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1920년대 제빙기술 도입… 여름음식으로 ‘재 탄생’
“평양냉면, 해주냉면 다음으로 서울냉면을 손꼽을 만큼 이제는 서울냉면이 냉면 축에서 뻐젓하게 한몫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성냉면은 말하자면 평양냉면의 연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입 까다로운 서울사람들의 미각을 정복해보려고 평양냉면 장사들이 일류 기술자-냉면의 맛은 그 기술 여하에 달렸습니다-를 데리고 경성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움직일 수 없는 굳은 지반을 쌓아놓았습니다. 여름 한철 더군다나 각 관청 회사의 점심시간이면은 냉면집 전화통에서는 불이 날 지경입니다.” 1936년 7월23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냉면’ 관련 기사의 첫 부분이다. 1930년대 중반, 서울의 냉면집들이 성업을 하고 있는 정황을 이 글은 생생하게 전해준다.
1920년대 말 서울 청계천 북쪽에는 40곳이 넘는 냉면집이 있었다. 낙원동의 평양냉면집과 부벽루, 광교와 수표교 사이의 백양루, 그리고 돈의동의 동양루 등이 모두 냉면 전문점으로 그 당시 이름을 떨쳤다. 그런데 냉면집은 여느 음식점과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단층짜리 냉면집 입구에 상호를 적은 간판이 붙은 것은 설렁탕집이나 추어탕집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간판 옆으로 긴 막대기를 하늘 높이 꽂아 두고, 그 끝에는 길게 늘어뜨린 종이다발이 흩날리도록 했다. 종이다발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제면기의 구멍에서 막 빠져나오는 메밀국수 타래를 닮았다. 높은 건물이 별로 없었던 당시의 종로. 전차에서 내려 북악산 쪽을 올려다보기만 해도 이 종이다발이 금세 눈에 띄었다.
특히 한여름에는 창공에서 휘날리는 흰색의 종이다발이 식객들의 입맛을 유혹했다. 소설가 김량운은 1926년 ‘동광’ 제8호에 소설 <냉면>을 발표했다. 한창 세계가 경제공황으로 인해 시민들의 생활도 어려웠던 시절, 신문사 기자인 순호는 더위가 극성을 부리는 8월에 줄어든 월급봉투를 들고 집을 향하다가 갑자기 냉면이 먹고 싶어졌다. 전차를 타고서 돼지편육과 채 썬 배쪽, 그리고 노란 겨자를 뿌린 수북한 냉면 한 그릇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전차는 벌써 종로2가로 진입했다. 그때 순호가 부리나케 내리겠다고 하면서 외친 말이 ‘정차’가 아니라 ‘냉면’이었다.
하지만 냉면은 본래 겨울음식이었다. 앞의 매일신보 냉면 기사의 마지막에도 이 점을 놓치지 않는다. “여름철 냉면은 시원한 맛에 많이들 먹지만은 그러나 정말 냉면다운 맛을 보려면 겨울냉면이 제일입니다. 시원한 동침이 국물에도 말은 동침이냉면이야말로 한번 먹으면 인이 배이고 마는 기막힌 것입니다. 추운 겨울날 찬 냉면 맛도 별맛이려니와 냉면 뒤의 구수한 더운 국수물 맛도 또한 각별한 것입니다.”
평안도 출신으로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이정섭은 자신이 외국에 있을 때 가장 많이 생각난 음식으로 김치·갈비구이와 함께 냉면을 꼽았다. “동지섣달 추운 날에 백설이 펄펄 흩날릴 때에 온돌에다 불을 따뜻하게 때고 3~4명의 우인이 서로 앉아서 갈비 구어 먹는 것이라든지 냉면 추렴을 하는 것도 퍽 그리웠다.”(‘별건곤’ 1928년 5월) 밖에는 눈이 내리고, 방안의 온돌은 지글지글 끓을 정도로 뜨겁고, 그곳에서 이가 시린 냉면을 먹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겨울에 냉면을 먹는 풍속은 이미 조선후기에도 평안도나 황해도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정약용(1762~1836)도 겨울에 그곳 사람들이 냉면 먹는 모습을 두고, “시월 들어 서관(西關)에 한 자 되게 눈 쌓이면, 문에 이중으로 휘장을 치고 폭신한 담요를 바닥에 깔아 손님을 잡아두고는, 갓 모양의 쟁개비에 노루고기 저며 굽고, 길게 뽑은 냉면에 배추절임을 곁들이네”라고 시를 읊조렸다. 당시의 냉면 정체에 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은 홍석모(1781~1857)가 쓴 <동국세시기>의 음력 11월편에도 나온다. “메밀국수에 무절임과 배추절임, 그리고 돼지고기를 넣은 음식을 냉면이라고 부른다. 또 잡채(雜菜)와 배·밤, 채 썬 쇠고기와 돼지고기, 그리고 참기름과 간장을 모두 국수에 섞은 것을 골동면(骨董麵)이라고 부른다. 관서(關西)의 면이 가장 맛있다.”
