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 | 수원대 교수·철학
ㆍ허물어진 것에서 나를 보다
“막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러 왔느냐….”
‘사의 찬미’에는 허물어진 것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돈도, 명예도, 님도 다 싫다’고 고백하는 지친 영혼이 본 것은 무엇일까요? 저 그림 ‘스핑크스의 질문자’를 보는데,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그 ‘사의 찬미’였습니다.
사막은 거대하고 분위기는 황량하기만 한데, 지팡이까지 내려놓은 저 남자, 그야말로 적막강산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의 적막이 얼마나 무서울까요? 그런데 무섭다는 형용사는 저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지치고 지쳐서 무서움에 대한 감각도 무뎌진 것 같으니까요. 나는 제 몸 하나 가눌 힘 없어 스핑크스에 기대고 있는 저 남자에게 말을 붙여봅니다. 길어야 백 년인데, 길어도 백 년인데, 덧없는 세월 무심히 흘려보내기가 참 어렵지요?라고.
“막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러 왔느냐….”
‘사의 찬미’에는 허물어진 것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돈도, 명예도, 님도 다 싫다’고 고백하는 지친 영혼이 본 것은 무엇일까요? 저 그림 ‘스핑크스의 질문자’를 보는데,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그 ‘사의 찬미’였습니다.
사막은 거대하고 분위기는 황량하기만 한데, 지팡이까지 내려놓은 저 남자, 그야말로 적막강산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의 적막이 얼마나 무서울까요? 그런데 무섭다는 형용사는 저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지치고 지쳐서 무서움에 대한 감각도 무뎌진 것 같으니까요. 나는 제 몸 하나 가눌 힘 없어 스핑크스에 기대고 있는 저 남자에게 말을 붙여봅니다. 길어야 백 년인데, 길어도 백 년인데, 덧없는 세월 무심히 흘려보내기가 참 어렵지요?라고.
엘리후 베더, ‘스핑크스의 질문자’ 1863, 캔버스에 유채, 91.5×106㎝, 보스턴미술관
그런데 스핑크스도 이미 허물어져 있지요? 스핑크스는 왕자(王者)의 상징입니다. 한때는 매혹적이었으나 이제는 스러져 버려진 옛 영화의 그림자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 그림은 이중적입니다. 막막한 광야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창백해진 젊음이,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려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존재에 기대 답을 구하는 것! 그렇게 볼 때 저 그림은 제 고통에 짓눌려 지치고 지친 영혼의 자화상입니다.
그러나 또 그거 아십니까? 실제로 권력이 있을 때 본질적인 것은 그를 비껴간다는 사실을. 원래 스핑크스는 인간에게 인간을 묻는 자 아닙니까? 너는 누구냐는 물음으로 ‘나’는 누구인지 묻게 만드는 존재지요. 궁극에서 스핑크스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오래된 물음을 품은 자가 왕자(王者)임을 알려주는 내 안의 질문자입니다.
인간은 좌절된 욕망으로 무릎을 꺾기 전에 자기 안에서 허물어진 것을 보고, 그 허물어진 것에서 살짝 초월적인 것을 넘보게 되기 전에는 ‘나’는 누구인지 묻는 법이 없습니다. 그 전에는 왕자(王者)의 물음을 품을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송나라 때의 학자 정이(程 臣頁)는 소년 시절에 과거에 급제하는 일, 부모형제가 엄청난 권력을 가진 일, 재주와 문장이 뛰어난 일을 인생의 세 가지 불행한 일이라고 했던 겁니다. 운 좋은 것은 나의 것이 아니니까요.
나의 것이 아닌 것이 허물어지기 전에는 나의 세계를 세울 수 없습니다. 젊은 날의 방랑은 나의 것을 세우려는 자의 통과의례 같은 것입니다. 베더가 20대에 저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그의 유랑의 흔적입니다. 그는 뉴욕에서 태어났으나 치과의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쿠바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20대 초반에 2년을 이탈리아 소도시들을 유랑하다가 아버지가 재정적인 지원을 끊는 바람에 뉴욕으로 돌아옵니다.
한번쯤 세상을 유랑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세상을 떠돌며 돈 버는 길이 아닌 나만의 길을 찾고 싶은 우리를 막는 건 무엇일까요? 안락한 삶에 대한 욕망과 바람에 실려 오는 풍문 때문이지요?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풍문. 집 떠나고 제도권을 떠나면 너의 삶은 저 사막처럼 무섭거나 쓸쓸하거나 할 거라는 풍문!
풍문은 힘이 있습니다. 무시하면 대가를 치러야 하지요. 그러나 그 대가로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나쁘지 않습니다. 허물어져 가는 스핑크스에게 귀 기울이는 저이는 진짜 인간을, ‘나’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물음인 동시에 해답인 저 물음이 마음속에 자리잡기 전에 저 남자는 유랑을 멈출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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