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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100년

[주영하의 음식 100년](5) 개장의 변이, 육개장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조선 선비 사이에도 개고기 기피 많아
ㆍ이름은 개장이로되 쇠고기로 만들어

일제시대에 ‘대구탕반’이란 음식이 있었다. 그 이름만을 놓고 보면 대구 사람들이 즐겨 먹는 국밥이란 뜻이지만, 서울에서도 제법 인기를 모았던 모양이다. 1926년 5월14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서울 공평동에도 대구탕반이란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 식당의 점주가 전라남도 장성 출신이라는 데 있다. 당연히 대구탕반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식당이면 점주 역시 대구 출신이어야 함이 마땅할 터이지만,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서 그런 일이 생겼다. 당시 33세였던 송성언이라는 점주는 본래 사기꾼이었다. 목포의 지주에게 벼 400석을 팔아주겠다고 하고서 그 판돈 8000원을 챙겨서 서울로 와서 대구탕반집을 구입하였다. 아마도 대구탕반집을 운영하고 있으면 그 정체가 쉽게 탄로 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겠지만,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손님들의 신고로 붙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일제시대 서울 사람들 사이에서 대구 명물로 꼽혔던 대구탕반의 정체는 무엇일까? 잡지 ‘별건곤’ 1929년 12월1일자에 실린 ‘대구의 자랑 대구탕반’이란 글이 그 해답을 제공해준다. “대구탕반은 본명이 육개장이다. 대체로 개고기를 한 별미로 보신지재(補身之材)로 좋아하는 것이 일부 조선 사람들의 통성이지만, 특히 남도지방 시골에서는 ‘사돈양반이 오시면 개를 잡는다’고 개장이 여간 큰 대접이 아니다. 이 개장은 기호성과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정까지 살피고 또는 요사이 점점 개가 귀해지는 기미를 엿보아서 생겨난 것이 곧 육개장이니 간단하게 말하자면 쇠고기로 개장처럼 만든 것인데 시방은 큰 발전을 하여 본토인 대구에서 서울까지 진출을 하였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대구탕반은 본래 육개장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었고, 육개장 역시 개장에서 변이된 음식이라는 말이다. 또 이 글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육개장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이유가 개장을 기피하는 사람들 때문이라는 데 있다. 모두 알듯이 개장은 한자로 구장(狗醬)이라 적는다. 요사이 사람들은 이것을 보신탕이니 사철탕이니 하고 부르지만, 그 본래 이름은 개장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개고기를 먹는 한국인은 나쁘다는 주장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흘러나왔고, 정부에서는 서울의 사대문 안에 있던 개장 전문점을 모두 휴업시키는 조치까지 취했던 적이 있었다. 당연히 한국인이 역사 이래 즐겨 먹어온 개고기를 너무 박대한다고 지식인과 매스미디어까지 들고 일어났다.

사실 조선시대 선비들 사이에서도 개고기 먹는 일을 두고 찬반 양론이 있었다. 이유원(1814~1888)의 문집인 <임하필기>에 이런 글이 나온다. “연경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을 뿐 아니라 개가 죽으면 땅에 묻어 준다. 두실 심상규가 연경에 갔을 때 경일(庚日)이 되자 개고기를 삶아 올리도록 하였는데, 연경 사람들이 크게 놀라면서 이상히 여기고는 팔지 않았다. 이에 그릇을 빌려다가 삶았는데 연경 사람들은 그 그릇들도 모조리 내다 버렸다. 내가 북쪽에 갔을 때에 들으니, 예전에 장단 상공 이종성은 남의 집 잔치에 참석했다가 개장을 보고서 먹지 않고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에게 대접하는 음식이 아니다’고 하였다. 두 공의 규모가 각기 달랐다 하겠다.”

심상규(1766~1838)는 정조 때 영의정까지 역임한 노론 시파의 거두였다. 비록 몸은 베이징에 있었지만 삼복이 되자 조선에서의 습관처럼 개장을 먹으려 했다. 삼복에 개장을 먹는 습관은 조선 후기에 한양에서나 지방에서나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심상규와 같은 시대의 유득공(1749~1807)은 서울 풍속을 적은 <경도잡지>에서 개장을 먹고 땀을 내면 더위를 물리치고 허한 기운을 보충할 수 있다고 했다. 심지어 홍석모(1781~1857)는 <동국세시기>에서 개장을 “시장에서도 많이 판다”고 했다. 정조의 즉위를 반대하여 홍인한(1722~1776)이 꾸민 역모에 참여하다 붙잡힌 천민 출신 장사 전흥문의 자백 중에는 대궐 밖에 구가(狗家)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구장을 사먹었다고 했다. 이렇듯 18세기 이래 개장은 한양의 외식업에서 무척 유행했던 음식이었다.

이에 반해 개장 먹는 습관을 두고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이 바로 영조 때의 문신이면서 경상도 암행어사로 이름을 날렸던 이종성(1692~1759)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경기도 장단 출신이었던 그는 개장을 사람이 먹을 음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선시대에도 개는 애완견으로 귀여움을 받았다. 하지만 복날이 되면 주인에게 혹은 ‘개백정’에게 붙잡혀서 고깃덩어리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 이종성 같은 선비는 질색을 했으리라. 앞의 ‘별건곤’에서도 심상규와 같은 사람을 두고 조선 사람들이 가진 ‘공통의 성질’이라고 했다. 하지만 혹시 이종성 같은 양반이 손님으로 오면 주부는 쇠고기로 개장을 끓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 조리법 역시 오로지 개고기를 쇠고기로 대체만 한 것이었을까?

