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조선시대 식후 음료로 사랑, 제사 땐 차 대신 올리기도
ㆍ전기밥솥 등장으로 멀어져
“숙수(熟水)는 약재를 달이고 끓이는 데 사용하는 물이다. (중략) 대개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을 짓고 이미 익었으면 곧장 노구솥의 밑바닥이 그을리게 되는데 여기에 물을 부어 한번 끓으면 삶은 밥이 만들어진다. 이것을 가리켜서 숙수라고 부른다. 곧 같은 이름이지만 그 실체는 다르다.”
이 글은 조선후기의 학자 서유구(1764~1845)가 붓으로 쓴 책인 <임원경제지·정조지>에 나온다. 본래 중국 송나라 때 사람들은 숙수를 약재를 달이는 데 쓰는 좋은 물을 가리켰는데 조선 사람들은 솥의 밑에 남은 누룽지가 뜨거울 때 물을 부어 만든 삶은 밥인 숭늉을 가리킨다는 설명이다. 비록 숙수에서 숭늉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서유구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묘사한 숙수는 숭늉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숙수는 제사를 지낼 때 올려야 한다고 믿었던 차를 대신하는 데도 쓰였다. 본래 주자의 <가례>에서는 송나라 풍속에 근거하여 제사에 음료수로 차를 올리도록 했다. 하지만 차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 한반도의 사정으로 인해서 그 많던 제사에 차를 올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이재(1680~1746)는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사례편람>(1844년, 목판본)을 편찬하면서 차 대신에 숙수를 사용하라고 주석에 덧붙여 놓았다. 하지만 조선시대 몇몇 지식인들이 문헌에 적어둔 숙수는 대체로 탕약이나 차를 끓일 때 쓰는 끓인 물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고문헌의 숙수가 반드시 숭늉이라고 보면 안 된다. 숙수와 함께 숙랭(熟冷) 혹은 숙랭수(熟冷水)라는 말도 나온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냉수를 끓인 물인 숙랭수가 올바른 표기이지만, 그냥 숙랭이라고 쓴 문헌도 보인다. 아마도 숙랭수보다는 숙랭이 더 간단하여 말로 자주 쓰다 보니 문자로도 숙랭이 된 듯하다. 숭늉이란 말은 이 숙랭에서 변이되었다.
그래도 가능하면 이 숙랭도 차라고 적고 부르려고 노력한 듯하다. 영조 때 태어나 순조 때 사망한 황덕길(1750~1827)은 그의 문집에서 “제사에서 국을 치우고 그 대신에 차를 올리는 것은 예절이다. 옛 사람들은 숙랭이라고 부르지 않고 반드시 차라고 불렀다”고 적었다. 차를 제사에 올리고 마시기까지 하고 싶었던 조선 선비들의 욕구가 이 글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 사정은 황덕길과 동시대 사람인 유득공(1749~1807)이 붓으로 쓴 <경도잡지>에도 상세하게 밝혀져 있다. “차는 토산물이 없다. 연시(燕市, 연경의 시장)에서 사오거나 작설·생강·귤로 대신한다. 관청에서는 찹쌀을 볶아 물에 타서 이를 차라고 한다”고 했다. 얼마나 차를 마시고 싶었으면, 생강이나 귤 혹은 미숫가루에 꿀을 타서 그것을 차라고 불렀겠는가.
이런 사정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큰 변화가 없었다. 조선총독부의 촉탁으로 일했던 일본인 무라카미 다다키치는 1916년에 출판한 <조선의 의식주>란 책에서 “식후에는 차를 마시지 않는다. 숙탕(熟湯)이라고 부르는 밥을 짓고 나서 남은 반탕(飯湯)을 즐겨 마신다”고 적었다. 이것 역시 숭늉을 가리킨다. 알다시피 물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솥은 아무리 불을 때도 100도 이상이 되지 않는다. 물이 쌀 속으로 모두 흡수되어 뜸을 들이는 순서가 되면 솥의 바닥은 물기가 없어져서 100도 이상이 된다. 이렇게 3~4분이 지나면 솥바닥에 남아 있던 밥은 갈색으로 변한다. 여기에 물을 부으면 갈색의 전분이 분해되어 포도당이 생기게 된다. 솥 바닥에 붙은 전분은 이미 약간 탔다. 포도당과 탄 맛이 어울린 뜨거운 숭늉을 후르르 마시면 금세 구수하다는 느낌이 입 안 가득하게 퍼진다.
