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추어가 잡히는 가을 문턱에 개업…입소문 타고 손님, 구름 모이듯
1930년대 서울에는 세 곳의 추어탕집이 이름을 날렸다. 그 하나는 신설동의 ‘유명추탕’이다. 유명추탕에서 일하다 독립한 정부봉이 운영한 일명 ‘곰보추탕집’도 명성이 높았는데 안암교 근처에 있었다. 마지막 집은 지금의 헌법재판소 서북쪽 화동에 있었던 황보추탕집이다. 수필가 변영로(1897~1961)도 이 집의 단골이었다. 자신의 음주이력을 적어둔 <명정 40년>이란 책에 황보추탕집은 어김없이 나온다.
“윤(尹)빠에 못지않게 유명한 해정(解酊) 주점이 화동에 있었는데 일컫기를 황보추탕집이라고 하였다.”
지금 사람들 생각에는 추탕집이면 술집이기보다 밥집이 아니었을까 여기겠지만, 적어도 1980년대 이전 사정은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 추탕집의 주된 재료인 추어를 일 년 내내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밥집 겸 술집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시대 잡지 ‘별건곤’ 제9호(1927년 10월1일자)를 보면 그러한 사정을 충분히 짐작하고 남는다. 기사의 제목은 ‘추탕집 머슴으로 이틀 동안의 더부살이’이다. 필명을 B기자라고 밝힌 글쓴이는 한여름 동안 휴업을 했다가 음력 8월에야 다시 문을 연 서울 회동의 H추탕집에서 종업원으로 본인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회동은 화동과 붙어 있다. 아마도 H추탕집은 황보추탕집이었을 것이다.
“제가 본사 C기자의 소개로 이 경성 안에서도 이름 높은 회동 H추탕집으로 더부살이가 되어 오기는 바로 때 좋은 가을 음력 8월 그믐께 서늘 바람나고 더위 물러간 바로 끝이요 여름 내 휴업했다가 이 가을철이 접어 들어오자 다시 개업한 바로 첫날이었습니다. 오래 휴업한 끝이요 처음 개업한 첫머리이니 무슨 시세가 그렇게 있으랴 하였건만 상상과는 아주 딴판이었습니다. 시골 같으면 산이나 들에서 철의 오고가는 것을 얼른 알 수 있지만 서울같이 복잡한 곳에서야 철의 오고가는 것을 얼른 알기는 좀 어렵지 않습니까. (중략) 자기 고향의 가을을 회억(回憶)하며 돌아가기를 빨리 하는 셈으로 술잔에 취미를 가지신 이는 가을 오면 아마 이 추탕(미꼬리탕)을 퍽이나 그리워하는 모양 같습니다. 신문광고를 낸 것도 아니요 포스터를 건 것도 아니요 삐라를 헛친 것도 아니요 아무 소문 없이 그저 슬그머니 개업을 한 모양인데 구름 모이듯 모여드는 손님이야말로 처음 온 머슴에게는 눈이 휘둘릴 만큼 복잡했습니다.”
1920년대 말 서울 추탕집 풍경이 눈에 그려지는 듯하다. 이 글에서 추탕 옆에 적어둔 ‘미꼬리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사이 우리가 먹는 추어탕은 대개 ‘미꾸라지’를 재료로 한다. 사실 미꾸라지와 미꾸리는 엄밀하게 따지면 같은 민물생선이 아니다. 미꾸라지가 미꾸리에 비해 크고 색도 진하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먹었던 추탕의 재료는 미꾸리가 주류였던 모양이다. 1610년경에 집필된 <동의보감·탕액편>에서는 한자로 鰍魚(추어)라고 적고, 한글로 ‘믜꾸리’라고 적었다. 미꾸리를 부르는 다른 한자로는 추魚(추어)가 있다. 鰍魚와 발음이 같아서 물고기 어(魚) 옆에 추(酋)를 붙인 추어는 미꾸라지를 가리킨다. 진흙 속에 산다고 하여 다른 말로 이추(泥추)라고도 불렀다. 1920년대 말 황보추탕집에서는 미꾸리로 추탕을 끓였다.