그런데 1920년대가 되면 사람들은 냉면을 여름음식으로 먹기 시작했다. 이러한 냉면의 변신에는 근대적인 제빙기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인공 얼음을 만드는 제빙기술은 1875년에 독일인 린데와 미국인 보일이 암모니아 압축식 냉동기를 개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10년 부산에도 제빙공장이 세워졌다. 연이어 제물포와 원산·군산 등지에도 제빙공장이 문을 열었다. 본래 이들 제빙공장은 생선에 얼음을 채워서 오랫동안 유통하기 위해서 필요한 시설이었다. 하지만 한여름에 얼음을 보자 사람들은 먹을 수 있는 얼음으로까지 생각이 미쳤다. 이 얼음이 냉면과 만나면서 여름냉면의 탄생을 가져왔다. 잡지 ‘별건곤’ 제24호(1929년 12월)에는 평양의 여름냉면 맛을 다음과 같이 적어두었다. “대륙적 영향으로 여름날 열도(熱度)가 상당히 높은 평양에서 더위가 몹시 다툴 때 흰 ‘벌덕대접’에 주먹 같은 얼음덩어리를 속에 감추고 서리서리 얽힌 냉면! 얼음에 더위를 물리치고 겨자와 산미(酸味)에 권태를 떨쳐버리리!”
냉면 속에 든 얼음은 정말로 더위를 이기게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주로 겨울에 마련하였던 동치미나 백김치, 혹은 나박김치를 여름에 담아야 육수를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1910년대 말에 서울에 대리점을 개설했던 일본의 화학조미료 회사 아지노모도(味の素)가 이 틈새를 놓칠 리 만무하였다. 1931년 12월 17일 동아일보에는 ‘양념가루 아지노모도’의 광고가 실렸다. “냉면+아지노모도=미미(美味), 모든 음식+아지노모도=미미, 음식점+아지노모도=천객만래(千客萬來)”가 이 광고의 카피였다. 광고 속의 그림도 그들이 냉면집을 타깃으로 삼았음을 알게 해준다. 앞서도 소개했듯이 그림 속의 음식점 간판 옆에는 종이다발을 꽂은 장대가 높이 휘날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아지노모도사는 이미 1927년에 평양 대동문 근처에 냉면집을 직접 열었다. 본래 평양냉면의 육수는 동치미를 익히면서 삶은 소고기나 돼지고기 덩어리를 그 속에 넣어서 만들어냈다. 당연히 동물성 단백질의 아미노산 맛이 동치미 국물에 녹아드니 그 맛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맛을 아지노모도의 글루탐산이 대신하게 되었다. 냉면집 주인의 입장에서는 비록 아지노모도가 싸지는 않았지만, 그 편리성은 비싼 값어치를 하고도 남았다. 특히 한여름에 굳이 동치미를 담글 필요도 없게 만들어주었다. 손님의 입장에서도 심심한 동치미 육수에 비해 훨씬 자극적이면서 구수한 맛을 맛볼 수 있었다. 당연히 대환영이었다.
1920년대 말이 되면 냉면은 겨울과 여름은 물론이고 봄이나 가을에도 먹는 음식이 되었다. 앞서 소개한 잡지 ‘별건곤’ 제24호에서는 평양에서 먹는 봄과 가을의 냉면에 대해서도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봄에 먹는 냉면은 “봄바람이 건듯 불어 잠자든 모란대에 나무마다 잎 트고 가지마다 꽃 피는 3, 4월 긴 해를 춘흥에 겨워 즐기다가 지친 다리를 대동문 앞 드높은 2층루에 실어 놓고 패강(浿江) 푸른 물 따라 종일의 피로를 흘려보내며 가득 담은 한 그릇 냉면에 시장을 맞출 때!”라고 했다. 가을에 먹는 냉면은 “수년을 두고 그리든 지기를 패성(浿城)에 맞았다가 능라도 버들사이로 비쳐오는 달빛을 맞으며 흉금을 헤쳐 놓고 고회(古懷)를 이야기할 때 줄기줄기 긴 냉면이 물어 끊기 어려움이 그들의 우정을 말하는 듯할 때!”라고 적었다.
