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개성 부인네의 조미법이 빚은 ‘맛의 황홀경’
“개성 편수 중에도 빈한한 집에서 아무렇게나 만들어서 편수 먹는다는 기분만 맛보는 것 같은 그런 편수는 서울 종로통 음식점에서 일금 20전에 큰 대접으로 하나씩 주는 만두 맛만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고기라고는 거의 없고, 숙주와 두부의 혼합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남들이 일컬어 주는 개성 편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 편수 속의 주성물은 우육·돈육·계육·생굴·잣·버섯·숙주나물·두부 그 외의 양념 등 이렇게 여러 가지 종류이다. 이것들을 적당한 분량씩 배합하여 넣되 맛있는 것을 만들려면 적어도 숙주와 두부의 합친 분량이 전체 분량의 3분의 1을 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으로 정말 맛있다는 개성편수는 그리 염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은 1929년 12월1일자 ‘별건곤’ 잡지에 ‘천하진미 개성의 편수’란 제목으로 실린 것이다. 필자는 진학포인데, 아마도 필명으로 여겨진다. 다른 신문에서 진학포는 ‘호떡장사덕성이’(동아일보·1929), ‘크리스마스의 순길’(동아일보·1930), ‘심청의 이야기’(매일신보·1934), ‘용왕의 구슬’(매일신보·1934)과 같은 동화를 연재하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1920~30년대의 동화작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의 본명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다만 ‘별건곤’의 기사를 통해서 진학포란 인물이 적어도 개성 출신임은 분명해 보인다. 개성편수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 때문이다.
그렇다면 편수는 어떻게 만드는 음식일까? 1890년대에 쓰인 한글 필사본 조리서 <시의전서>에 그 조리법이 나온다. “밀가루를 냉수에 반죽하여 얇게 밀어 네모반듯하게 자르되 너무 작게 하지 않고 소는 만두소처럼 만들어 귀를 걸어 싸서 네모반듯하게 하되 혀를 꼭 붙게 하여 삶는 법도 만두와 같으니라”고 했다. 같은 책에 나오는 ‘만두’에서 편수의 소 만드는 방법을 짐작할 수 있다. “소감으로는 쇠고기·꿩고기·돼지고기·닭고기를 모두 쓴다. 미나리·숙주·무는 다 삶고 두부와 배추김치는 다지고, 고기도 다진다. 다진 채소와 두부·닭고기에 파·생강·마늘·고춧가루·깨소금·기름을 넣어 간을 맞추어 양념한다. 기름을 많이 넣고 속에 잣을 두어 개씩 넣어서 아주 얇게 빚어 고기 장국에 삶는다. 만두는 물이 팔팔 끓을 때 넣어 솥뚜껑을 덮지 않고 삶는데, 만두가 둥둥 뜨거든 건져서 합 그릇에 담아 후춧가루를 뿌린다.”
<시의전서>의 저자는 편수와 만두는 그 소나 삶는 방법에서는 다를 바가 없지만, 다만 편수의 모양이 네모반듯한 데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진학포가 예찬했던 개성편수에 들어가는 소는 <시의전서>의 만두와는 약간 다르다. “여러 가지 물건이 개성 부인네의 특수한 조미법으로 잘 조미되어 똑 알맞게 익어서 그것이 우리들 입 속으로 들어갈 때 그 맛이 과연 어떠할까. 세 가지 고기 맛, 굴과 잣 맛, 숙주와 두부 맛들이 따로따로 나는 것이 아니요 그 여러 가지가 잘 조화되어서 그 여러 가지 맛 중에서 좋은 부분만이 한데 합쳐져서 새로운 맛을 이루어서 우리 목구멍으로 녹아 넘어가는 것이니 그 새로운 조화된 맛 그것이 개성편수 맛이다”라고 했다. 편수는 여름에 차갑게 해서 먹는 음식이었다. 소의 식감을 만끽하기 위해서 보통 초장에 찍어 먹었다.
