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10여시간 정성이 만들어낸 구수함, 그 깊은 국물에 문득 어리는 ‘아버지’
아마도 1900년 이전부터서울 종로의 뒷골목에는 설렁탕집이 여럿 있었을 것 근대도시로 진출한 백정들은 정육점과 설렁탕집을 함께 하며 같은 천민이었던 옹기장이들이 만든 뚝배기에 담아냈다 점잔 빼던 양반들도 이미 그 맛에 반해 있었다 백정 집에 가서 먹으면 체면 구길까봐 배달시켜 먹었다 6·25후 설렁탕은 검은 상혼에 예전에 속 풀어주던 맛 잃기 시작 ‘서울 설넝탕’이여 제자리로 오라
“설넝탕은 물론 사시(四時)에 다 먹지만 겨울에 겨울에도 밤 자정이 지난 뒤에 부르르 떨리는 어깨를 웅숭크리고 설넝탕 집을 찾아가면 우선 김이 물씬물씬 나오는 따스한 기운과 구수한 냄새가 먼저 회를 동하게 한다. 그것이 다른 음식집이라면 제 소위 점잔하다는 사람은 앞뒤를 좀 살펴보느라고 머뭇거리기도 하겠지만, 설넝탕집에 들어가는 사람은 절대로 해방적(解放的)이다. 그대로 척 들어서서 ‘밥 한 그릇 줘’ 하고는 목로 걸상에 걸터 앉으면 일분이 다 못되어 기름기가 둥둥 뜬 뚝배기 하나와 깍두기 접시가 앞에 놓여진다. 파·양념과 고춧가루를 듭신 많이 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가지고 훌훌 국물을 마셔가며 먹는 맛이란 도무지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가 없으며 무엇에다 비할 수가 없다.”
이 글은 1929년 12월1일 ‘별건곤’이란 잡지에 ‘우이생(牛耳生)’이란 필명을 가진 사람이 ‘괄세 못할 경성(京城) 설넝탕’이란 제목으로 쓴 기사의 일부분이다. 이미 근대적 도시의 면모를 갖춘 1920년대 서울에서 설렁탕은 상당한 인기를 누리는 음식이었음을 이 글을 통해 알아차린다.
모두 알 듯이 설렁탕은 쇠머리·사골·도가니를 비롯하여 뼈·사태고기·양지머리·내장 등을 재료로 하여 10시간이 넘도록 푹 끓인 음식이다. 설렁탕의 국물에는 살코기와 뼈에서 우러나온 흰색의 콜로이드(colloid)가 녹아 있기 때문에 그 색이 우윳빛을 띤다. 그래서 일제시대 신문 자료에서는 설렁탕을 설농탕(雪濃湯)이라고도 적었다. 마치 그 색이 눈과 같이 희면서 그 맛은 진하다는 의미가 이 이름에 담겼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에서 무상으로 받은 밀가루로 만든 국수가 설렁탕에 들어가게 되었다. 바로 ‘국수사리’ 추가가 그것이다. 여기에 수육이 새로운 메뉴로 보태지면서 오늘날 전국 어디에서나 성업을 하는 설렁탕집의 메뉴가 완성되었다.
20세기 초반에 조선에 처음 온 일본 지식인 중에서도 설렁탕에 주목한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조선통감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 사회부 기자 우스다 잔운(薄田斬雲·1877~1956)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설렁탕이란 이름을 몰랐던 그는 ‘쇠머리 스프’라고 불렀다. 일본어로 발간된 ‘조선만화’에 나오는 내용 일부를 우리말로 옮겨본다.
“의사들의 감정에 따르면 이 쇠머리 스프는 정말로 좋은 것으로, 닭고기 스프나 우유가 그에 미칠 바가 아니라고 한다. 큰 솥은 일 년 내내 걸쳐져 있으며 바닥까지 아주 깨끗이 씻는 일도 없다. 매일매일 뼈를 교체하고 물을 더 부어서 끓여낸다. 이 국물 즉 스프는 아주 잘 끓여 내린 것으로, 매일 연속해서 끓이기 때문에 여름에도 상하는 일이 없으며 이것을 정제하면 분명히 세계의 어느 것도 비견할 수 없는 자양품(滋養品)이 된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지금 쇠머리 스프를 병에 담아 한국 특유의 수출품으로서 상용하게 될 것이다.”