결국 1930년대 전국은 냉면 맛으로 ‘사시사철’ 들썩였다. 그런데 문제는 냉면 수요에 맞추지 못하는 메밀국수 생산이었다. 알다시피 메밀은 밀가루와 달리 그 자체로 반죽이 차지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먼저 녹두녹말로 풀을 쑨 후 여기에 메밀가루를 넣고 반죽을 해야 한다. 돌덩이처럼 단단한 메밀반죽을 국수로 만들기 위해서 조선후기에 이미 나무로 만든 ‘면자기’가 개발되었다. 하지만 장정 한두 사람이 면자기 위에 올라타서 온몸으로 힘을 주어야 겨우 메밀국수 한 타래가 만들어졌다. 그러니 그 생산량이 사람들의 입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마침내 1932년 6월에 함경남도 함주군의 철공소 주인 김규홍이 쇠로 만든 냉면기계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이 기계를 사용하면 한 사람이 재래식보다 세 배 이상의 속도로 국수를 내릴 수 있었다. 냉면집의 온 부뚜막을 다 차지했던 재래식에 비해 좁은 공간에 설치해도 메밀국수 내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이전에는 그을음이 가득한 부엌에서 사람이 천장까지 올라가 면자기를 누르다 보니, 천장에 붙은 그을음과 사람의 땀이 메밀국수가 익는 솥으로 뚝뚝 떨어졌다. 이에 비해 김규홍이 개발한 제면기는 매우 위생적이었다. 이것이 시간을 거듭하면서 요사이 냉면집에서 사용하는 스테인리스 제면기로 진화하였다.
그렇다고 냉면이 그 인기를 한없이 누린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 냉면집의 성업은 또 다른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여름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식중독 사건이 발생했다. 돼지고기와 육수의 만남은 한여름에 대장균을 만들어내는 주범이었다. 심지어 배달되는 냉면 육수에 독을 타서 사람을 죽이는 사건도 일어났다. 여기에다가 냉면이 대중음식으로 변하자 먹을 수 없는 화학물질로 냉면을 만들어 원가를 줄이려는 주인도 생겨났다. 가을 메밀이 냉면의 수요를 맞추지 못하자, 아예 메밀가루를 넣지 않고 다른 전분으로 질긴 국수를 만든 다음에 메밀국수처럼 색만 들이는 냉면도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서 지금까지도 서울 사람들은 메밀국수가 고무줄처럼 질겨야 진짜 냉면이라고 착각을 한다.
1920년대 말 서울 청계천 북쪽에는 40곳이 넘는 냉면집이 있었다. 낙원동의 평양냉면집과 부벽루, 광교와 수표교 사이의 백양루, 그리고 돈의동의 동양루 등이 모두 냉면 전문점으로 그 당시 이름을 떨쳤다. 그런데 냉면집은 여느 음식점과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단층짜리 냉면집 입구에 상호를 적은 간판이 붙은 것은 설렁탕집이나 추어탕집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간판 옆으로 긴 막대기를 하늘 높이 꽂아 두고, 그 끝에는 길게 늘어뜨린 종이다발이 흩날리도록 했다. 종이다발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제면기의 구멍에서 막 빠져나오는 메밀국수 타래를 닮았다. 높은 건물이 별로 없었던 당시의 종로. 전차에서 내려 북악산 쪽을 올려다보기만 해도 이 종이다발이 금세 눈에 띄었다.
특히 한여름에는 창공에서 휘날리는 흰색의 종이다발이 식객들의 입맛을 유혹했다. 소설가 김량운은 1926년 ‘동광’ 제8호에 소설 <냉면>을 발표했다. 한창 세계가 경제공황으로 인해 시민들의 생활도 어려웠던 시절, 신문사 기자인 순호는 더위가 극성을 부리는 8월에 줄어든 월급봉투를 들고 집을 향하다가 갑자기 냉면이 먹고 싶어졌다. 전차를 타고서 돼지편육과 채 썬 배쪽, 그리고 노란 겨자를 뿌린 수북한 냉면 한 그릇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전차는 벌써 종로2가로 진입했다. 그때 순호가 부리나케 내리겠다고 하면서 외친 말이 ‘정차’가 아니라 ‘냉면’이었다.
