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개화기 선술집서 먹던 서민들의 ‘술안주’
ㆍ인기 끌자 요리옥서 ‘갈비찜’으로 고급화
“곰국을 끓이고 갈비와 염통을 굽고 뱅어저냐까지도 부쳐 놓았다. 정란은 수놓은 앞치마를 입고 얌전하게 주인 노릇을 하였다. (중략) ‘참 그렇습니다. 김치는 음식 중에 내셔널 스피리트(민족정신)란 말씀이야요.’ 하고 그 지혜를 칭찬한다는 듯이 상철을 보고 눈을 끔쩍한다. 상철은 픽 웃고 갈비를 뜯는다. ‘갈비는 조선 음식의 특색이지요.’ 하고 어떤 학생이, ‘갈비를 구워서 뜯는 기운이 조선 사람에게 남은 유일한 기운이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응, 그런 말이 있지.’ 하고 한선생이 갈비를 뜯던 손을 쉬며, ‘영국 사람은 피 흐르는 비프스테익 먹는 기운으로 산다고.’ 하고 웃었다.”
이 글은 이광수의 장편소설 <흙>의 제1장 13절에 나온다. 처음에 동아일보에서 연재를 하였고, 이 대목은 1932년 4월27일자에 실렸다. 조선 청년의 교육 지도를 일생의 업으로 삼고 살아온 한민교의 집에 그의 제자들이 모여서 만찬회가 열렸다. 한선생은 곧 한민교이다. 정란은 한민교의 딸이고, 상철은 경성대학 문과에 다니는 학생이다. 김치가 내셔널 스피리트의 표상이라고 말한 사람은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이건영이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들은 음식에 국민성이 드러난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서 갈비 뜯는 기운이 식민지 조선인의 마지막 남은 힘임을 발견한다.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았던 1930년대 초반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무겁게 지고 있었던 고뇌가 갈비구이에 담겼다.
ㆍ인기 끌자 요리옥서 ‘갈비찜’으로 고급화
“곰국을 끓이고 갈비와 염통을 굽고 뱅어저냐까지도 부쳐 놓았다. 정란은 수놓은 앞치마를 입고 얌전하게 주인 노릇을 하였다. (중략) ‘참 그렇습니다. 김치는 음식 중에 내셔널 스피리트(민족정신)란 말씀이야요.’ 하고 그 지혜를 칭찬한다는 듯이 상철을 보고 눈을 끔쩍한다. 상철은 픽 웃고 갈비를 뜯는다. ‘갈비는 조선 음식의 특색이지요.’ 하고 어떤 학생이, ‘갈비를 구워서 뜯는 기운이 조선 사람에게 남은 유일한 기운이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응, 그런 말이 있지.’ 하고 한선생이 갈비를 뜯던 손을 쉬며, ‘영국 사람은 피 흐르는 비프스테익 먹는 기운으로 산다고.’ 하고 웃었다.”
이 글은 이광수의 장편소설 <흙>의 제1장 13절에 나온다. 처음에 동아일보에서 연재를 하였고, 이 대목은 1932년 4월27일자에 실렸다. 조선 청년의 교육 지도를 일생의 업으로 삼고 살아온 한민교의 집에 그의 제자들이 모여서 만찬회가 열렸다. 한선생은 곧 한민교이다. 정란은 한민교의 딸이고, 상철은 경성대학 문과에 다니는 학생이다. 김치가 내셔널 스피리트의 표상이라고 말한 사람은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이건영이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들은 음식에 국민성이 드러난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서 갈비 뜯는 기운이 식민지 조선인의 마지막 남은 힘임을 발견한다.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았던 1930년대 초반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무겁게 지고 있었던 고뇌가 갈비구이에 담겼다.
갈비찜
1924년에 출판된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는 ‘갈비구의’라고 적은 다음에 ‘가리쟁임’과 ‘협적(脅炙)’이라는 다른 명칭을 붙였다. ‘구의’는 구이의 다른 표기이다. ‘가리쟁임’은 가리를 양념하여 재여 두었다가 굽기 때문에 붙인 이름인 듯하다.