2008년 북한의 근로단체출판사에서 발행한 <우리 민족료리>에서도 편수를 개성음식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편수라는 이름은 물에 삶아 건져낸 것이라는 뜻에서 생겼다고 밝혔다. 보통 편수는 한자로 ‘片水’라고 적는다. 물 위에 조각이 떠 있는 모양이라고 하여 이런 한자 이름이 생겨났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1870년쯤 쓰인 책으로 알려진 황필수의 <명물기략>에서는 편식(편食)을 편수로 잘못 읽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했다. 중국 명나라 때의 궁중 풍속을 적은 유약우(1541~?)의 <작중지>에서도 음력 정월 초하룻날 끓는 물에 익힌 교자인 편식을 먹는다고 적었다. ‘편食’이나 ‘扁食’은 같은 뜻이다. 명나라 사람들은 지금의 중국음식 수교자를 편식이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조선시대 개성상인인 송상들은 지금의 베이징인 연경으로 조선 사신들이 떠날 때 인삼을 가지고 갔다. 그 과정에서 편식을 알았고, 19세기가 되면 개성의 독특한 음식으로 편수가 자리를 잡았다. 그 모양도 송상의 의지를 담은 듯 보자기로 소를 싸듯이 생겼다. 그래서 이름도 편수로 바뀌었다.
따지고 보면 편수 역시 만두의 일종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먹는 ‘만두’는 속이 들어간 것과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나뉜다. 속이 들어가지 않은 것은 다른 말로 백만두라고 불렀고, 속이 들어간 것은 교자 혹은 포자 혹은 편식이라고 불렀다. 일찍부터 밀가루 음식이 발달했던 베이징을 비롯한 화북지역 사람들에게 만두는 곧 백만두였다. 지금도 속이 들어가고 끓는 물에 삶는 것은 교자 중에서도 수교자라고 부른다. 한국어로는 물만두이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물만두와 같이 국물이 있는 만두를 한자로 ‘餠匙(병시)’라고 적었다. 여기에서 ‘병’은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총칭해서 병(餠)이라고 불렀던 한나라 이후의 관습을 따른 것이다. ‘병시’는 반드시 밀가루로 만든 피로 속을 감싸야 한다고 믿었다. 편수 역시 ‘수저로 떠먹는 밀가루로 만든 병’이란 뜻을 담고 있는 병시의 한 가지였다.
당연히 편수를 먹기 위해서는 밀가루를 쉽게 확보할 수 있어야 했다. 모두 알듯이 밀은 연간 평균 기온이 3.8도이면서 여름 평균 기온이 14도 이상인 지역에서 재배되어야 품질도 좋고 생산량도 많다. 한반도는 품질 좋은 밀을 생산하기에 적합한 지역은 아니다. 그래도 재래종 밀은 조선시대에도 재배되었다. 하지만 밀농사가 가능한 곳이라고 해도 벼농사가 마무리되는 늦가을에야 파종을 하였다. 품질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산량 역시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궁중에서나 부자들만이 겨우 품질 좋은 밀가루를 확보하여 편수를 비롯하여 밀가루 피로 만든 만두를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만약 밀가루를 구하지 못할 경우 메밀가루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그래서 조선 후기의 조리서에서는 대부분 메밀가루로 피를 만든다고 적었다. 심지어 육만두·어만두·동아만두와 같이 아예 피를 쇠고기·생선·동과로 만들기까지 했다.
1931년에 발간된 <조선총독부농업시험장 25주년기념지>에 의하면, 조선의 재래종 밀은 황해도·평안남도·강원도에서 주로 많이 생산된다고 했다. 특히 황해도에서 그 생산량이 가장 많았다. 재래종 밀 중에서 그 품종이 가장 좋은 것 역시 황해도에서 재배되는 것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서 개성 사람들은 밀가루 피로 편수를 만들 수 있었다. <시의전서>에서는 밀만두가 곧 편수라고 적었다. 조선 후기에도 개성의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두부와 숙주만으로 소를 만들어서 비교적 풍부한 밀가루로 만든 피로 보쌈김치 싸듯이 편수를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개성의 부자들은 그것을 시샘하여 온갖 고기와 생굴까지 넣은 소로 자신들만의 개성편수를 만들었다.
이러다 보니 개성편수는 20세기가 되어도 결코 대중음식으로 변신하지 못했다. 이에 비해 교자와 포자로 불렸던 만두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대중화의 길을 걸었다. 만두의 대중화에는 밀 품종의 개량과 적극적인 재배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실 조선총독부는 처음에 밀농사를 권장하기보다는 러시아와 중국으로부터 밀가루를 수입하는 정책을 펼쳤다. 1910년대만 해도 한반도는 그들에게 쌀의 보급기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식량의 중요성을 자각한 조선총독부는 1923년부터 재래밀의 품종 개량에 나섰다. 수원소맥 6호를 필두로 하여 생산량이 많은 품종이 속속 만들어져 농촌에 보급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사람들에게 밀가루는 그 전에 비해 훨씬 구하기 쉬운 식재료로 자리를 잡았다.