모두 알 듯이 추어탕 조리법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조선후기 만물박사 이규경(1788~1856)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언급한 추두부탕이다. 열기를 피해 두부 속으로 도망간 추어를 익혀서 참기름에 지져 각종 재료로 탕을 만드는 방법으로 만들었다. 이 방법은 중국의 ‘초선탕원(貂蟬湯圓)’이란 음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특별한 조리법이라 19세기에 왕실에서 고기를 다루던 반인(泮人) 사이에 인기를 누렸을 뿐이다.
보통사람들은 다음의 세 가지 조리법을 널리 썼다. 추어를 삶아서 살만 발라내서 양념하여 끓이는 법, 추어를 삶아서 살과 머리와 뼈도 모두를 으깨서 끓이는 법, 팔팔 끓는 국에 통째로 넣고 익히는 법이 그것이다. 앞의 황보추탕집에서는 제일 마지막 방법을 사용하였다. B기자는 같은 글에서 “지금까지 물통 속에서 펄펄 뛰놀던 수천 수백 마리의 미꼬리 목숨을 잡어다가 장작불에 실컷 끓은 장국 물에 잡아들이는 참혹한 짓이란 더 참말 못하겠습니다”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이용기란 사람이 1924년에 펴낸 조리서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이란 책에는 이 추탕의 구체적인 조리법이 나온다.
“밋구리를 물을 치고 소금을 조금 치면 대단히 요동을 할 것이니 2분 동안만 두었다가 맹물을 두어 번 부어 해감을 다 토하도록 한 연후에 맹물에 업진이나 사태를 녹도록 끓인 후에 고기는 꺼내고 식혀서 양밀가루를 걸쭉하게 풀고 두부를 갸름하고 납작하게 썰고 생강을 껍질을 벗겨 대강 다지고 고추씨를 빼고 다지고 파도 다지고 고비나 표고나 송이버섯을 굵게 찢어 넣고 곱창이나 양도 삶아 썰어 넣고 밀가루 푼 데 모두 넣어 휘저어가며 눋지 않게 끓거든 밋구리를 급히 쏟아 넣고 뚜껑을 얼른 닫았다가 다시 열라. 튀어나오며 죽는 것이 좋지 않느니라. 부드럽게 저어가며 밋구리가 다 익거든 계란을 몇 개든지 개여 풀고 떠내어 먹을 때 후춧가루와 계피가루를 치고 국수를 말아 먹으면 좋으니라.”
장국은 바로 소의 가슴에 붙은 고기인 업진이나 사태를 팔팔 끓인 국이었다. 위의 조리법만 보아도 추탕의 맛이 기름지면서 걸쭉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황보추탕집에서는 미꾸리를 어떻게 확보했을까? B기자의 글에서는 미꾸리를 전문적으로 공급해주는 장사가 있다고 했다. 사실 미꾸리나 미꾸라지는 주로 강 하류의 물 흐름이 느린 곳이나 연못처럼 물이 고여 있는 곳에 주로 산다. 1993년 7월29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1920년대 말에 서울 종로5가로 이사 온 선산 김씨 다섯 형제들이 동대문 밖 신설동 경마장 옆에서 시작한 식당이 ‘유명추탕집’이다. 당시만 해도 청계천 지류에 미나리꽝이 많았는데 여기에서 미꾸리를 잡아서 추탕을 팔았다. 본래 상호도 간판도 없었는데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으면서 추탕으로 유명하다고 하여 ‘유명추탕’이 되었다. 하지만 일 년 내내 추탕을 판매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때는 술과 안주를 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형제주점’이란 상호다.
