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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의 그림철학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8) 렘브란트 ‘탕자의 귀환’

이주향|수원대 교수·철학

ㆍ아버지의 부재

인간이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보지 못해 불행해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인간이 불행에 빠지는 건 ‘나’의 마음속 움직임을 주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명상록>의 아우렐리우스의 말입니다. 불행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것일까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아버지의 부재(不在)입니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아버지가 없다는 것, 그것이 우리를 울지도 못하게, 외롭지도 못하게 하는 거 아십니까?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을 보았을 때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선 울어도 되는구나, 외롭다고 하소연할 수 있구나, 하는 느낌! 무엇보다도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진 아들의 영혼을 만져주는 아버지가 피로에 지친 아들의 생 전체를 따뜻하게 덥히고 있습니다. 아들에 대한 기다림으로 아예 눈이 먼 것 같은 무표정한 아버지의 따뜻한 손, 그 손에 몸을 맡긴 채 이제 평온을 찾은 듯 무릎을 꿇고 앉은 탕자, 탕자의 헤진 옷과 감출 수 없는 더러운 발바닥이 고된 방황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그것은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더러는 체면 때문에, 더러는 생에 대한 긴장을 늦출 수 없어 외면하고 억눌러 왔던 남루한 내 영혼입니다. 나아갈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는 우리들의 영혼인 거지요.

알려졌듯 탕자는 실패한 아들입니다. 아버지에게 받을 유산을 미리 받아가지고 나가 모두 탕진하고 빈털터리 거지로 돌아온 초라한 자 아닙니까? 그러고 보면 실패하지 않는 게 생의 목적은 아닌가 봅니다. 더구나 아버지 곁에서 못마땅한 질시의 눈으로 탕자를 바라보는, 성실하기만 한 형의 싸늘한 눈길을 보면 반듯하게만 살아온 선한 삶이 오히려 위태로울 수 있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하르멘츠 반 레인 렘브란트, ‘탕자의 귀환’. 1662년쯤, 캔버스에 유채, 262×206㎝, 에르미타주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탕자를 안아주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저 눈을 보십시오. 그리움이 켜켜이 쌓인 자의 눈입니다. 과거를 규명하려 드는 냉정하고 싸늘한 눈이 아니라 기진맥진한 아들의 아픔 속으로 그저 스며들고자 하는 자의 포근한 눈이지요? 저런 눈을 가진 아버지가 있어야 기진맥진한 인생이 쉴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있어야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자식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아버지가 많습니다. 왜 그것도 못하느냐고? 자식의 미래가 걱정되는 아버지는 성급하고 공격적입니다. 자식이 맘에 걸리는 아버지는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면서 자식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마다 야단치는 것으로 사랑을 대신합니다. 아버지는 자신들의 인생에서 두려워했던 것을 자식들에게 금지하는 거지요. 그런데 그럴수록 아버지는 자식들에게서 자신이 금지했던 것을 볼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들은 폭력적입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아이들은 기를 펴지 못합니다. 주눅이 든 아들이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기 위해 노력할수록 스스로에게는 오히려 파괴적이지요. 아버지가 있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있어 두려운 아들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아들들은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남을 믿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굴종을 요구하는 지배자여서는 안됩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자기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아버지가 갖춰야 할 가장 큰 능력은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기다려주는 자입니다. 저 탕자의 아버지는 바로 긍정적인 아버지의 원형입니다.

다시 한 번 탕자의 등에 얹힌 따뜻한 아버지의 손을 보십시오. 진짜로 신의 손길 같지 않습니까? 탕자가 자기 안의 눈물을 모두 토해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저런 손길을 알아야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자기를 추스를 수 있습니다. 저런 품에 안겨봐야 생을 압니다. 생이란 잘못하지 않고 낭비하지 않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방황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생의 의미는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데서 올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되기까지 생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탕아가 됩니다. 세상의 아버지는 둘입니다. 탕아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탕아를 버리는 아버지. 당신은 아버지가 있어 행복하셨습니까? 당신은 행복한 아버지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