사실 ‘조선만화’란 책은 조선의 특이하고 이상한 풍경을 조선에 관심이 있는 일본인에게 알려서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조선을 통치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쓰였다. 그 과정에서 설렁탕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이에 대한 평가는 실로 대단하여 설렁탕 예찬론이라고 할 만하다. 이렇게 맛으로 조선인이나 일본인에게나 인기를 누렸던 설렁탕이 언제부터 식당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아직도 서울 종로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설렁탕집도 있으니 아마도 1900년 이전부터 서울 종로의 뒷골목에는 설렁탕집이 여럿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설렁탕은 다른 말로 ‘서울설렁탕’이라고 해야 더 옳다.
김두한의 육성 고백에 의하면, 1930년대 서울 종로 3가 단성사 옆에서 형평사 부회장을 하던 원씨 성을 가진 노인이 설렁탕집을 했다고 한다. 형평사는 1923년 5월 진주에서 백정을 주축으로 한 천민계급이 조직한 단체를 가리킨다. 진주에 사는 백정 이학찬의 아들이 학부형과 학교 측의 반대로 보통학교 입학이 좌절되자, 이에 격분하여 각 지방의 대표 100여명과 회원 500여명이 진주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형평, 즉 평등을 내세우면서 형평사를 조직했다. 푸줏간의 백정들이 연합회를 만든 것이다.
1894년 고종은 개화파의 입장을 수용하여 사민 평등을 법으로 정한 바 있다. 그러나 소를 잡고 쇠고기를 다루는 백정은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회피 대상이었다. 실제 속내는 쇠고기를 좋아해서 어쩔 줄 몰랐지만, 그것을 다루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이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팽배했다. 결국 근대도시로 진출한 백정들은 정육점을 직접 운영하면서 그 부산물로 만드는 설렁탕집을 함께 운영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천민으로 취급되던 옹기 장인들이 만든 뚝배기에 설렁탕을 담아냈고, 그 값도 싸서 서민들이 애용하는 음식이 되었다.
점잔을 빼던 서울 양반들도 이미 설렁탕 맛에 반해 있었다. 하지만 백정이 운영하는 설렁탕집에 직접 가서 먹으려니 천민과 어울리는 꼴이 되어 여간 곤란하지 않았다. 양반뿐만 아니라 최신의 유행을 좇았던 1920년대 모던보이와 모던걸 역시 설렁탕집 출입을 그다지 유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식당에 직접 가지 않고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모습을 본 그들은 설렁탕도 똑같은 방식으로 집에 앉아서 먹었다. 이러한 사정은 앞에서 소개한 ‘별건곤’ 같은 호에 실린 ‘무지의 고통과 설넝탕 신세, 신구 가정생활의 장점과 단점’이란 글을 통해서 짐작하고 남는다.
“이것은 좀 심한 말이라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신가정을 일구는 사람은 하루에 설넝탕 두 그릇을 먹는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하면 청춘부부가 새로 만나서 달콤한 꿈을 꾸고 돈푼이나 넉넉할 적에는 양식집이나 폴락거리고 드나들지만 어찌 돈이 무제한하고 그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만 제공될 리가 있겠습니까. 돈은 넉넉지 못한데다가 아침에 늦잠을 자고 나니 속은 쓰리지만 찬물에 손 넣기가 싫으니까 손쉽게 설넝탕을 주문한답니다. 먹고 나서 얼굴에 분 쪽이나 부치고 나면 자연이 새로 3시가 되니까 그적에는 손을 마주 잡고 구경터나 공원 같은 데로 산보를 다니다가 저녁 늦게 집에를 들어가게 되니까 어느 틈에 밥을 지어먹을 수 없고 또 손쉽게 설넝탕을 사다 먹는답니다. 그래서 하루에 설넝탕 두 그릇이라는 것인데 이것도 물론 신가정의 부류에 속하는 자라고 합니다.”
실제로 1920년대 중반 설렁탕 한 그릇의 값은 10전에서 15전 사이였다. 담배 한 갑이 10전 할 때이니, 설렁탕 한 그릇 값이 담배 한 갑과 거의 맞먹었다. 지금이야 수육이 설렁탕보다 몇 배가 비싸지만, 당시에는 고기를 5전어치 더 달라고 하면 되었다. 이렇게 따져보면 그야말로 설렁탕은 무척 싼 음식이었다. 막노동을 하던 가난한 사람들도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손쉽게 사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이 바로 설렁탕이었다. 더욱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쇠고기가 들어있지 않은가.