만두의 대중화 길에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에 제물포와 서울로 이주를 해온 산둥 출신 중국인들도 있었다. 외국에 나가도 집단거주를 하는 화교들이지만, 19세기 말에 한반도로 이주해온 중국인들은 ‘제비’라는 별명을 가진 남자들 위주의 유동인구 집단이었다. 1920년대가 되어도 재조선 중국인들은 보통 남자 10명에 여자 1~2명의 비율이었다. 이러니 중국인 집단 거주지 내에는 남자를 위한 식당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들은 가정집의 한 모퉁이나 상점의 한 쪽을 빌려서 서너 개의 식탁을 갖추고 영업을 했다. 그들이 판매했던 음식 역시 끼니 위주의 지극히 간단한 것들이었다. 곧 자장면과 전병(호떡) 그리고 교자가 주요 메뉴였다.
근대도시 서울로 이사를 온 황해도와 평안도 출신 사람들 역시 만두의 또 다른 대중화에 기여했다. 개성편수 예찬론자 진학포가 당시 서울 종로에서 일금 20전에 큰 대접으로 하나씩 주는 만두가 바로 평안도 만두다. 조선 최초의 맛 기행 책인 <도문대작>을 쓴 허균(1569~1618)은 “대만두는 의주 사람들이 중국 사람처럼 잘 만든다”고 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더욱 소가 많이 들어간 대만두가 인기를 모았다. 일제시대에 일본인 거주 지역이었던 서울의 장충동·충무로·필동 일대에는 1945년 연말이 되자 적산가옥 천지가 되었다. 평양이 공산화의 길로 가는 모습을 일찌감치 눈치 챈 평안도의 부자들은 이 적산가옥으로 이사를 왔다. 오늘날까지도 장충동과 충무로, 그리고 필동 일대에 평안도식의 대만두를 파는 ‘면옥’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글은 1929년 12월1일자 ‘별건곤’ 잡지에 ‘천하진미 개성의 편수’란 제목으로 실린 것이다. 필자는 진학포인데, 아마도 필명으로 여겨진다. 다른 신문에서 진학포는 ‘호떡장사덕성이’(동아일보·1929), ‘크리스마스의 순길’(동아일보·1930), ‘심청의 이야기’(매일신보·1934), ‘용왕의 구슬’(매일신보·1934)과 같은 동화를 연재하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1920~30년대의 동화작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의 본명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다만 ‘별건곤’의 기사를 통해서 진학포란 인물이 적어도 개성 출신임은 분명해 보인다. 개성편수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 때문이다.
그렇다면 편수는 어떻게 만드는 음식일까? 1890년대에 쓰인 한글 필사본 조리서 <시의전서>에 그 조리법이 나온다. “밀가루를 냉수에 반죽하여 얇게 밀어 네모반듯하게 자르되 너무 작게 하지 않고 소는 만두소처럼 만들어 귀를 걸어 싸서 네모반듯하게 하되 혀를 꼭 붙게 하여 삶는 법도 만두와 같으니라”고 했다. 같은 책에 나오는 ‘만두’에서 편수의 소 만드는 방법을 짐작할 수 있다. “소감으로는 쇠고기·꿩고기·돼지고기·닭고기를 모두 쓴다. 미나리·숙주·무는 다 삶고 두부와 배추김치는 다지고, 고기도 다진다. 다진 채소와 두부·닭고기에 파·생강·마늘·고춧가루·깨소금·기름을 넣어 간을 맞추어 양념한다. 기름을 많이 넣고 속에 잣을 두어 개씩 넣어서 아주 얇게 빚어 고기 장국에 삶는다. 만두는 물이 팔팔 끓을 때 넣어 솥뚜껑을 덮지 않고 삶는데, 만두가 둥둥 뜨거든 건져서 합 그릇에 담아 후춧가루를 뿌린다.”
