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하얀 쌀밥 위 색색 나물과 고기 조화… 간편해서 더 친근한 ‘한국의 맛’
1931년 양력 설날에 서울 안국동에 사는 안창길은 92세가 되었다. 13세에 창덕궁에 들어가서 침방나인 일을 하기 시작했던 그녀는 줄곧 궁에서 처녀로 살았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장수라서 동아일보 기자가 안창길을 찾았다. 그녀의 식성이 어떠하기에 이렇게 장수하는지를 묻자, 조카며느리는 안창길이 식성이 좋아 무엇이든지 잘 먹지만, 육회를 비롯한 고기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했다. 그 이후 안창길이 몇 세까지 더 살았는지 아직 확인을 못했지만, 그녀의 장수에 육회가 제법 큰 공을 세웠을 가능성이 많다.
모두 알듯이 육회는 소의 살코기나 간·천엽·양 따위를 잘게 썰어 갖은 양념을 하여 날로 먹는 음식을 가리킨다. 서유구(1764~1845)는 <임원경제지·정조지>에서 “고기를 잘게 썬 것을 회라고 부른다. 회는 (회)라고도 하고 割(할)이라고 한다. (중략) 어생(魚生)과 육생(肉生)을 모두 회라고 부른다”고 했다. 비록 조재삼(1808~1866)은 <송남잡지>에서 육고기로 만든 회를 ‘膾’, 생선으로 만든 회를 ‘회’라고 적었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육고기회나 생선회를 모두 회라고 불렀다. 다만 그 재료에 따라서 별도로 우육회(牛肉膾)·동치회(凍雉膾)·복회(鰒膾) 따위로 구분하였을 뿐이다.
사실 지구촌에서 육고기나 생선을 날것으로 즐겨먹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인간이 ‘음식을 조리하는 동물’인 이유는 음식을 익혀서 먹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왜 회를 먹는 데 주저하지 않았을까? 여러가지 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조선시대 주류 지식인이었던 성리학자들이 굳게 믿고 있었던 상고주의와도 관련이 있다. 고대 중국의 고전인 <의례·공경대부례>에는 공경이 대부에게 식사를 대접할 때 특별식으로 우자(牛자)·양자(羊자)·시자(豕자)·우지(牛脂)와 같은 회를 올렸다고 적혀 있다. 비록 명나라 이후 한족들은 결코 회를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여기지 않았지만, 조선에서는 먹어야 하는 음식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육회와 비빔밥의 만남이 바로 육회비빔밥의 탄생을 가져왔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문헌에서 오늘날 육회비빔밥과 비슷한 음식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1929년 12월1일자 잡지 ‘별건곤’ 제24호에 실린 글에서 육회비빔밥을 발견했을 뿐이다. “맛나고 값 헐한 진주비빔밥은 서울비빔밥과 같이 큰 고깃점을 그냥 놓는 것과 콩나물발이 세 치나 되는 것을 넝쿨지게 놓는 것과는 도저히 비길 수 없습니다. 하얀 쌀밥 위에 색을 조화시켜서 날아가는 듯한 새파란 야채 옆에는 고사리나물 또 옆에는 노르스름한 숙주나물 이러한 방법으로 가지각색 나물을 둘러놓은 다음에 고기를 잘게 잘라 끓인 장국을 부어 비비기에 적당할 만큼 그 위에는 유리조각 같은 황 청포 서너 사슬을 놓은 다음 옆에 육회를 곱게 썰어 놓고 입맛이 깔끔한 고추장을 조금 얹습니다.”