숭늉의 탄생에는 여느 나라와 달리 조선 사람들이 사용하던 밥을 짓는 그릇이 큰 작용을 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1924년)에서 이용기는 “밥을 짓는 그릇은 곱돌솥이 으뜸이고 오지탕관이 그 다음이요, 무쇠 솥이 셋째요, 통노구가 하등이니라”라고 했다. 여기에 언급된 솥은 그 좋고 나쁨을 떠나서 모두 무거운 솥이다. 쉽게 들어서 옮겨 씻기가 어렵기도 하다. 더욱이 귀하디귀한 쌀이나 보리로 지은 밥의 누룽지를 그냥 버릴 수도 없었다. 이 과정에서 숭늉이 탄생했다.
한창 6·25전쟁이 극심했던 1952년 3월1일부터 경향신문에는 문답 형식의 ‘경향싸롱’이란 칼럼이 연재되었다. 본디 ‘여성싸롱’을 이어받은 이 칼럼은 독자가 질문을 하고 ‘무관자(無冠子)’란 필명을 내세운 편집부 기자가 답을 내놓는 방식을 따랐다. 연재를 시작한 바로 직후인 3월6일자의 문답 주제 중 하나는 ‘다방과 숭늉’이었다. “하고 많은 다방에서 너무 쓰디 쓴 커피를 비싸게 팔고 있는데 그 대신 적게 드는 뜨뜻한 숭늉을 싸게 팔도록 하면 주객간의 좋을 듯하니 무관자들의 의견은 약하(若何)?”라고 광복동 다방 팬이란 독자가 질문을 보냈다. 이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구수한 이야기올시다. 그러한 커피는 역시 키키 맛이요, 숭늉 또한 숭늉 맛이 있을 터인즉 ‘커피 대신에 숭늉’이라는 (것은) 절대 조선은(에서) 허용할 수 없습니다. 가끔 숭늉 대신 냉수를 주문하는 분이 있더군요.” 독자는 다방에서도 숭늉을 팔면 어떻겠느냐는 주장을 했고, 기자는 이미 커피가 다방의 주요 메뉴가 되었는데 어떻게 그 대신에 숭늉을 팔 수 있겠느냐는 답변을 했다. 조선시대 내내 차에 밀려 그 본색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던 숭늉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커피의 그림자 속에 묻히고 말았다.
19세기 후반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서유럽 선교사들의 짐 속에는 커피가 들어 있었다. 각설탕 속에 들어간 커피가루는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서 까만색 커피로 변했다. 조선 사람들은 이것을 ‘양탕(洋湯)’이라고 불렀다. 본래 숭늉을 비롯하여 유사 차 모두가 단맛 위주였기 때문에 설탕 속에 담긴 커피는 조선 사람들 입맛에 맞았다. 1895년 10월 왕비가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을 겪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있으면서 이 커피 맛에 길들여졌다. 고종에게 이 커피 맛을 보게 한 사람은 독일계 러시아인 안토니에트 존타크(1852?~?)였다. 1902년 10월에 원래의 기와집에 있었던 정동구락부를 헐어 버리고 2층으로 된 양옥집을 지은 존타크는 1층에 커피숍을 열었다. 1904년 3월과 이듬해 11월에는 한일병합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와 기자의 신분이었던 윈스턴 처칠도 이곳에서 묵으면서 커피를 마셨다.
