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훈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여덟가지 재료 밀전병에 돌돌~ 한입에 쏙~
ㆍ정초 손님접대 음식으로 인기
‘구절판’은 음식을 담는 그릇이면서 동시에 거기에 담긴 음식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나온 조리서를 아무리 뒤져도 구절판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일제시대, 그것도 1935년이 되어야 비로소 신문에 구절판이란 음식이 나온다.
동아일보 1935년 11월9일자 ‘가을요리(6) 내 집의 자랑거리 음식 구절판, 배추무름’이란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기사는 기자가 윤숙경이란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옮긴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오늘 소개케하랴는 음식은 특별히 술안주에 좋고 또 복잡한 듯하면서 비교적 만들기 좋은 것입니다”로 시작하는 이 기사에서는 구절판이 한자로 ‘九折板’이 된다고 하면서 기사에 그림도 같이 그려 넣었다. 그러면서 “옛날에는 구절판이라는 그림과 같은 그릇이 있어서 이 그릇에 아홉 가지를 담아서 쓰게 된 것이지마는 지금은 이 그릇을 파는 곳이 없는 만큼 큰 서양접시에 담아도 보기 좋습니다”라고 했다.
윤숙경이 무엇을 근거로 하여 옛날에는 구절판이란 그릇이 있었다고 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왜냐하면 조선후기의 그림이나 유물 중에 구절판과 비슷한 그릇이 아직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구절판과 비슷한 모양의 토기가 1973년에 경주 천마총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또 1997년 7월 광주시 광산구 신창동 유적지에서 구절판과 비슷한 모양의 나무로 만든 물건도 출토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오늘날의 구절판과 직접 연결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ㆍ정초 손님접대 음식으로 인기
‘구절판’은 음식을 담는 그릇이면서 동시에 거기에 담긴 음식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나온 조리서를 아무리 뒤져도 구절판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일제시대, 그것도 1935년이 되어야 비로소 신문에 구절판이란 음식이 나온다.
동아일보 1935년 11월9일자 ‘가을요리(6) 내 집의 자랑거리 음식 구절판, 배추무름’이란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기사는 기자가 윤숙경이란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옮긴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오늘 소개케하랴는 음식은 특별히 술안주에 좋고 또 복잡한 듯하면서 비교적 만들기 좋은 것입니다”로 시작하는 이 기사에서는 구절판이 한자로 ‘九折板’이 된다고 하면서 기사에 그림도 같이 그려 넣었다. 그러면서 “옛날에는 구절판이라는 그림과 같은 그릇이 있어서 이 그릇에 아홉 가지를 담아서 쓰게 된 것이지마는 지금은 이 그릇을 파는 곳이 없는 만큼 큰 서양접시에 담아도 보기 좋습니다”라고 했다.
윤숙경이 무엇을 근거로 하여 옛날에는 구절판이란 그릇이 있었다고 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왜냐하면 조선후기의 그림이나 유물 중에 구절판과 비슷한 그릇이 아직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구절판과 비슷한 모양의 토기가 1973년에 경주 천마총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또 1997년 7월 광주시 광산구 신창동 유적지에서 구절판과 비슷한 모양의 나무로 만든 물건도 출토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오늘날의 구절판과 직접 연결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윤숙경의 기사에서 그려진 구절판은 지금의 것과 같이 둘레 여덟 칸, 가운데 한 칸이다. 오늘날의 구절판과 같다. 그런데 1938년 1월4일자 조선일보 10면에 소개된 구절판은 그렇지 않다. “중간에 한 구녁 사방 삥 돌려서 아홉 구녁을 동그라케 판 구절판 찬합”이라고 했다. 지금 기준으로 말하면 ‘십절판’이 된다. 이 기사를 쓴 사람은 남자로서 1930년대 중반 이후 조선음식에 대한 여러 가지 글을 잡지와 신문에 남긴 홍선표다. 그는 1937년경에 조선식찬연구소를 설립하였고, 1940년 6월에 조광사라는 출판사에서 <조선요리학>이란 책을 출판했다. 앞의 조선일보 구절판 글이 그대로 이 책에 옮겨져 있기 때문에 기사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다.
홍선표는 1940년 3월14일자 조선일보에서 ‘구절포(九折包)’에 관한 칼럼도 썼다. 구절포는 구절판의 다른 이름이다. 아마도 아홉 칸에 놓인 음식을 밀전병에 싸서 먹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이 기사에서도 “나무로 만든 합 속에 수란(水卵) 뜨는 그릇 모양으로 바닥에 열 구멍을 둥글게 파되 한 중앙에는 한 구멍을 파고 가으로 아홉 구멍을 접시같이 판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결코 지금의 것처럼 목판으로 만들어서 옻칠을 한 것이 아니었음도 확인이 된다. 더욱이 홍선표의 설명에 보면, 구절판이 필요한 사람은 나무로 직접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윤숙경은 구절판이란 그릇을 구입할 수 없다고 했다. 사정은 적어도 1950년대까지도 지속된 듯하다.
동아일보 1935년 11월9일자에 나온 구절판 그림.