<시의전서>의 저자는 편수와 만두는 그 소나 삶는 방법에서는 다를 바가 없지만, 다만 편수의 모양이 네모반듯한 데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진학포가 예찬했던 개성편수에 들어가는 소는 <시의전서>의 만두와는 약간 다르다. “여러 가지 물건이 개성 부인네의 특수한 조미법으로 잘 조미되어 똑 알맞게 익어서 그것이 우리들 입 속으로 들어갈 때 그 맛이 과연 어떠할까. 세 가지 고기 맛, 굴과 잣 맛, 숙주와 두부 맛들이 따로따로 나는 것이 아니요 그 여러 가지가 잘 조화되어서 그 여러 가지 맛 중에서 좋은 부분만이 한데 합쳐져서 새로운 맛을 이루어서 우리 목구멍으로 녹아 넘어가는 것이니 그 새로운 조화된 맛 그것이 개성편수 맛이다”라고 했다. 편수는 여름에 차갑게 해서 먹는 음식이었다. 소의 식감을 만끽하기 위해서 보통 초장에 찍어 먹었다.
2008년 북한의 근로단체출판사에서 발행한 <우리 민족료리>에서도 편수를 개성음식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편수라는 이름은 물에 삶아 건져낸 것이라는 뜻에서 생겼다고 밝혔다. 보통 편수는 한자로 ‘片水’라고 적는다. 물 위에 조각이 떠 있는 모양이라고 하여 이런 한자 이름이 생겨났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1870년쯤 쓰인 책으로 알려진 황필수의 <명물기략>에서는 편식(편食)을 편수로 잘못 읽어서 생긴 이름이라고 했다. 중국 명나라 때의 궁중 풍속을 적은 유약우(1541~?)의 <작중지>에서도 음력 정월 초하룻날 끓는 물에 익힌 교자인 편식을 먹는다고 적었다. ‘편食’이나 ‘扁食’은 같은 뜻이다. 명나라 사람들은 지금의 중국음식 수교자를 편식이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조선시대 개성상인인 송상들은 지금의 베이징인 연경으로 조선 사신들이 떠날 때 인삼을 가지고 갔다. 그 과정에서 편식을 알았고, 19세기가 되면 개성의 독특한 음식으로 편수가 자리를 잡았다. 그 모양도 송상의 의지를 담은 듯 보자기로 소를 싸듯이 생겼다. 그래서 이름도 편수로 바뀌었다.
따지고 보면 편수 역시 만두의 일종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먹는 ‘만두’는 속이 들어간 것과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나뉜다. 속이 들어가지 않은 것은 다른 말로 백만두라고 불렀고, 속이 들어간 것은 교자 혹은 포자 혹은 편식이라고 불렀다. 일찍부터 밀가루 음식이 발달했던 베이징을 비롯한 화북지역 사람들에게 만두는 곧 백만두였다. 지금도 속이 들어가고 끓는 물에 삶는 것은 교자 중에서도 수교자라고 부른다. 한국어로는 물만두이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물만두와 같이 국물이 있는 만두를 한자로 ‘餠匙(병시)’라고 적었다. 여기에서 ‘병’은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총칭해서 병(餠)이라고 불렀던 한나라 이후의 관습을 따른 것이다. ‘병시’는 반드시 밀가루로 만든 피로 속을 감싸야 한다고 믿었다. 편수 역시 ‘수저로 떠먹는 밀가루로 만든 병’이란 뜻을 담고 있는 병시의 한 가지였다.
편수는 조선시대 개성 상인인 송상들이 중국 연경과 무역을 할 때 들여온 만두의 일종인 편식이 변형된 음식이다. 특히 황해도에서는 품종이 좋은 밀을 재배해 얻은 밀가루로 편수피를 만들었다. 사진은 2000년대 개성시내 국수집의 모습.
당연히 편수를 먹기 위해서는 밀가루를 쉽게 확보할 수 있어야 했다. 모두 알듯이 밀은 연간 평균 기온이 3.8도이면서 여름 평균 기온이 14도 이상인 지역에서 재배되어야 품질도 좋고 생산량도 많다. 한반도는 품질 좋은 밀을 생산하기에 적합한 지역은 아니다. 그래도 재래종 밀은 조선시대에도 재배되었다. 하지만 밀농사가 가능한 곳이라고 해도 벼농사가 마무리되는 늦가을에야 파종을 하였다. 품질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산량 역시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궁중에서나 부자들만이 겨우 품질 좋은 밀가루를 확보하여 편수를 비롯하여 밀가루 피로 만든 만두를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만약 밀가루를 구하지 못할 경우 메밀가루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그래서 조선 후기의 조리서에서는 대부분 메밀가루로 피를 만든다고 적었다. 심지어 육만두·어만두·동아만두와 같이 아예 피를 쇠고기·생선·동과로 만들기까지 했다.