1963년 9월12일자 경향신문에는 추탕으로 유명한 서울의 명물 형제주점이 팔린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대로 형제주점은 문을 닫았다가 1980년대 후반에 미아3거리 뒷골목에 이 집의 막내가 다시 문을 열었다. 지금도 그 집에 걸려 있는 일제시대 사진 한 장은 형제주점의 역사를 짐작케 한다. 사진에 담겨 있는 이야기는 이러하다. 1935년 어린이날인 5월5일에 서울 장충단에서는 상공연합대운동회가 열렸다. 이 운동회가 끝난 다음에 식당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사진이 바로 이것이다. 사진 속의 간판은 두 개다. 하나에는 유명추탕(有名鰍湯), 다른 하나에는 형제주점이라 적었다.
상공인운동회라 소속 회사나 영업점이 있어야 참가가 가능했다. 형제주점에서도 단체로 이날 행사에 참가했다. 형제 중 한 명인 김윤창은 자전거 경주에, 종업원 김한갑은 200m 달리기에 나갔다. 운동회의 종목 중에는 특이하게도 ‘조추경주(釣鰍競走)’란 것도 있었다. 한자로 보아 추어낚시대회이다. 형제주점의 안장성이 이 대회에 나갔다.
이날 운동회 종목에 추어낚시대회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먼저 추어탕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으면 추어낚시라는 종목이 생겼겠는가! 그런데 자연산 추어를 5월5일에 맞추어 어디에서 이렇게 구했을까 궁금해진다. 동아일보 1932년 5월12일자에 그 해답이 있다. 조선부업협회에서는 부업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산업을 소개하면서 ‘미꾸이 도전(稻田)양식’을 언급하였다. 특히 모내기를 하고 나서 약 7일 후에 전년생 새끼를 논에 방양(放養)하면 좋다고 적었다. 그러니 5월5일에는 제법 잘 자란 추어들이 운동회에 등장할 수 있었다.
사료도 별도로 필요하다고 했다. 자연사료만으로 발육이 안 되기 때문에 콩깻묵이나 누에고치 말린 것, 혹은 달팽이·모시조개·멸치, 심지어 쌀겨나 밀가루 혹은 비지 등을 뿌려주면 미꾸이가 잘 자란다고 적었다.
“윤(尹)빠에 못지않게 유명한 해정(解酊) 주점이 화동에 있었는데 일컫기를 황보추탕집이라고 하였다.”
지금 사람들 생각에는 추탕집이면 술집이기보다 밥집이 아니었을까 여기겠지만, 적어도 1980년대 이전 사정은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 추탕집의 주된 재료인 추어를 일 년 내내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밥집 겸 술집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시대 잡지 ‘별건곤’ 제9호(1927년 10월1일자)를 보면 그러한 사정을 충분히 짐작하고 남는다. 기사의 제목은 ‘추탕집 머슴으로 이틀 동안의 더부살이’이다. 필명을 B기자라고 밝힌 글쓴이는 한여름 동안 휴업을 했다가 음력 8월에야 다시 문을 연 서울 회동의 H추탕집에서 종업원으로 본인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회동은 화동과 붙어 있다. 아마도 H추탕집은 황보추탕집이었을 것이다.
“제가 본사 C기자의 소개로 이 경성 안에서도 이름 높은 회동 H추탕집으로 더부살이가 되어 오기는 바로 때 좋은 가을 음력 8월 그믐께 서늘 바람나고 더위 물러간 바로 끝이요 여름 내 휴업했다가 이 가을철이 접어 들어오자 다시 개업한 바로 첫날이었습니다. 오래 휴업한 끝이요 처음 개업한 첫머리이니 무슨 시세가 그렇게 있으랴 하였건만 상상과는 아주 딴판이었습니다. 시골 같으면 산이나 들에서 철의 오고가는 것을 얼른 알 수 있지만 서울같이 복잡한 곳에서야 철의 오고가는 것을 얼른 알기는 좀 어렵지 않습니까. (중략) 자기 고향의 가을을 회억(回憶)하며 돌아가기를 빨리 하는 셈으로 술잔에 취미를 가지신 이는 가을 오면 아마 이 추탕(미꼬리탕)을 퍽이나 그리워하는 모양 같습니다. 신문광고를 낸 것도 아니요 포스터를 건 것도 아니요 삐라를 헛친 것도 아니요 아무 소문 없이 그저 슬그머니 개업을 한 모양인데 구름 모이듯 모여드는 손님이야말로 처음 온 머슴에게는 눈이 휘둘릴 만큼 복잡했습니다.”