이로 미루어 적어도 1920년대 서울비빔밥에도 육회가 올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서울비빔밥에 오른 고기는 잘게 썬 육회가 아니라 큰 고깃덩어리였음도 위 기사는 알려준다. 실제로 앞에서 언급한 우자(牛자)는 산적처럼 크게 썰어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다. 자(자)라는 한자가 크게 썬 고기조각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임원경제지·정조지>에서도 우육회는 마치 나뭇잎처럼 넙적하게 썬 것과 그것을 실처럼 채 썬 것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 서울비빔밥에는 요사이 대구에서 판매되는 뭉티기(뭉텅이의 지방어)라고 불리는 육회와 닮은 쇠고기 덩어리가 올라갔던 모양이다. 이에 비해 진주비빔밥에는 가늘게 채를 썬 육회를 밥 위에 올렸다. 전국의 어디보다도 일찍이 20세기 초반에 도살장이 형성되었던 서울과 진주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다면 육회가 올라가지 않은 비빔밥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1890년대에 쓰인 한글 필사본 조리서 <시의전서>에서는 비빔밥을 ‘부븸밥’이라고 적고 그 만드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밥을 정히 짓고 고기는 재워 볶고 간납은 부쳐 썬다. 각색 나물을 볶아 놓고 좋은 다시마로 튀각을 튀겨서 부숴 놓는다. 밥에 모든 재료를 다 섞고 깨소금과 기름을 많이 넣어 비벼서 그릇에 담는다. 위에는 잡탕거리처럼 계란을 부쳐서 골패 짝만큼씩 썰어 얹는다.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큼씩 빚은 다음 밀가루를 약간 묻혀 계란을 씌워 부쳐 얹는다. 장국은 잡탕국으로 해서 쓴다.”
요사이 한국인이면 고추장이 들어가지 않은 비빔밥을 상상하기 어려운데, 이 책의 비빔밥에는 고추장이 들어가지 않았다. 심지어 갖은 나물과 밥을 미리 비벼서 그릇에 담는다고 적었다. 요즘 식당에서 먹는 비빔밥과도 사뭇 다르다. 왜 그랬을까? <시의전서> 이후에 나오는 조리서의 비빔밥 조리법을 살펴보면 그 비밀을 알 수 있지 않을까?
1921년판 방신영(1890~1977)의 <조선요리제법>에서도 비빔밥을 ‘부빔밥’이라고 적었다. “먼저 밥을 되직하게 지어 큼직한 그릇에 퍼 놓고 무나물·콩나물·숙주나물·도라지나물·미나리나물·고사리나물들을 만들어서 먼저 무나물과 콩나물을 속에 넣고 그 위에 밤을 쏟아 넣은 후 불을 조금씩 때어 덥게 하고 누르미와 산적과 전유어를 잘게 쓸어 넣고 또 각색나물들을 다 넣은 후 기름·깨소금을 치고 젓가락으로 슬슬 저어 비벼서 각각 주발에 퍼 담은 후에 누르미·산적·전유어를 잘게 쓸어 가장자리로 돌려 얹고 또 그 위에 튀각을 부스러트리고 팽란을 잘게 쓸어 얹은 후 알고명을 잘게 쓸어 얹고 고춧가루와 깨소금을 뿌려 놓느니라.”
이 조리법 역시 지금 것과는 사뭇 다를 뿐만 아니라 <시의전서>와도 약간 다르다. 무나물과 콩나물을 솥에 넣고 불을 때면서 그 위에 밥을 비롯하여 각종 재료와 양념을 넣고 젓가락으로 비볐다. 일종의 볶은 비빔밥과 비슷하다. 이것을 주발에 담고서 그 위에 각종 고명거리를 올렸다. 이 책의 조리법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고춧가루를 양념으로 뿌린다는 점이다. 아마도 누르미와 전유어와 같이 생선 지진 것을 고명으로 올렸기 때문에 비린내를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 생긴 듯하다. 하지만 고추장이 당시에도 있었는데 양념으로 사용하라고는 적지 않았다.
1940년에 일본어로 출판된 이하라케이(伊原圭)의 <조선요리>에도 비빔밥 조리법이 나온다. 저자 이하라케이는 조선인 조리학자 손정규(1896~1950?)이다. <조선요리>에 나오는 비빔밥 조리법은 <조선요리제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보통 집안에서 해 먹을 때는, 위에 놓는 고명이 없어도 속에 충분히 섞이어 있으니까 괜찮다”고 했다. 이 대목은 비빔밥의 역사를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가정식 비빔밥과 식당의 비빔밥은 그 만드는 방법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기 때문이다.