하지만 냉면은 본래 겨울음식이었다. 앞의 매일신보 냉면 기사의 마지막에도 이 점을 놓치지 않는다. “여름철 냉면은 시원한 맛에 많이들 먹지만은 그러나 정말 냉면다운 맛을 보려면 겨울냉면이 제일입니다. 시원한 동침이 국물에도 말은 동침이냉면이야말로 한번 먹으면 인이 배이고 마는 기막힌 것입니다. 추운 겨울날 찬 냉면 맛도 별맛이려니와 냉면 뒤의 구수한 더운 국수물 맛도 또한 각별한 것입니다.”
평안도 출신으로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이정섭은 자신이 외국에 있을 때 가장 많이 생각난 음식으로 김치·갈비구이와 함께 냉면을 꼽았다. “동지섣달 추운 날에 백설이 펄펄 흩날릴 때에 온돌에다 불을 따뜻하게 때고 3~4명의 우인이 서로 앉아서 갈비 구어 먹는 것이라든지 냉면 추렴을 하는 것도 퍽 그리웠다.”(‘별건곤’ 1928년 5월) 밖에는 눈이 내리고, 방안의 온돌은 지글지글 끓을 정도로 뜨겁고, 그곳에서 이가 시린 냉면을 먹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겨울에 냉면을 먹는 풍속은 이미 조선후기에도 평안도나 황해도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정약용(1762~1836)도 겨울에 그곳 사람들이 냉면 먹는 모습을 두고, “시월 들어 서관(西關)에 한 자 되게 눈 쌓이면, 문에 이중으로 휘장을 치고 폭신한 담요를 바닥에 깔아 손님을 잡아두고는, 갓 모양의 쟁개비에 노루고기 저며 굽고, 길게 뽑은 냉면에 배추절임을 곁들이네”라고 시를 읊조렸다. 당시의 냉면 정체에 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은 홍석모(1781~1857)가 쓴 <동국세시기>의 음력 11월편에도 나온다. “메밀국수에 무절임과 배추절임, 그리고 돼지고기를 넣은 음식을 냉면이라고 부른다. 또 잡채(雜菜)와 배·밤, 채 썬 쇠고기와 돼지고기, 그리고 참기름과 간장을 모두 국수에 섞은 것을 골동면(骨董麵)이라고 부른다. 관서(關西)의 면이 가장 맛있다.”
그런데 1920년대가 되면 사람들은 냉면을 여름음식으로 먹기 시작했다. 이러한 냉면의 변신에는 근대적인 제빙기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인공 얼음을 만드는 제빙기술은 1875년에 독일인 린데와 미국인 보일이 암모니아 압축식 냉동기를 개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10년 부산에도 제빙공장이 세워졌다. 연이어 제물포와 원산·군산 등지에도 제빙공장이 문을 열었다. 본래 이들 제빙공장은 생선에 얼음을 채워서 오랫동안 유통하기 위해서 필요한 시설이었다. 하지만 한여름에 얼음을 보자 사람들은 먹을 수 있는 얼음으로까지 생각이 미쳤다. 이 얼음이 냉면과 만나면서 여름냉면의 탄생을 가져왔다. 잡지 ‘별건곤’ 제24호(1929년 12월)에는 평양의 여름냉면 맛을 다음과 같이 적어두었다. “대륙적 영향으로 여름날 열도(熱度)가 상당히 높은 평양에서 더위가 몹시 다툴 때 흰 ‘벌덕대접’에 주먹 같은 얼음덩어리를 속에 감추고 서리서리 얽힌 냉면! 얼음에 더위를 물리치고 겨자와 산미(酸味)에 권태를 떨쳐버리리!”
일본 조미료 회사 아지노모도가 1930년대에 낸 신문광고. 냉면 국물에다 조미료를 타면 육수맛을 낼 수 있다는 내용이다.