여기서 설렁탕의 유래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설렁탕의 유래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의 주장이 있다. 그 하나는 조선시대 임금이 직접 농사짓는 시범을 보이는 장소인 선농단(先農壇)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즉 선농단이 설렁탕이란 발음으로 변했다는 주장이다. 모두에게 두루 알려진 이 이야기는 사실 1940년에 홍선표가 출간한 <조선요리학>이란 책에 나올 뿐,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원나라 때 몽골 음식인 ‘슈루’ 혹은 ‘슐루’가 고려에 전해졌고, 그 말이 변해서 설렁탕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칭기즈칸 당시 이 말은 맛있는 고깃국이라는 뜻이었다.
박제가(1750~1805)는 <북학의>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소 500마리를 도살하고 있다. 국가의 제사나 호궤(牛高饋,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제공하는 특별식)에 쓰기 위해 도살하고, 성균관과 한양 5부 안의 24개 푸줏간, 300여 고을의 관아에서는 빠짐없이 소를 파는 고깃간을 열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각종 제사에 사용한 쇠고기에서 나온 부산물이 설렁탕을 만들어내는 데 일등공신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고기 삶은 국을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육즙이라고 적었다. 다만 고기를 다루던 반인이나 궁중 조리사들 사이에서는 고려 말부터 이 육즙을 설넝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이것이 19세기 말부터 근대적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서울에서 끼니음식으로 판매되었을 것이라 추정해본다. 맛있는 고깃국을 뜻하는 몽골어에서 유래한 ‘설넝’이 20세기가 되면 설넝탕 혹은 설농탕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선농단 유래설보다는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설렁탕은 진면목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진한 유백색이 나오지 않으면 설렁탕이라 여기지 않았고, 어떤 설렁탕집에서는 미국에서 원조로 들어온 분유를 넣어 생산단가를 낮추었다. 또 사골이나 도가니를 넣지 않고 각종 잡뼈를 넣어 국물을 우려내는 식당도 생겨났다. 심지어 원가를 줄이기 위해 물을 계속 붓고, 그러면서 국물 맛을 강하게 내기 위해 화학조미료를 듬뿍 뿌리는 식당도 있었다. 이른바 가짜 설렁탕 사건이 때때로 발생하여 설렁탕 애호가들을 실망시키기 일쑤였다. 이런 탓에 최근 설렁탕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다. 더욱이 설탕이나 사카린으로 절인 깍두기는 그 맛이 달콤해서 사람들에게 그 자리에서 바로 입맛을 돋우지만, 예전에 술 마시고 속을 풀던 설렁탕도 깍두기 국물도 아니어서 한참 후에는 입맛만 버린다. 그래서 “이만하면 서울의 명물이 될 수가 있으며 따라서 조선의 명물이 될 수가 있다”고 했던 1929년 우이생의 예측은 빗나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 서울의 명물 설넝탕이여!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라!
“설넝탕은 물론 사시(四時)에 다 먹지만 겨울에 겨울에도 밤 자정이 지난 뒤에 부르르 떨리는 어깨를 웅숭크리고 설넝탕 집을 찾아가면 우선 김이 물씬물씬 나오는 따스한 기운과 구수한 냄새가 먼저 회를 동하게 한다. 그것이 다른 음식집이라면 제 소위 점잔하다는 사람은 앞뒤를 좀 살펴보느라고 머뭇거리기도 하겠지만, 설넝탕집에 들어가는 사람은 절대로 해방적(解放的)이다. 그대로 척 들어서서 ‘밥 한 그릇 줘’ 하고는 목로 걸상에 걸터 앉으면 일분이 다 못되어 기름기가 둥둥 뜬 뚝배기 하나와 깍두기 접시가 앞에 놓여진다. 파·양념과 고춧가루를 듭신 많이 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가지고 훌훌 국물을 마셔가며 먹는 맛이란 도무지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가 없으며 무엇에다 비할 수가 없다.”
이 글은 1929년 12월1일 ‘별건곤’이란 잡지에 ‘우이생(牛耳生)’이란 필명을 가진 사람이 ‘괄세 못할 경성(京城) 설넝탕’이란 제목으로 쓴 기사의 일부분이다. 이미 근대적 도시의 면모를 갖춘 1920년대 서울에서 설렁탕은 상당한 인기를 누리는 음식이었음을 이 글을 통해 알아차린다.