식품학자 윤서석은 1977년에 출판된 <한국요리>에서 많은 양의 비빔밥을 한꺼번에 준비하기 위해서는 “애초에 밥을 비벼서 간을 맞추어 담고 웃고명으로 알지단만 뿌리도록 함이 좋다”고 했다. 하지만 “밥은 비빈 후 오래 두면 불어서 맛이 없어지므로 시간을 맞추도록 한다”고도 적었다. 가정식 비빔밥은 먹을 사람이 적고 금방 먹기 때문에 그릇에 담기 전에 미리 비벼 두어도 괜찮다. 이에 비해 식당에서는 수시로 드나드는 손님을 위해서 비빔밥을 미리 비벼두면 안 된다. 근대 외식업의 탄생이 가정식 비빔밥의 면모를 바꾸었다.
앞에서 소개한 잡지 ‘별건곤’의 글은 육회비빔밥의 양념으로 고추장이 사용되었음도 알려준다. 조선후기 문헌에서는 육회나 생선회를 먹을 때 초장이나 겨자장에 찍어 먹는다고 했다. 그런데 일제시대 조리서에서는 좋은 약고추장에 찍어 먹는다(<조선요리제법>)고 했다. 그러니 비빔밥에 육회를 올리면 ‘입맛이 깔끔한 고추장’도 얹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고춧가루와 같은 향신료는 부패의 원인이 되는 미생물을 제균, 살균하는 효과가 있다. 고추장 역시 고춧가루의 기능을 한다. 아직 전기냉장고가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에 요사이처럼 냉장된 육회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당연히 인근의 우시장에서 공급된 육회는 비린 맛이 강했다. 이 비린 맛을 없애기 위해서 육회비빔밥에 고추장이 들어갔다.
1920년대가 되면 고추의 품종이 개량되면서 그 생산량이 더욱 많아졌다. 당연히 고추장도 그 전에 비해 쉽게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육회와 고추장이 비빔밥의 간판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이 되면 식품회사에서도 고추장을 제조하여 팔았다. 그만큼 사람들은 고추장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1977년에 출판된 왕준련의 <한국요리>에서는 “양념한 고추장을 나물과 함께 얹어 내기도 하고 따로 준비하여 식성에 맞도록 먹게 해도 좋다”고 적었다. 1980년대 이후 가정에서나 식당에서나 비빔밥을 먹을 때는 반드시 고추장을 양념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믿음이 생겼다. 냉장고의 보급 덕택에 육회 먹기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되었다.
모두 알듯이 육회는 소의 살코기나 간·천엽·양 따위를 잘게 썰어 갖은 양념을 하여 날로 먹는 음식을 가리킨다. 서유구(1764~1845)는 <임원경제지·정조지>에서 “고기를 잘게 썬 것을 회라고 부른다. 회는 (회)라고도 하고 割(할)이라고 한다. (중략) 어생(魚生)과 육생(肉生)을 모두 회라고 부른다”고 했다. 비록 조재삼(1808~1866)은 <송남잡지>에서 육고기로 만든 회를 ‘膾’, 생선으로 만든 회를 ‘회’라고 적었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육고기회나 생선회를 모두 회라고 불렀다. 다만 그 재료에 따라서 별도로 우육회(牛肉膾)·동치회(凍雉膾)·복회(鰒膾) 따위로 구분하였을 뿐이다.
사실 지구촌에서 육고기나 생선을 날것으로 즐겨먹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인간이 ‘음식을 조리하는 동물’인 이유는 음식을 익혀서 먹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왜 회를 먹는 데 주저하지 않았을까? 여러가지 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조선시대 주류 지식인이었던 성리학자들이 굳게 믿고 있었던 상고주의와도 관련이 있다. 고대 중국의 고전인 <의례·공경대부례>에는 공경이 대부에게 식사를 대접할 때 특별식으로 우자(牛자)·양자(羊자)·시자(豕자)·우지(牛脂)와 같은 회를 올렸다고 적혀 있다. 비록 명나라 이후 한족들은 결코 회를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여기지 않았지만, 조선에서는 먹어야 하는 음식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육회와 비빔밥의 만남이 바로 육회비빔밥의 탄생을 가져왔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문헌에서 오늘날 육회비빔밥과 비슷한 음식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1929년 12월1일자 잡지 ‘별건곤’ 제24호에 실린 글에서 육회비빔밥을 발견했을 뿐이다. “맛나고 값 헐한 진주비빔밥은 서울비빔밥과 같이 큰 고깃점을 그냥 놓는 것과 콩나물발이 세 치나 되는 것을 넝쿨지게 놓는 것과는 도저히 비길 수 없습니다. 하얀 쌀밥 위에 색을 조화시켜서 날아가는 듯한 새파란 야채 옆에는 고사리나물 또 옆에는 노르스름한 숙주나물 이러한 방법으로 가지각색 나물을 둘러놓은 다음에 고기를 잘게 잘라 끓인 장국을 부어 비비기에 적당할 만큼 그 위에는 유리조각 같은 황 청포 서너 사슬을 놓은 다음 옆에 육회를 곱게 썰어 놓고 입맛이 깔끔한 고추장을 조금 얹습니다.”