1970년대 이후 구절판 그릇은 지금과 같은 양식을 지니고 칠기나 도자기로 만들어졌다. 특히 칠기 구절판 그릇의 대중화는 정초에 손질을 잘 해 두어야 한다는 기사(경향신문 1973년 12월28일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초가 되면 손님 접대 등으로 찬합이나 쟁반 구절판 등 칠기를 쓰는 일이 많아진다. 칠기는 화려하고 품위는 있으나 손질이 번거로운 것이 흠. 칠기에 뜨거운 물은 절대 금물이며 미지근한 행주로 닦은 다음 부드러운 헝겊으로 닦아 윤을 낸다.” 1974년 12월에는 동아공예대전 출신 작가 중 한 명인 박영규가 목기 구절판을 공예동우전에 출품하기도 했다. 1982년이 되면 백화점에서 3만원 이상의 상품을 구입하면 손톱깎기·우유컵세트·스카프와 함께 구절판을 기념품으로 제공하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1983년이 되면 자개로 된 구절판 그릇에 밤·잣·호두·대추 등의 말린 과일을 담은 선물세트가 판매되기도 했다. 결국 1980년대가 되면 비록 캐슈로 칠을 한 것이지만, 칠기 구절판 그릇이 대중화의 길을 걸었다.
구절판 그릇과 닮은 찬합으로 가장 오래된 청나라 중기의 서피규판형칠합.
동아일보 1960년 12월22일자 구절판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
사실 방신영(1890~1977)은 1931년판 <조선요리제법>에서 ‘찰전병’ 만드는 법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찹쌀가루를 냉수에 반죽해서 숟가락으로 떠서 쏟아보아 겨우 흘러 떨어질 만큼 반죽을 묽게 해서 번철에 기름을 바르고 얇게 지져 내나리라.”
또 ‘밀전병별법’에서는 “밀가루 한 차종에 계란 두 개 깨트려 넣고 우유 두 숟가락쯤 넣고 소금과 뻬킹파우더(떡에 넣는 가루) 차 숟가락으로 삼분일쯤 넣고 잘 섞어서 기름에 붙이나리라”고도 했다. 이것이 바로 윤숙경과 홍선표가 말한 ‘밀점병’이다. 방신영은 “찰수수가루를 냉수에 개어서 묽은 죽만큼 질게 하여서 소금을 간맞게 넣고 번철에 기름을 바르고 적은 접시만큼씩 붙이나니라”고도 하면서 수수전병도 밀전병의 대용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1939년에 광한서림에서 출판된 조자호(1912~1976)의 <조선요리법>에서는 구절판의 전병을 메밀가루로 만든다고 하였다.
일제시대 요리 전문가들은 어떤 곡물로 만들든지 전병이 준비되면 구절판 음식은 본연의 모습을 갖춘 셈이 된다고 보았다. 홍선표는 앞의 ‘구절포’ 조리법에서 “전병은 원래 얇은 까닭으로 떡의 맛보다 음식을 싸는 보재기 대용으로 만든 것이며 아홉가지 음식 중에는 초고초장 겨자 등속도 놓는 것이니 처음에 뚜껑을 열면 색깔이 홀난하게 보기에 좋게 되는 것이 구자(신선로)와 비슷한 것으로 손님대접에 훌륭합니다”고 했다. 특히 구절판은 큰 잔치 때 술안주였다.
앞에서 소개했던 홍선표의 구절판 기사는 ‘궁중료리’ 특집면에 나왔다. 이 중에서 ‘수랏상에 오르는 찬수 몇 가지’ 중에 구절판도 들어 있었다. 아마도 이 글로 인해서 1960년대 이후 구절판은 궁중음식의 하나로 이해된 듯하다. 하지만 홍선표가 주장했던 궁중음식이라는 주장은 아직까지 그 근거를 찾지 못했다. 조자호가 그의 책 목록에서 구절판을 잡채·족편·겨자선·탕평채와 함께 잡채류에 포함시킨 이유는 조선후기 궁중에서 즐겨먹었던 당면이 들어가지 않은 잡채와 연관시킨 때문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구절판 그릇과 닮은 찬합으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는 베이징의 고궁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청나라 중기의 서피규판형칠합이다. 중국음식인 춘권이나 조선 후기의 전병인 연병이나 일제시대의 밀쌈이나 밀전병과 같은 음식과, 당면이 들어가지 않은 잡채와의 만남이 만들어낸 음식이 구절판이 아니었을까? 이것이 진화하여 1950년대 이후 가장 아름다운 한국음식으로 구절판이 외국손님의 접대에 쓰였다. 외국인들 역시 구절판의 아름다운 색과 맛에 찬사를 보냈다.
구절판은 홍선표의 설명처럼 “전병 한 조각에 먹는 사람의 입에 맞도록 싸서 먹는”, 그리고 “무어나 한 가지나 혹은 둘 셋을 함께 싸서 먹는” 절묘한 음식이다. 비록 궁중음식이 아니었다고 해도 눈과 입으로 즐기는 그 아름다움은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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