1930년대 보신탕 전문점. 팽구가(烹狗家) 혹은 개장국집이라는 이름이 이채롭다. 1930년대 당시 경성제대 사회학부 교수였던 아키바 다카시가 유리원판 필름으로 촬영한 사진.

사실 조선시대 개고기 조리법은 주로 찌는 방법이었다. <경도잡지>에서는 “개고기를 파의 밑동인 총백과 섞어 푹 찐다. 닭고기나 죽순을 넣으면 맛이 더욱 좋다. 이것을 ‘구장’이라 부른다”고 했다. 다만 “혹 국을 끓여 고춧가루를 뿌려 흰 쌀밥을 말아서 먹기도 한다”고도 했으니, 18~19세기의 개장은 두 가지의 조리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파의 밑동을 시루 밑에 깔고 개고기를 올려서 쪄낸 찜이다. 이 방법이 주류였다. 다른 하나는 국을 끓이는 방법이다. 찜을 먹고 난 다음에 주식을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지금의 서울 옥수동에 살았던 빙허각 이씨(1759~1824)가 쓴 <규합총서>(1809)에서도 이러한 사정은 드러난다. ‘증구법(蒸狗法)’이라고 하여 찌는 방법을 먼저 소개한 후에 국 끓이는 방법을 적었다. “내리 살은 고기 결대로 손으로 찢고 칼을 대지 말고, 내장은 썰어 고쳐 삶은 국에 양념하고 함담을 맞추어 국을 끓이되, 밀가루를 많이 풀면 걸다.”

개장과 달리 육개장 조리법은 1800년대 말에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규곤요람>에서 처음 발견된다. “고기를 썰어서 장을 풀어 물을 많이 붓고 끓이되 썰어 넣은 고기점이 푹 익어 풀리도록 끓인다. 잎을 썰지 않은 파를 그대로 넣고 기름 치고 후춧가루를 넣는다.” 이것은 ‘별건곤’에서 밝힌 대구탕반 조리법과 그 기본은 같다. 다만 후춧가루 대신 고춧가루를 사용한 것이 다르다. “서 말 지기 가마에다 고기를 많이 넣고 곰 고듯이 푹신 고아서 우러난 물로 국을 끓이는데 고춧가루와 소기름을 흠뻑 많이 넣는다.” 여기에 곤 고기를 손으로 알맞게 찢어 국수처럼 하여 넣는다고 했다. 살코기 다루는 방법은 <규합총서>와 똑 같다. 고기를 삶을 때 파를 많이 넣는 점, 고기를 손으로 찢는 방법, 그리고 국에 고춧가루를 넣는 조미법 등이 개장과 육개장을 이어주는 코드이다.

19세기 말 비로소 개고기 대신에 쇠고기를 주재료로 사용한 육개장이 대지주 양반집의 부엌에서 탄생하였다. 육개장은 탄생 이후 개장의 이름만 유지했을 뿐, 그 면모는 완전히 달리했다. ‘별건곤’ 대구탕반 기사의 저자 ‘달성인’은 엄동설한의 육개장 맛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국물을 먼저 먹은 굵다란 파가 둥실둥실 뜨고 기름이 뚝뚝 뜨는 고음 국에다 곤 고기를 손으로 알맞게 지져 넣은 국수도 아니요 국밥도 아닌 혓바닥이 델 만큼 뜨겁고 김이 무럭무럭 떠오르는 시뻘건 장국을 대하고 앉으면 우선 침이 꿀꺽 넘어가고 아무리 엄동설한에 언 얼굴이라도 저절로 풀리고 온몸이 녹아서 근질근질해진다. 어쨌든 대구 육개장은 조선 사람의 특수한 구미를 맞추는 고춧가루와 개장을 본뜬 데 그 본래의 특색이 있다.”

육개장의 대중화는 20세기 들어와서야 가능했다. 그 전에 비해 소를 노동의 도구인 동시에 먹을거리로 생각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에 출판된 요리책에서 육개장은 빠지지 않고 소개되었다. 심지어 1939년 7월8일자 동아일보의 ‘오늘 저녁엔 이런 반찬을’이란 코너에서도 육개장이 소개되었을 정도다. 그래도 육개장은 집에서 만들어 먹기보다는 식당에서 사 먹어야 제 맛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집에서 적은 양을 끓이면 식당에서 먹는 깊은 맛이 잘 나지 않기 때문이다. 1930년대 도쿄나 오사카로 진출한 조선식당에서도 불고기와 함께 육개장을 팔았다. 1950년대 이후 개장 판매 금지가 행정조치로 번번이 행해지면서 육개장은 남자들이 보신을 위해 먹는 음식으로 인기를 끌었다. 심지어 요리연구가들은 닭고기를 이용해서 ‘육계장’이란 음식도 만들어냈다. 이로 인해 식당에서는 육개장을 팔면서도 ‘육계장’이라 적는 일이 생겨났다.

오늘날 대구 사람들은 육개장보다는 따로국밥을 더 좋아한다. 일제시대 대구육개장과 한국전쟁 이후 만들어진 따로국밥은 겉모습이 비슷해 보여도 완전히 다른 음식이다. 개장 만들듯이 살코기를 손으로 찢어야만 육개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개장은 근대 이후에 ‘미개’의 대명사가 되어 조선총독부로부터도 좋지 않은 음식으로 취급되었다. 결국 1940년대 이후가 되면 이름도 ‘보신탕’으로 바뀌는 신세가 되고 만다. 하지만 육개장은 탄생 비밀을 이름 속에 그대로 간직한 채, 어떤 구박도 받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진다. 더욱이 불법의 개고기와 합법의 쇠고기라는 근대적 인식으로 인해서 육개장만이 공적인 영역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인정된다. 개장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씁쓸한 일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