그 조리법을 한 번 살펴보자. “기름진 연한 갈비나 암소갈비를 잘게 족이되 대가리는 질기니 내어놓고 한 치 길이씩 잘라서 물에 잠깐 씻어 베수건에 꼭 짜서 안팎을 잘게 어이되 붙은 고기를 발라가며 다 어인 후에 진장에 꿀과 배즙과 이긴흔 파와 마늘 다져 넣고 깨소금과 호초가루를 넣어 한 데 풀어 가지고 어인 갈비를 하나씩 들고 고명 풀어논 것을 안팎으로 발으되 짜지 않게 하여 담되 다시 켜켜로 깨소금과 기름을 쳐가며 재여 놓았다가 구어 먹나니 (중략) 대체 잘 쟁인 가리를 석쇠에 굽지 말고 번철에 기름을 붓고 바삭 지져 먹는 것이 좋으나 그러나 굽는 것은 기름기가 송알송알 하여 맛이 더 있는 것 같으니라.”
그런데 이용기는 갈비구이를 먹는 모습을 두고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대체 가리구의와 상치쌈이라 하는 것은 습관으로 좋아서 편기를 하나 그러하나 이것을 안 먹는 사람이 보게 되면 오즉 추하게 보며 오즉 웃겠으리요. 그 뜨거운 뼈 조각을 좌우 손에 다가 흉켜 쥐고 먹는 것은 사람이 먹는 것 같지 않고”라고 했다. 이런 계몽은 갈비구이를 선술집의 안주로 낮추고, 그 대신에 요리옥에서는 갈비찜을 내세우도록 만들었다.
사실 갈비찜 만드는 법은 이미 <시의전서·음식방문>에서도 나온다. “가리를 한 치 길이씩 잘라 삶되 양(소의 위) 퇴한 것과 부화·곱창·통무·다시마 한테 넣어 무르게 삶아 건져서 (중략) 석이버섯 다 썰어 파 미나리도 잠깐 데쳐 넣어 가진 양념에 가루 섞어 주물러 붂아서되 국물 조금 있게 풀어 그릇에 담고 위에 계란 부쳐 석이와 같이 채 쳐서 뿌려 쓰라”고 적었다. 가리구이에 비해 재료도 많이 들어갔을 뿐 아니라, 그 크기도 작아서 굳이 양손으로 쥐고 먹을 필요도 없는 음식이 바로 갈비찜이었다. 이용기는 이와 비슷한 조리법에 완자까지 찜 위에 올리라고 했다. “완자를 시처(만들어) 보아 굵든지 잘든지 만들어 얹고 실백을 얹어 먹으면 맛이 달고 고기가 흐물흐물하여 좋으니라”고 했을 정도다.
1929년이 되면 갈비찜은 그야말로 온갖 고명이 올라간 화려한 음식으로 변모한다. “남비 안 밑에다아가 삶아낸 무를 두고 그 위에다 양념에 주무린 삶은 갈비를 놓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다 고기완자·전유어완자를 지져 넣고 석이·표고, 계란 흰자위 노른자위를 각각 채쳐서 부스러지지 않도록 놓은 후에 은행 목근 것, 호도 찜질멧긴 것, 잣, 실고초를 각각 보기 좋게 얹고 갈비 삶은 물에다 밀가루를 한 숟가락쯤 두고 저으면 약간 걸쭉하게 됩니다. 밀가루를 풀 때엔 멍울이 지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국물을 붓거든 다시 한 번 끓리여 먹습니다.”(중외일보 1929년 11월10일 ‘만하여사담’)
조풍연(1914~1991)은 <서울잡학사전>에서 1939년에 서울 낙원동에 갈비집이 있었다고 했다. 그 집에서는 냉면과 함께 가리구이를 팔았다. 당시 저녁 늦은 시간에 극장이나 요리옥·카페·바 등이 끝나면 술 깨는 데 냉면이 좋다고 하여 갈비집에 손님이 몰려들었다. 손님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냉면과 함께 갈비 두 대를 시켰다. 왠지 가리구이 달라고 하면 복잡하였고, 간단히 줄여서 ‘갈비 두 대’라고 했다. 이로부터 갈비 하면 가리구이가 되어 버렸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갈비구이는 선술집에서 술안주로 먹는 음식이었다. 그 값도 보통 한 대에 얼마 혹은 두 대에 얼마 이런 식이었다. 1930년 12월7일자 동아일보에서는 강릉의 식당 요리 가격을 기사로 다루었다. 국밥 한 그릇에 15전인데 비해 갈비 한 대는 5전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과 비교하면 갈비구이 한 대 값이 설렁탕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결국 1920년대 이후 갈비구이는 선술집의 술안주에 지나지 않았고, 갈비찜은 요리옥에서 신선로 다음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고급음식이 되었다.