1910년대가 되면 커피는 서양을 상징하기도, 근대를 표현하기도 했다. 1914년에 문을 연 조선호텔에서도 커피를 팔았다. 1920년대가 되면 오늘날 서울의 명동과 종로에는 다방이란 이름의 커피 마시는 곳도 여러 곳에 생겨났다. 1935년 11월1일자 잡지 ‘삼천리’에서는 당시 유명했던 서울의 다방 상호를 거명하였다. 인사동의 삐-너스, 종로의 멕키시코, 지금의 소공동인 장곡천정의 악랑, 종로의 뽄 아미, 지금의 충무로 일대인 명치정의 에리자와 따이나, 남대문통의 뽀스통, 관철동의 백합원 등이 꼽혔다. 1930년대가 되면 영화인·화가·문인·음악가들이 직접 운영하는 다방이 서울의 명동·종로·소공동·충무로·동대문 일대에 수십 군데씩 문을 열었다. 결국 일제 말기의 다방은 서양음악을 듣고 커피와 홍차를 마시면서 지식인의 나약함을 일상 속으로 숨겨버린 곳이었다.
그래도 숭늉은 여전히 보통의 한국인이 식후에 마시는 음료였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이 되면 그 사정은 완전히 바뀌고 만다. 전기밥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알다시피 전기밥솥은 1955년 일본의 전기제품 회사인 도시바에서 처음으로 개발되었다. 그 이후 여러 전기제품 회사에서 전기밥솥을 개발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전기 소비량이 너무 많다는 데 있었다. 결국 1965년 도지루시마호빈 회사에서 반도체를 이용한 보온 방식의 전기밥솥을 개발하였다. 이 제품은 그 전의 것에 비해서 전기도 적게 들었고, 보온도 잘 되어 소비자들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일본산 전기밥솥은 곧장 한국으로 수출되었다. 금성사에서는 1966년에 직접 만든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마침 전기 생산량이 그 전에 비해 증가하면서 전기밥솥은 편리성이란 이름으로 가정의 부엌에서 종래의 솥을 점차 몰아냈다. 불량품과 가짜제품, 심지어 밀수품 사건까지 겪으면서 1970년대 중반이 되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혼수품으로도 전기밥솥이 꼽혔다. 이때부터 농촌에서는 전기밥솥을 사기 위한 계 조직이 생길 정도로 전기밥솥은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 전기밥솥에서는 숭늉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누룽지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ㆍ전기밥솥 등장으로 멀어져
“숙수(熟水)는 약재를 달이고 끓이는 데 사용하는 물이다. (중략) 대개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을 짓고 이미 익었으면 곧장 노구솥의 밑바닥이 그을리게 되는데 여기에 물을 부어 한번 끓으면 삶은 밥이 만들어진다. 이것을 가리켜서 숙수라고 부른다. 곧 같은 이름이지만 그 실체는 다르다.”
이 글은 조선후기의 학자 서유구(1764~1845)가 붓으로 쓴 책인 <임원경제지·정조지>에 나온다. 본래 중국 송나라 때 사람들은 숙수를 약재를 달이는 데 쓰는 좋은 물을 가리켰는데 조선 사람들은 솥의 밑에 남은 누룽지가 뜨거울 때 물을 부어 만든 삶은 밥인 숭늉을 가리킨다는 설명이다. 비록 숙수에서 숭늉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서유구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묘사한 숙수는 숭늉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숙수는 제사를 지낼 때 올려야 한다고 믿었던 차를 대신하는 데도 쓰였다. 본래 주자의 <가례>에서는 송나라 풍속에 근거하여 제사에 음료수로 차를 올리도록 했다. 하지만 차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 한반도의 사정으로 인해서 그 많던 제사에 차를 올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이재(1680~1746)는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 <사례편람>(1844년, 목판본)을 편찬하면서 차 대신에 숙수를 사용하라고 주석에 덧붙여 놓았다. 하지만 조선시대 몇몇 지식인들이 문헌에 적어둔 숙수는 대체로 탕약이나 차를 끓일 때 쓰는 끓인 물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고문헌의 숙수가 반드시 숭늉이라고 보면 안 된다. 숙수와 함께 숙랭(熟冷) 혹은 숙랭수(熟冷水)라는 말도 나온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냉수를 끓인 물인 숙랭수가 올바른 표기이지만, 그냥 숙랭이라고 쓴 문헌도 보인다. 아마도 숙랭수보다는 숙랭이 더 간단하여 말로 자주 쓰다 보니 문자로도 숙랭이 된 듯하다. 숭늉이란 말은 이 숙랭에서 변이되었다.