모두 알 듯이 설렁탕은 쇠머리·사골·도가니를 비롯하여 뼈·사태고기·양지머리·내장 등을 재료로 하여 10시간이 넘도록 푹 끓인 음식이다. 설렁탕의 국물에는 살코기와 뼈에서 우러나온 흰색의 콜로이드(colloid)가 녹아 있기 때문에 그 색이 우윳빛을 띤다. 그래서 일제시대 신문 자료에서는 설렁탕을 설농탕(雪濃湯)이라고도 적었다. 마치 그 색이 눈과 같이 희면서 그 맛은 진하다는 의미가 이 이름에 담겼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에서 무상으로 받은 밀가루로 만든 국수가 설렁탕에 들어가게 되었다. 바로 ‘국수사리’ 추가가 그것이다. 여기에 수육이 새로운 메뉴로 보태지면서 오늘날 전국 어디에서나 성업을 하는 설렁탕집의 메뉴가 완성되었다.
20세기 초반에 조선에 처음 온 일본 지식인 중에서도 설렁탕에 주목한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조선통감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 사회부 기자 우스다 잔운(薄田斬雲·1877~1956)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설렁탕이란 이름을 몰랐던 그는 ‘쇠머리 스프’라고 불렀다. 일본어로 발간된 ‘조선만화’에 나오는 내용 일부를 우리말로 옮겨본다.
“의사들의 감정에 따르면 이 쇠머리 스프는 정말로 좋은 것으로, 닭고기 스프나 우유가 그에 미칠 바가 아니라고 한다. 큰 솥은 일 년 내내 걸쳐져 있으며 바닥까지 아주 깨끗이 씻는 일도 없다. 매일매일 뼈를 교체하고 물을 더 부어서 끓여낸다. 이 국물 즉 스프는 아주 잘 끓여 내린 것으로, 매일 연속해서 끓이기 때문에 여름에도 상하는 일이 없으며 이것을 정제하면 분명히 세계의 어느 것도 비견할 수 없는 자양품(滋養品)이 된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지금 쇠머리 스프를 병에 담아 한국 특유의 수출품으로서 상용하게 될 것이다.”
사실 ‘조선만화’란 책은 조선의 특이하고 이상한 풍경을 조선에 관심이 있는 일본인에게 알려서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조선을 통치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쓰였다. 그 과정에서 설렁탕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이에 대한 평가는 실로 대단하여 설렁탕 예찬론이라고 할 만하다. 이렇게 맛으로 조선인이나 일본인에게나 인기를 누렸던 설렁탕이 언제부터 식당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아직도 서울 종로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설렁탕집도 있으니 아마도 1900년 이전부터 서울 종로의 뒷골목에는 설렁탕집이 여럿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설렁탕은 다른 말로 ‘서울설렁탕’이라고 해야 더 옳다.
‘조선만화’(일한서방·1909) 45쪽에 실린 그림.
1894년 고종은 개화파의 입장을 수용하여 사민 평등을 법으로 정한 바 있다. 그러나 소를 잡고 쇠고기를 다루는 백정은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회피 대상이었다. 실제 속내는 쇠고기를 좋아해서 어쩔 줄 몰랐지만, 그것을 다루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이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팽배했다. 결국 근대도시로 진출한 백정들은 정육점을 직접 운영하면서 그 부산물로 만드는 설렁탕집을 함께 운영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천민으로 취급되던 옹기 장인들이 만든 뚝배기에 설렁탕을 담아냈고, 그 값도 싸서 서민들이 애용하는 음식이 되었다.
점잔을 빼던 서울 양반들도 이미 설렁탕 맛에 반해 있었다. 하지만 백정이 운영하는 설렁탕집에 직접 가서 먹으려니 천민과 어울리는 꼴이 되어 여간 곤란하지 않았다. 양반뿐만 아니라 최신의 유행을 좇았던 1920년대 모던보이와 모던걸 역시 설렁탕집 출입을 그다지 유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식당에 직접 가지 않고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모습을 본 그들은 설렁탕도 똑같은 방식으로 집에 앉아서 먹었다. 이러한 사정은 앞에서 소개한 ‘별건곤’ 같은 호에 실린 ‘무지의 고통과 설넝탕 신세, 신구 가정생활의 장점과 단점’이란 글을 통해서 짐작하고 남는다.