1931년에 발간된 <조선총독부농업시험장 25주년기념지>에 의하면, 조선의 재래종 밀은 황해도·평안남도·강원도에서 주로 많이 생산된다고 했다. 특히 황해도에서 그 생산량이 가장 많았다. 재래종 밀 중에서 그 품종이 가장 좋은 것 역시 황해도에서 재배되는 것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서 개성 사람들은 밀가루 피로 편수를 만들 수 있었다. <시의전서>에서는 밀만두가 곧 편수라고 적었다. 조선 후기에도 개성의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두부와 숙주만으로 소를 만들어서 비교적 풍부한 밀가루로 만든 피로 보쌈김치 싸듯이 편수를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개성의 부자들은 그것을 시샘하여 온갖 고기와 생굴까지 넣은 소로 자신들만의 개성편수를 만들었다.
이러다 보니 개성편수는 20세기가 되어도 결코 대중음식으로 변신하지 못했다. 이에 비해 교자와 포자로 불렸던 만두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대중화의 길을 걸었다. 만두의 대중화에는 밀 품종의 개량과 적극적인 재배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실 조선총독부는 처음에 밀농사를 권장하기보다는 러시아와 중국으로부터 밀가루를 수입하는 정책을 펼쳤다. 1910년대만 해도 한반도는 그들에게 쌀의 보급기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식량의 중요성을 자각한 조선총독부는 1923년부터 재래밀의 품종 개량에 나섰다. 수원소맥 6호를 필두로 하여 생산량이 많은 품종이 속속 만들어져 농촌에 보급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사람들에게 밀가루는 그 전에 비해 훨씬 구하기 쉬운 식재료로 자리를 잡았다.
만두의 대중화 길에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에 제물포와 서울로 이주를 해온 산둥 출신 중국인들도 있었다. 외국에 나가도 집단거주를 하는 화교들이지만, 19세기 말에 한반도로 이주해온 중국인들은 ‘제비’라는 별명을 가진 남자들 위주의 유동인구 집단이었다. 1920년대가 되어도 재조선 중국인들은 보통 남자 10명에 여자 1~2명의 비율이었다. 이러니 중국인 집단 거주지 내에는 남자를 위한 식당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들은 가정집의 한 모퉁이나 상점의 한 쪽을 빌려서 서너 개의 식탁을 갖추고 영업을 했다. 그들이 판매했던 음식 역시 끼니 위주의 지극히 간단한 것들이었다. 곧 자장면과 전병(호떡) 그리고 교자가 주요 메뉴였다.
근대도시 서울로 이사를 온 황해도와 평안도 출신 사람들 역시 만두의 또 다른 대중화에 기여했다. 개성편수 예찬론자 진학포가 당시 서울 종로에서 일금 20전에 큰 대접으로 하나씩 주는 만두가 바로 평안도 만두다. 조선 최초의 맛 기행 책인 <도문대작>을 쓴 허균(1569~1618)은 “대만두는 의주 사람들이 중국 사람처럼 잘 만든다”고 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더욱 소가 많이 들어간 대만두가 인기를 모았다. 일제시대에 일본인 거주 지역이었던 서울의 장충동·충무로·필동 일대에는 1945년 연말이 되자 적산가옥 천지가 되었다. 평양이 공산화의 길로 가는 모습을 일찌감치 눈치 챈 평안도의 부자들은 이 적산가옥으로 이사를 왔다. 오늘날까지도 장충동과 충무로, 그리고 필동 일대에 평안도식의 대만두를 파는 ‘면옥’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만두와 중국 만두의 유행과 달리 개성편수는 개성 출신들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명맥을 유지했을 뿐이다. 개성편수 예찬론자 진학포는 “개성의 유명한 송순주(松筍酒) 한 잔을 마시고 이름 있는 보쌈김치와 함께 이렇게 잘 조화된 편수 한 개를 곁들일 때 나 같은 식도락의 미각은 부지경에 이 몸을 황홀경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먹을거리가 풍부해진 오늘날, 예전의 고가음식 개성편수를 대중적인 음식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하지만 제대로 담근 송순주도, 개성배추로 담근 보쌈김치도 쉽게 구할 수 없으니 진학포의 글을 읽으면서 입맛만 다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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