그래도 가능하면 이 숙랭도 차라고 적고 부르려고 노력한 듯하다. 영조 때 태어나 순조 때 사망한 황덕길(1750~1827)은 그의 문집에서 “제사에서 국을 치우고 그 대신에 차를 올리는 것은 예절이다. 옛 사람들은 숙랭이라고 부르지 않고 반드시 차라고 불렀다”고 적었다. 차를 제사에 올리고 마시기까지 하고 싶었던 조선 선비들의 욕구가 이 글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 사정은 황덕길과 동시대 사람인 유득공(1749~1807)이 붓으로 쓴 <경도잡지>에도 상세하게 밝혀져 있다. “차는 토산물이 없다. 연시(燕市, 연경의 시장)에서 사오거나 작설·생강·귤로 대신한다. 관청에서는 찹쌀을 볶아 물에 타서 이를 차라고 한다”고 했다. 얼마나 차를 마시고 싶었으면, 생강이나 귤 혹은 미숫가루에 꿀을 타서 그것을 차라고 불렀겠는가.
이런 사정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큰 변화가 없었다. 조선총독부의 촉탁으로 일했던 일본인 무라카미 다다키치는 1916년에 출판한 <조선의 의식주>란 책에서 “식후에는 차를 마시지 않는다. 숙탕(熟湯)이라고 부르는 밥을 짓고 나서 남은 반탕(飯湯)을 즐겨 마신다”고 적었다. 이것 역시 숭늉을 가리킨다. 알다시피 물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솥은 아무리 불을 때도 100도 이상이 되지 않는다. 물이 쌀 속으로 모두 흡수되어 뜸을 들이는 순서가 되면 솥의 바닥은 물기가 없어져서 100도 이상이 된다. 이렇게 3~4분이 지나면 솥바닥에 남아 있던 밥은 갈색으로 변한다. 여기에 물을 부으면 갈색의 전분이 분해되어 포도당이 생기게 된다. 솥 바닥에 붙은 전분은 이미 약간 탔다. 포도당과 탄 맛이 어울린 뜨거운 숭늉을 후르르 마시면 금세 구수하다는 느낌이 입 안 가득하게 퍼진다.
숭늉의 탄생에는 밥을 짓는 그릇이 큰 작용을 했다. 누룽지가 적절하게 생기는 가마솥은 구수한 숭늉을 만들어내는 데 적격이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창 6·25전쟁이 극심했던 1952년 3월1일부터 경향신문에는 문답 형식의 ‘경향싸롱’이란 칼럼이 연재되었다. 본디 ‘여성싸롱’을 이어받은 이 칼럼은 독자가 질문을 하고 ‘무관자(無冠子)’란 필명을 내세운 편집부 기자가 답을 내놓는 방식을 따랐다. 연재를 시작한 바로 직후인 3월6일자의 문답 주제 중 하나는 ‘다방과 숭늉’이었다. “하고 많은 다방에서 너무 쓰디 쓴 커피를 비싸게 팔고 있는데 그 대신 적게 드는 뜨뜻한 숭늉을 싸게 팔도록 하면 주객간의 좋을 듯하니 무관자들의 의견은 약하(若何)?”라고 광복동 다방 팬이란 독자가 질문을 보냈다. 이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구수한 이야기올시다. 그러한 커피는 역시 키키 맛이요, 숭늉 또한 숭늉 맛이 있을 터인즉 ‘커피 대신에 숭늉’이라는 (것은) 절대 조선은(에서) 허용할 수 없습니다. 가끔 숭늉 대신 냉수를 주문하는 분이 있더군요.” 독자는 다방에서도 숭늉을 팔면 어떻겠느냐는 주장을 했고, 기자는 이미 커피가 다방의 주요 메뉴가 되었는데 어떻게 그 대신에 숭늉을 팔 수 있겠느냐는 답변을 했다. 조선시대 내내 차에 밀려 그 본색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던 숭늉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커피의 그림자 속에 묻히고 말았다.