1920년대 말 서울 추탕집 풍경이 눈에 그려지는 듯하다. 이 글에서 추탕 옆에 적어둔 ‘미꼬리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사이 우리가 먹는 추어탕은 대개 ‘미꾸라지’를 재료로 한다. 사실 미꾸라지와 미꾸리는 엄밀하게 따지면 같은 민물생선이 아니다. 미꾸라지가 미꾸리에 비해 크고 색도 진하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먹었던 추탕의 재료는 미꾸리가 주류였던 모양이다. 1610년경에 집필된 <동의보감·탕액편>에서는 한자로 鰍魚(추어)라고 적고, 한글로 ‘믜꾸리’라고 적었다. 미꾸리를 부르는 다른 한자로는 추魚(추어)가 있다. 鰍魚와 발음이 같아서 물고기 어(魚) 옆에 추(酋)를 붙인 추어는 미꾸라지를 가리킨다. 진흙 속에 산다고 하여 다른 말로 이추(泥추)라고도 불렀다. 1920년대 말 황보추탕집에서는 미꾸리로 추탕을 끓였다.
모두 알 듯이 추어탕 조리법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조선후기 만물박사 이규경(1788~1856)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언급한 추두부탕이다. 열기를 피해 두부 속으로 도망간 추어를 익혀서 참기름에 지져 각종 재료로 탕을 만드는 방법으로 만들었다. 이 방법은 중국의 ‘초선탕원(貂蟬湯圓)’이란 음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특별한 조리법이라 19세기에 왕실에서 고기를 다루던 반인(泮人) 사이에 인기를 누렸을 뿐이다.
보통사람들은 다음의 세 가지 조리법을 널리 썼다. 추어를 삶아서 살만 발라내서 양념하여 끓이는 법, 추어를 삶아서 살과 머리와 뼈도 모두를 으깨서 끓이는 법, 팔팔 끓는 국에 통째로 넣고 익히는 법이 그것이다. 앞의 황보추탕집에서는 제일 마지막 방법을 사용하였다. B기자는 같은 글에서 “지금까지 물통 속에서 펄펄 뛰놀던 수천 수백 마리의 미꼬리 목숨을 잡어다가 장작불에 실컷 끓은 장국 물에 잡아들이는 참혹한 짓이란 더 참말 못하겠습니다”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이용기란 사람이 1924년에 펴낸 조리서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이란 책에는 이 추탕의 구체적인 조리법이 나온다.
“밋구리를 물을 치고 소금을 조금 치면 대단히 요동을 할 것이니 2분 동안만 두었다가 맹물을 두어 번 부어 해감을 다 토하도록 한 연후에 맹물에 업진이나 사태를 녹도록 끓인 후에 고기는 꺼내고 식혀서 양밀가루를 걸쭉하게 풀고 두부를 갸름하고 납작하게 썰고 생강을 껍질을 벗겨 대강 다지고 고추씨를 빼고 다지고 파도 다지고 고비나 표고나 송이버섯을 굵게 찢어 넣고 곱창이나 양도 삶아 썰어 넣고 밀가루 푼 데 모두 넣어 휘저어가며 눋지 않게 끓거든 밋구리를 급히 쏟아 넣고 뚜껑을 얼른 닫았다가 다시 열라. 튀어나오며 죽는 것이 좋지 않느니라. 부드럽게 저어가며 밋구리가 다 익거든 계란을 몇 개든지 개여 풀고 떠내어 먹을 때 후춧가루와 계피가루를 치고 국수를 말아 먹으면 좋으니라.”