사실 아지노모도사는 이미 1927년에 평양 대동문 근처에 냉면집을 직접 열었다. 본래 평양냉면의 육수는 동치미를 익히면서 삶은 소고기나 돼지고기 덩어리를 그 속에 넣어서 만들어냈다. 당연히 동물성 단백질의 아미노산 맛이 동치미 국물에 녹아드니 그 맛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맛을 아지노모도의 글루탐산이 대신하게 되었다. 냉면집 주인의 입장에서는 비록 아지노모도가 싸지는 않았지만, 그 편리성은 비싼 값어치를 하고도 남았다. 특히 한여름에 굳이 동치미를 담글 필요도 없게 만들어주었다. 손님의 입장에서도 심심한 동치미 육수에 비해 훨씬 자극적이면서 구수한 맛을 맛볼 수 있었다. 당연히 대환영이었다.
1920년대 말이 되면 냉면은 겨울과 여름은 물론이고 봄이나 가을에도 먹는 음식이 되었다. 앞서 소개한 잡지 ‘별건곤’ 제24호에서는 평양에서 먹는 봄과 가을의 냉면에 대해서도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봄에 먹는 냉면은 “봄바람이 건듯 불어 잠자든 모란대에 나무마다 잎 트고 가지마다 꽃 피는 3, 4월 긴 해를 춘흥에 겨워 즐기다가 지친 다리를 대동문 앞 드높은 2층루에 실어 놓고 패강(浿江) 푸른 물 따라 종일의 피로를 흘려보내며 가득 담은 한 그릇 냉면에 시장을 맞출 때!”라고 했다. 가을에 먹는 냉면은 “수년을 두고 그리든 지기를 패성(浿城)에 맞았다가 능라도 버들사이로 비쳐오는 달빛을 맞으며 흉금을 헤쳐 놓고 고회(古懷)를 이야기할 때 줄기줄기 긴 냉면이 물어 끊기 어려움이 그들의 우정을 말하는 듯할 때!”라고 적었다.
결국 1930년대 전국은 냉면 맛으로 ‘사시사철’ 들썩였다. 그런데 문제는 냉면 수요에 맞추지 못하는 메밀국수 생산이었다. 알다시피 메밀은 밀가루와 달리 그 자체로 반죽이 차지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먼저 녹두녹말로 풀을 쑨 후 여기에 메밀가루를 넣고 반죽을 해야 한다. 돌덩이처럼 단단한 메밀반죽을 국수로 만들기 위해서 조선후기에 이미 나무로 만든 ‘면자기’가 개발되었다. 하지만 장정 한두 사람이 면자기 위에 올라타서 온몸으로 힘을 주어야 겨우 메밀국수 한 타래가 만들어졌다. 그러니 그 생산량이 사람들의 입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마침내 1932년 6월에 함경남도 함주군의 철공소 주인 김규홍이 쇠로 만든 냉면기계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이 기계를 사용하면 한 사람이 재래식보다 세 배 이상의 속도로 국수를 내릴 수 있었다. 냉면집의 온 부뚜막을 다 차지했던 재래식에 비해 좁은 공간에 설치해도 메밀국수 내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이전에는 그을음이 가득한 부엌에서 사람이 천장까지 올라가 면자기를 누르다 보니, 천장에 붙은 그을음과 사람의 땀이 메밀국수가 익는 솥으로 뚝뚝 떨어졌다. 이에 비해 김규홍이 개발한 제면기는 매우 위생적이었다. 이것이 시간을 거듭하면서 요사이 냉면집에서 사용하는 스테인리스 제면기로 진화하였다.
그렇다고 냉면이 그 인기를 한없이 누린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 냉면집의 성업은 또 다른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여름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식중독 사건이 발생했다. 돼지고기와 육수의 만남은 한여름에 대장균을 만들어내는 주범이었다. 심지어 배달되는 냉면 육수에 독을 타서 사람을 죽이는 사건도 일어났다. 여기에다가 냉면이 대중음식으로 변하자 먹을 수 없는 화학물질로 냉면을 만들어 원가를 줄이려는 주인도 생겨났다. 가을 메밀이 냉면의 수요를 맞추지 못하자, 아예 메밀가루를 넣지 않고 다른 전분으로 질긴 국수를 만든 다음에 메밀국수처럼 색만 들이는 냉면도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서 지금까지도 서울 사람들은 메밀국수가 고무줄처럼 질겨야 진짜 냉면이라고 착각을 한다.
지금도 온 나라에 냉면집 천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꽁꽁 얼은 김칫독을 뚫고 살얼음이 뜬 진장 김칫국에다 한 저(箸) 두 저 풀어먹고 우르르 떨려서 온돌방 아랫목으로 가는 맛!”(‘별건곤’ 제24호)을 즐기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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