19세기 후반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서유럽 선교사들의 짐 속에는 커피가 들어 있었다. 각설탕 속에 들어간 커피가루는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서 까만색 커피로 변했다. 조선 사람들은 이것을 ‘양탕(洋湯)’이라고 불렀다. 본래 숭늉을 비롯하여 유사 차 모두가 단맛 위주였기 때문에 설탕 속에 담긴 커피는 조선 사람들 입맛에 맞았다. 1895년 10월 왕비가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을 겪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있으면서 이 커피 맛에 길들여졌다. 고종에게 이 커피 맛을 보게 한 사람은 독일계 러시아인 안토니에트 존타크(1852?~?)였다. 1902년 10월에 원래의 기와집에 있었던 정동구락부를 헐어 버리고 2층으로 된 양옥집을 지은 존타크는 1층에 커피숍을 열었다. 1904년 3월과 이듬해 11월에는 한일병합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와 기자의 신분이었던 윈스턴 처칠도 이곳에서 묵으면서 커피를 마셨다.
1910년대가 되면 커피는 서양을 상징하기도, 근대를 표현하기도 했다. 1914년에 문을 연 조선호텔에서도 커피를 팔았다. 1920년대가 되면 오늘날 서울의 명동과 종로에는 다방이란 이름의 커피 마시는 곳도 여러 곳에 생겨났다. 1935년 11월1일자 잡지 ‘삼천리’에서는 당시 유명했던 서울의 다방 상호를 거명하였다. 인사동의 삐-너스, 종로의 멕키시코, 지금의 소공동인 장곡천정의 악랑, 종로의 뽄 아미, 지금의 충무로 일대인 명치정의 에리자와 따이나, 남대문통의 뽀스통, 관철동의 백합원 등이 꼽혔다. 1930년대가 되면 영화인·화가·문인·음악가들이 직접 운영하는 다방이 서울의 명동·종로·소공동·충무로·동대문 일대에 수십 군데씩 문을 열었다. 결국 일제 말기의 다방은 서양음악을 듣고 커피와 홍차를 마시면서 지식인의 나약함을 일상 속으로 숨겨버린 곳이었다.
그래도 숭늉은 여전히 보통의 한국인이 식후에 마시는 음료였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이 되면 그 사정은 완전히 바뀌고 만다. 전기밥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알다시피 전기밥솥은 1955년 일본의 전기제품 회사인 도시바에서 처음으로 개발되었다. 그 이후 여러 전기제품 회사에서 전기밥솥을 개발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전기 소비량이 너무 많다는 데 있었다. 결국 1965년 도지루시마호빈 회사에서 반도체를 이용한 보온 방식의 전기밥솥을 개발하였다. 이 제품은 그 전의 것에 비해서 전기도 적게 들었고, 보온도 잘 되어 소비자들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일본산 전기밥솥은 곧장 한국으로 수출되었다. 금성사에서는 1966년에 직접 만든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마침 전기 생산량이 그 전에 비해 증가하면서 전기밥솥은 편리성이란 이름으로 가정의 부엌에서 종래의 솥을 점차 몰아냈다. 불량품과 가짜제품, 심지어 밀수품 사건까지 겪으면서 1970년대 중반이 되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혼수품으로도 전기밥솥이 꼽혔다. 이때부터 농촌에서는 전기밥솥을 사기 위한 계 조직이 생길 정도로 전기밥솥은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 전기밥솥에서는 숭늉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누룽지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숭늉이나 누룽지를 이용한 음료제품이 개발되어 시판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잠시 주목을 받았을 뿐 대중화의 길을 걷지 못했다. 청량음료의 달콤한 맛이 커피만큼 강력한 힘으로 입맛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노동자의 한 끼 식사 값에 버금갔던 커피 한 잔 값이 인스턴트커피 등장으로 싸졌다. 1979년 커피자판기와 커피믹스의 등장은 커피를 식후 음료의 자리에 앉혔다. 그래서 도시나 시골,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즈음 사람들은 식후에 숭늉보다 자판기 커피를 당연한 것처럼 마신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보기 드문 커피 소비국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준 데는 1000년이 넘도록 구수한 맛으로 식후 입맛을 개운하게 해준 숭늉 덕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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