이로 미루어 적어도 1920년대 서울비빔밥에도 육회가 올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서울비빔밥에 오른 고기는 잘게 썬 육회가 아니라 큰 고깃덩어리였음도 위 기사는 알려준다. 실제로 앞에서 언급한 우자(牛자)는 산적처럼 크게 썰어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다. 자(자)라는 한자가 크게 썬 고기조각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임원경제지·정조지>에서도 우육회는 마치 나뭇잎처럼 넙적하게 썬 것과 그것을 실처럼 채 썬 것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 서울비빔밥에는 요사이 대구에서 판매되는 뭉티기(뭉텅이의 지방어)라고 불리는 육회와 닮은 쇠고기 덩어리가 올라갔던 모양이다. 이에 비해 진주비빔밥에는 가늘게 채를 썬 육회를 밥 위에 올렸다. 전국의 어디보다도 일찍이 20세기 초반에 도살장이 형성되었던 서울과 진주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다면 육회가 올라가지 않은 비빔밥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1890년대에 쓰인 한글 필사본 조리서 <시의전서>에서는 비빔밥을 ‘부븸밥’이라고 적고 그 만드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밥을 정히 짓고 고기는 재워 볶고 간납은 부쳐 썬다. 각색 나물을 볶아 놓고 좋은 다시마로 튀각을 튀겨서 부숴 놓는다. 밥에 모든 재료를 다 섞고 깨소금과 기름을 많이 넣어 비벼서 그릇에 담는다. 위에는 잡탕거리처럼 계란을 부쳐서 골패 짝만큼씩 썰어 얹는다.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큼씩 빚은 다음 밀가루를 약간 묻혀 계란을 씌워 부쳐 얹는다. 장국은 잡탕국으로 해서 쓴다.”
1978년 진주 우시장의 모습. 옛날부터 대규모 우시장이 섰던 진주에서는 신선한 고기를 구하기가 쉬워 육회를 올린 비빔밥이 만들어지게 됐다.
요사이 한국인이면 고추장이 들어가지 않은 비빔밥을 상상하기 어려운데, 이 책의 비빔밥에는 고추장이 들어가지 않았다. 심지어 갖은 나물과 밥을 미리 비벼서 그릇에 담는다고 적었다. 요즘 식당에서 먹는 비빔밥과도 사뭇 다르다. 왜 그랬을까? <시의전서> 이후에 나오는 조리서의 비빔밥 조리법을 살펴보면 그 비밀을 알 수 있지 않을까?
1921년판 방신영(1890~1977)의 <조선요리제법>에서도 비빔밥을 ‘부빔밥’이라고 적었다. “먼저 밥을 되직하게 지어 큼직한 그릇에 퍼 놓고 무나물·콩나물·숙주나물·도라지나물·미나리나물·고사리나물들을 만들어서 먼저 무나물과 콩나물을 속에 넣고 그 위에 밤을 쏟아 넣은 후 불을 조금씩 때어 덥게 하고 누르미와 산적과 전유어를 잘게 쓸어 넣고 또 각색나물들을 다 넣은 후 기름·깨소금을 치고 젓가락으로 슬슬 저어 비벼서 각각 주발에 퍼 담은 후에 누르미·산적·전유어를 잘게 쓸어 가장자리로 돌려 얹고 또 그 위에 튀각을 부스러트리고 팽란을 잘게 쓸어 얹은 후 알고명을 잘게 쓸어 얹고 고춧가루와 깨소금을 뿌려 놓느니라.”
