찹쌀 세 숟가락과 인삼가루 한 숟가락을 넣고 꿰매어 끓는 물에 넣고 고와서 먹기도 하나니라.” 이 조리법은 1917년 판 <조선요리제법>의 것과 똑같다.

이용기는 같은 책에서 영계백숙은 “여름에는 제일등 보양하는 것이니 혹 인삼 먹는 이는 삼을 넣어 함께 고아도 매우 좋으니라”고 했다. 여기에서의 삼은 인삼가루가 아니라 수삼일 가능성도 많다. 하지만 그 이름을 결코 계삼탕 혹은 삼계탕이라고 적지 않았다. 심지어 일제시대 출판된 잡지나 신문에서 계삼탕 혹은 삼계탕이란 음식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일은 해방 이후에도 얼마간 계속 되었다.

1948년 7월3일자 경향신문의 2면 하단에는 ‘만나관’이란 영계백숙 전문점에서 낸 광고가 실렸다. 서울 종로구 서린동 89번지에 있었던 천일관 자리에 새로 생긴 이 만나관에서 낮에만 영계백숙을 판다고 했다. ‘천일관’이라고 하면 일제시대에 서울에서 이름이 높았던 요리옥이었다. 해방 정국에서 요리옥의 영업이 잘 될 리 없었으니, 상호도 바꾸고 메뉴도 일품요리인 영계백숙을 내세운 듯하다. 그것도 한여름에 광고를 냈으니 삼복에 맞춘 새로운 메뉴였다. 요리옥의 변신은 서울 명동에 있었던 고려정도 마찬가지였다. 1953년 6월16일자 경향신문 2면 하단에는 구(舊) 고려정이 영계백숙과 백숙백반, 그리고 초밥정식과 구 고려정 냉면을 메뉴로 하여 신장개업을 하였음을 알리는 광고도 실렸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일제시대 이후 줄기차게 진행된 양계업 진흥은 해방 이후 가장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고기로 닭고기를 전면에 나서게 했다. 하지만 닭고기의 소비량 증가가 곧장 계삼탕 혹은 삼계탕을 음식점의 주된 메뉴로 자리 잡게 하지는 못했다. 1950년대까지도 그 이름은 여전히 닭국 혹은 백숙이었다. 인삼이 그 이유를 품고 있다.

모두 알듯이 인삼은 그 가공 여부에 따라서 크게 수삼·백삼·홍삼으로 나뉜다. 수삼은 말리지 아니한 인삼으로 다른 말로 생삼이라고도 부른다. 수삼은 물기가 사라지면 썩어버린다. 그래서 인삼밭에서 캐낸 수삼은 보통 10도 정도에서 10일 정도밖에 보관할 수 없다. 그러니 인삼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서는 백삼이나 홍삼으로 가공을 해야 한다. 백삼은 보통 4년 동안 재배한 수삼의 껍질을 벗겨낸 다음에 햇볕에 말려서 만든다. 이에 비해 홍삼은 그 색깔이 붉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보통 6년 동안 재배한 수삼을 물로 깨끗하게 씻고, 물을 끓인 수증기로 찐다. 이것을 뜨거운 바람에 말린 다음 수분이 12.5~13.5% 정도 남도록 햇볕에 말린다. 홍삼은 보다 오랫동안 인삼을 보관하기 위해서 개발된 결과물이다.

고려시대 이래 홍삼은 중국과 일본에 수출했던 한반도 명산품이었다. 1810년이 되면 인삼을 홍삼으로 가공하는 증포소가 개성에 설치될 정도로 홍삼 수요가 급증하였다. 날이 갈수록 고려인삼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일제시대가 되면 조선총독부도 인삼재배와 백삼과 홍삼 가공에 열을 올렸다. 경찰 출신 조선풍속 전문가 이마무라 도모에(1870~1943)는 인삼의 모든 것을 정리한 <인삼사>란 책 7권을 조선총독부 이름으로 발간할 정도였다. 1910년대가 되면 국내에서도 백삼이나 홍삼이 부자들에게 인기를 모았다. 값이 싼 백삼가루가 바로 1917년 판 <조선요리제법>에 소개된 닭국에 넣는 인삼가루이다.

계삼탕이란 음식이 본격적으로 음식점의 메뉴로 등장하는 때는 1950년대 중반 이후이다. 앞에서 소개한 소화제 광고에서 언급한 대로 한국전쟁 이후에 계삼탕은 대중적인 음식으로 판매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백삼가루로 만든 닭국이었다. 다만 닭국보다는 계삼탕이라 해야 영업을 하는 데 이로웠다. 고려시대 이래 인삼이 누려온 보양제로서의 상징적 힘을 드디어 일반인들도 향유할 수 있다는 판매 전략이 계삼탕이란 말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1960년대가 되면 계삼탕이 삼계탕으로 그 이름을 바꾼다. 아예 닭고기보다 인삼을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전략이었다.

충청남도 금산은 한국전쟁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비로소 남한의 대표적인 인삼시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곳의 나이 든 상인들 이야기에 의하면, 1960년을 전후하여 금산읍의 금성교 근처에는 20여 호의 수삼 판매점이 있었다고 한다. 1966년이 되면 금산시장에 수삼 판매만을 하는 장옥이 자리를 잡았다. 1973년에는 아예 우시장이 서는 자리에 수삼시장이 들어섰다. 냉장고의 보급으로 수삼의 보관 기간이 늘어난 점도 수삼 판매점의 증가를 가져왔다. 여기에 허가제였던 인삼재배를 자율로 풀어준 1965년의 정부 조치도 인삼 생산량 증가와 함께 수삼 보급률을 높였다.

결국 1960년대가 되면 서울을 중심으로 영계백숙을 판매하던 식당들이 삼계탕이란 이름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한여름 무더위를 피해서 서울 세검정유원지나 뚝섬유원지로 피서를 간 가족들은 삼계탕을 사먹으면서 더위를 식혔다. 심지어 1973년이 되면 국내의 한 식품회사가 통조림에 삼계탕을 담아서 동남아로 수출을 하였다. 결국 20세기 이후 줄기차게 진행된 국가의 양계업 진흥과 인삼재배의 확산이 1960년대 이후 삼계탕을 전문 식당에서 판매하는 음식으로 만들었다. 요사이도 삼복이 되면 삼계탕 전문점에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친다. 여전히 보양음식의 속성을 삼계탕이 떨쳐버리지 못한 탓이다. 더욱이 공장과 같은 양계장에서 생산된 닭이 토종닭을 그립게 만든다. 그러니 지금도 그 이름에 삼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