장국은 바로 소의 가슴에 붙은 고기인 업진이나 사태를 팔팔 끓인 국이었다. 위의 조리법만 보아도 추탕의 맛이 기름지면서 걸쭉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황보추탕집에서는 미꾸리를 어떻게 확보했을까? B기자의 글에서는 미꾸리를 전문적으로 공급해주는 장사가 있다고 했다. 사실 미꾸리나 미꾸라지는 주로 강 하류의 물 흐름이 느린 곳이나 연못처럼 물이 고여 있는 곳에 주로 산다. 1993년 7월29일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1920년대 말에 서울 종로5가로 이사 온 선산 김씨 다섯 형제들이 동대문 밖 신설동 경마장 옆에서 시작한 식당이 ‘유명추탕집’이다. 당시만 해도 청계천 지류에 미나리꽝이 많았는데 여기에서 미꾸리를 잡아서 추탕을 팔았다. 본래 상호도 간판도 없었는데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으면서 추탕으로 유명하다고 하여 ‘유명추탕’이 되었다. 하지만 일 년 내내 추탕을 판매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때는 술과 안주를 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형제주점’이란 상호다.
70년간 명맥 이어온 종로구 평창동 형제추어탕|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상공인운동회라 소속 회사나 영업점이 있어야 참가가 가능했다. 형제주점에서도 단체로 이날 행사에 참가했다. 형제 중 한 명인 김윤창은 자전거 경주에, 종업원 김한갑은 200m 달리기에 나갔다. 운동회의 종목 중에는 특이하게도 ‘조추경주(釣鰍競走)’란 것도 있었다. 한자로 보아 추어낚시대회이다. 형제주점의 안장성이 이 대회에 나갔다.
이날 운동회 종목에 추어낚시대회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먼저 추어탕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으면 추어낚시라는 종목이 생겼겠는가! 그런데 자연산 추어를 5월5일에 맞추어 어디에서 이렇게 구했을까 궁금해진다. 동아일보 1932년 5월12일자에 그 해답이 있다. 조선부업협회에서는 부업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산업을 소개하면서 ‘미꾸이 도전(稻田)양식’을 언급하였다. 특히 모내기를 하고 나서 약 7일 후에 전년생 새끼를 논에 방양(放養)하면 좋다고 적었다. 그러니 5월5일에는 제법 잘 자란 추어들이 운동회에 등장할 수 있었다.
사료도 별도로 필요하다고 했다. 자연사료만으로 발육이 안 되기 때문에 콩깻묵이나 누에고치 말린 것, 혹은 달팽이·모시조개·멸치, 심지어 쌀겨나 밀가루 혹은 비지 등을 뿌려주면 미꾸이가 잘 자란다고 적었다.
이렇게 미꾸라지를 양식하는 방법은 가장 쉽지만 그다지 이익이 나지 않았다. 그냥 볏논에서 양식을 하다 보니 관리가 잘 되지 않아서 죽는 사례가 많았다. 심지어 뱀이나 개구리와 같은 다른 생물의 먹잇감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고안한 방법이 콘크리트로 아예 인공 못을 만들어서 미꾸라지를 양식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 농가에 소개되었고, 1970년대가 되면서 널리 퍼졌다. 특히 1970년 7월 정부의 수산청에서는 일본의 지바현으로부터 일본 미꾸라지 1만마리를 기증받아 양식을 시도하였다. 재래종 미꾸라지보다 훨씬 크고 잘 자랐다. 전국의 20여군데에 일본 미꾸라지 양식장이 만들어졌고, 1970년대 중반이 되면 이 미꾸라지 양식업은 전국의 농가에서 널리 행하는 부업이 되었다. 결국 먹고 사는 형편도 나아진 1980년대 이후 우리는 사시사철 지역 이름이 붙은 추어탕집에서 추어탕을 먹게 되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추석이 지나면 재래종 미꾸리로 끓인 추탕 맛에 입맛을 다셨던 1930년대 식객들의 미각이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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