“이것은 좀 심한 말이라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신가정을 일구는 사람은 하루에 설넝탕 두 그릇을 먹는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하면 청춘부부가 새로 만나서 달콤한 꿈을 꾸고 돈푼이나 넉넉할 적에는 양식집이나 폴락거리고 드나들지만 어찌 돈이 무제한하고 그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만 제공될 리가 있겠습니까. 돈은 넉넉지 못한데다가 아침에 늦잠을 자고 나니 속은 쓰리지만 찬물에 손 넣기가 싫으니까 손쉽게 설넝탕을 주문한답니다. 먹고 나서 얼굴에 분 쪽이나 부치고 나면 자연이 새로 3시가 되니까 그적에는 손을 마주 잡고 구경터나 공원 같은 데로 산보를 다니다가 저녁 늦게 집에를 들어가게 되니까 어느 틈에 밥을 지어먹을 수 없고 또 손쉽게 설넝탕을 사다 먹는답니다. 그래서 하루에 설넝탕 두 그릇이라는 것인데 이것도 물론 신가정의 부류에 속하는 자라고 합니다.”
실제로 1920년대 중반 설렁탕 한 그릇의 값은 10전에서 15전 사이였다. 담배 한 갑이 10전 할 때이니, 설렁탕 한 그릇 값이 담배 한 갑과 거의 맞먹었다. 지금이야 수육이 설렁탕보다 몇 배가 비싸지만, 당시에는 고기를 5전어치 더 달라고 하면 되었다. 이렇게 따져보면 그야말로 설렁탕은 무척 싼 음식이었다. 막노동을 하던 가난한 사람들도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손쉽게 사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이 바로 설렁탕이었다. 더욱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쇠고기가 들어있지 않은가.
여기서 설렁탕의 유래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설렁탕의 유래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의 주장이 있다. 그 하나는 조선시대 임금이 직접 농사짓는 시범을 보이는 장소인 선농단(先農壇)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즉 선농단이 설렁탕이란 발음으로 변했다는 주장이다. 모두에게 두루 알려진 이 이야기는 사실 1940년에 홍선표가 출간한 <조선요리학>이란 책에 나올 뿐,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원나라 때 몽골 음식인 ‘슈루’ 혹은 ‘슐루’가 고려에 전해졌고, 그 말이 변해서 설렁탕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칭기즈칸 당시 이 말은 맛있는 고깃국이라는 뜻이었다.
박제가(1750~1805)는 <북학의>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소 500마리를 도살하고 있다. 국가의 제사나 호궤(牛高饋,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제공하는 특별식)에 쓰기 위해 도살하고, 성균관과 한양 5부 안의 24개 푸줏간, 300여 고을의 관아에서는 빠짐없이 소를 파는 고깃간을 열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각종 제사에 사용한 쇠고기에서 나온 부산물이 설렁탕을 만들어내는 데 일등공신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고기 삶은 국을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육즙이라고 적었다. 다만 고기를 다루던 반인이나 궁중 조리사들 사이에서는 고려 말부터 이 육즙을 설넝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이것이 19세기 말부터 근대적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서울에서 끼니음식으로 판매되었을 것이라 추정해본다. 맛있는 고깃국을 뜻하는 몽골어에서 유래한 ‘설넝’이 20세기가 되면 설넝탕 혹은 설농탕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선농단 유래설보다는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설렁탕은 진면목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진한 유백색이 나오지 않으면 설렁탕이라 여기지 않았고, 어떤 설렁탕집에서는 미국에서 원조로 들어온 분유를 넣어 생산단가를 낮추었다. 또 사골이나 도가니를 넣지 않고 각종 잡뼈를 넣어 국물을 우려내는 식당도 생겨났다. 심지어 원가를 줄이기 위해 물을 계속 붓고, 그러면서 국물 맛을 강하게 내기 위해 화학조미료를 듬뿍 뿌리는 식당도 있었다. 이른바 가짜 설렁탕 사건이 때때로 발생하여 설렁탕 애호가들을 실망시키기 일쑤였다. 이런 탓에 최근 설렁탕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다. 더욱이 설탕이나 사카린으로 절인 깍두기는 그 맛이 달콤해서 사람들에게 그 자리에서 바로 입맛을 돋우지만, 예전에 술 마시고 속을 풀던 설렁탕도 깍두기 국물도 아니어서 한참 후에는 입맛만 버린다. 그래서 “이만하면 서울의 명물이 될 수가 있으며 따라서 조선의 명물이 될 수가 있다”고 했던 1929년 우이생의 예측은 빗나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 서울의 명물 설넝탕이여!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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