이 조리법 역시 지금 것과는 사뭇 다를 뿐만 아니라 <시의전서>와도 약간 다르다. 무나물과 콩나물을 솥에 넣고 불을 때면서 그 위에 밥을 비롯하여 각종 재료와 양념을 넣고 젓가락으로 비볐다. 일종의 볶은 비빔밥과 비슷하다. 이것을 주발에 담고서 그 위에 각종 고명거리를 올렸다. 이 책의 조리법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고춧가루를 양념으로 뿌린다는 점이다. 아마도 누르미와 전유어와 같이 생선 지진 것을 고명으로 올렸기 때문에 비린내를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 생긴 듯하다. 하지만 고추장이 당시에도 있었는데 양념으로 사용하라고는 적지 않았다.
1940년에 일본어로 출판된 이하라케이(伊原圭)의 <조선요리>에도 비빔밥 조리법이 나온다. 저자 이하라케이는 조선인 조리학자 손정규(1896~1950?)이다. <조선요리>에 나오는 비빔밥 조리법은 <조선요리제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보통 집안에서 해 먹을 때는, 위에 놓는 고명이 없어도 속에 충분히 섞이어 있으니까 괜찮다”고 했다. 이 대목은 비빔밥의 역사를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가정식 비빔밥과 식당의 비빔밥은 그 만드는 방법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기 때문이다.
식품학자 윤서석은 1977년에 출판된 <한국요리>에서 많은 양의 비빔밥을 한꺼번에 준비하기 위해서는 “애초에 밥을 비벼서 간을 맞추어 담고 웃고명으로 알지단만 뿌리도록 함이 좋다”고 했다. 하지만 “밥은 비빈 후 오래 두면 불어서 맛이 없어지므로 시간을 맞추도록 한다”고도 적었다. 가정식 비빔밥은 먹을 사람이 적고 금방 먹기 때문에 그릇에 담기 전에 미리 비벼 두어도 괜찮다. 이에 비해 식당에서는 수시로 드나드는 손님을 위해서 비빔밥을 미리 비벼두면 안 된다. 근대 외식업의 탄생이 가정식 비빔밥의 면모를 바꾸었다.
앞에서 소개한 잡지 ‘별건곤’의 글은 육회비빔밥의 양념으로 고추장이 사용되었음도 알려준다. 조선후기 문헌에서는 육회나 생선회를 먹을 때 초장이나 겨자장에 찍어 먹는다고 했다. 그런데 일제시대 조리서에서는 좋은 약고추장에 찍어 먹는다(<조선요리제법>)고 했다. 그러니 비빔밥에 육회를 올리면 ‘입맛이 깔끔한 고추장’도 얹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고춧가루와 같은 향신료는 부패의 원인이 되는 미생물을 제균, 살균하는 효과가 있다. 고추장 역시 고춧가루의 기능을 한다. 아직 전기냉장고가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에 요사이처럼 냉장된 육회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당연히 인근의 우시장에서 공급된 육회는 비린 맛이 강했다. 이 비린 맛을 없애기 위해서 육회비빔밥에 고추장이 들어갔다.
1920년대가 되면 고추의 품종이 개량되면서 그 생산량이 더욱 많아졌다. 당연히 고추장도 그 전에 비해 쉽게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육회와 고추장이 비빔밥의 간판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이 되면 식품회사에서도 고추장을 제조하여 팔았다. 그만큼 사람들은 고추장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1977년에 출판된 왕준련의 <한국요리>에서는 “양념한 고추장을 나물과 함께 얹어 내기도 하고 따로 준비하여 식성에 맞도록 먹게 해도 좋다”고 적었다. 1980년대 이후 가정에서나 식당에서나 비빔밥을 먹을 때는 반드시 고추장을 양념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믿음이 생겼다. 냉장고의 보급 덕택에 육회 먹기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되었다.
비빔밥은 한국인에게 먹기에 간편한 음식이었다. 고급 음식이었던 육회는 모두가 먹고 싶은 음식이었다. 이 두 가지가 만나서 완성된 육회비빔밥은 한국인의 마음을 오롯이 담고 있다. 그래서 지난 100년 동안 외식업체의 주방에서 이루어진 비빔밥의 진화가 한반도는 물론이고 지구촌 곳곳에서 빛을 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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