1948년 8월31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만나관’의 소갈비찜 광고.
경제의 성공은 한국인에게 조선시대 이전부터 가장 먹고 싶은 쇠고기에 대한 욕구를 증대시켰다. 이러자 갈비찜과 함께 갈비구이가 다시 고급음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2년 외국에서 쇠고기를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한우’ 갈비구이는 더 이상 술안주가 아니었다. 본래 수원갈비도 간단한 술안주에서 시작했다. 1945년 11월쯤 수원 영동시장 싸전거리에서 이귀성이란 사람이 ‘화춘옥’이라는 해장국집을 열고 해장국에 갈비를 넣어주어 인기를 모았다.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이귀성은 그 이듬해인 1946년, 갈비에 양념을 하여 숯불에 구워내는 갈비구이를 메뉴에 보탰다. 하지만 1960년대 초반까지도 갈비구이는 화춘옥의 주된 메뉴가 아니었다. 갈비구이와 함께 해장국·갈비탕·설렁탕·냉면 등을 여전히 판매했다. 맛이 좋다는 소문이 나자 벼 품종을 개량하는 데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던 박정희 대통령도 수원의 농촌진흥청을 방문하면서 화춘옥의 단골이 되었다. 결국 화춘옥 덕택에 팔달로 근처는 갈비집 촌으로 변해갔다. 이것이 오늘날 수원갈비의 출발이었다.
갈비구이
갈비구이의 또 다른 부각은 1970년대 후반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가용을 가진 가정이 생겨나면서 가족이 함께 야외로 나가서 갈비구이를 먹는 일이 잦아졌다. 공기 좋은 야외에서 숯불에 구워 먹는 갈비구이는 집에서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 서울 외곽의 유원지 이름을 붙인 ‘○○갈비’가 등장한 때가 바로 당시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갈비구이의 전성시대는 1982년에 서울 강남에서 문을 활짝 열었다. 대지 1000여 평에 바닥에는 열대어가 다니고 인공폭포와 물레방아와 같은 시설이 자리 잡은 숲속공원이 새로 개발된 신도시 강남의 곳곳에 들어섰다. 일명 ‘호화갈비타운’이라고 불렸던 갈비집의 이름도 ‘○○가든’ 혹은 ‘○○공원’이었다.
그러나 이들 갈비집은 기왕의 풍성했던 갈비를 왜소하게 만든 주범이기도 했다. 1960년대 수원갈비의 경우 도끼로 토막을 내서 그 크기가 어른 손바닥만 했다. 당연히 갈비의 포를 뜰 때도 양쪽을 모두 이용한 ‘양갈비’였다. 그러나 서울 강남에 갈비집이 생기면서 한쪽으로 포를 뜨는 ‘외갈비’로 축소되었다. 한우 갈비의 값이 치솟자 미국산 갈비가 ‘LA갈비’라는 이름을 얻었다. 또 쇠갈비를 비롯하여 쇠고기 값이 폭등하자 1980년대 초반부터 정부에서는 쇠고기의 반에 반값도 되지 않았던 돼지고기를 이용하여 만든 돼지갈비구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였다. 감히 쇠갈비구이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서민들은 돼지갈비구이로 그 박탈감을 해소하였다. 춘천닭갈비 역시 쇠갈비를 대신하여 개발된 숯불닭갈비에서 생겨난 음식이다.
이런저런 사정에 비추어보면, 짐꾼이 하루 종일 노동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 앞 골목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 잔에 쇠갈비구이 한 대를 먹었던 1920년대가 그립다. 하지만 그 꿈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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