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 | 수원대 교수·철학
ㆍ사랑의 금기를 깨는 등불
주고 또 줘도 아깝지 않고, 받고 또 받아도 어색하지 않은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릅니다. 돈으로도, 힘으로도, 계략으로도 멈추게 할 수 없는 그 뜨거운 마법의 사랑을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의혹이지요. 사랑의 그림자인 바로 그 의혹!
에로스는 매일 밤 푸시케를 찾아간다고 했지요? 신랑이 무참한 ‘죽음’인 줄 알았던 푸시케는 환한 사랑을 만나 흡족했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 ‘나’를 보려 하지 말라!”는 에로스의 금기가 지켜질 때까지였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루벤스의 저 그림, ‘잠든 에로스를 지켜보는 푸시케’가 다중적으로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지 않으십니까?
우선 무장 해제하고 편안히 잠들어 있는 남자와 그 남자 곁에서 벗은 몸이 부끄럽지 않은 여자가 눈에 들어오지요? 남자는 사랑의 신 에로스고, 여자는 그의 여인 푸시케인데, 별 장식이 없어도 아늑하기만 한 침실이 그들의 따뜻했던 관계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주고 또 줘도 아깝지 않고, 받고 또 받아도 어색하지 않은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릅니다. 돈으로도, 힘으로도, 계략으로도 멈추게 할 수 없는 그 뜨거운 마법의 사랑을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의혹이지요. 사랑의 그림자인 바로 그 의혹!
에로스는 매일 밤 푸시케를 찾아간다고 했지요? 신랑이 무참한 ‘죽음’인 줄 알았던 푸시케는 환한 사랑을 만나 흡족했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 ‘나’를 보려 하지 말라!”는 에로스의 금기가 지켜질 때까지였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루벤스의 저 그림, ‘잠든 에로스를 지켜보는 푸시케’가 다중적으로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지 않으십니까?
우선 무장 해제하고 편안히 잠들어 있는 남자와 그 남자 곁에서 벗은 몸이 부끄럽지 않은 여자가 눈에 들어오지요? 남자는 사랑의 신 에로스고, 여자는 그의 여인 푸시케인데, 별 장식이 없어도 아늑하기만 한 침실이 그들의 따뜻했던 관계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잠든 에로스를 지켜보는 푸시케’, 1636년께, 패널에 유채, 26×25㎝, 보나미술관
푸시케에겐 두 언니가 있었습니다. 동생이 죽음과 결혼한 줄 아는 두 언니는 동생을 가여워하며, 걱정하며 집들이를 온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동생의 얼굴이 행복으로 환하게 빛나는 겁니다. 사랑에게서 빛을 받아 환해진 여인의 얼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 사랑하고 사랑받는 얼굴! 질투심에 사로잡힌 언니들은 ‘걱정’하는 척, 동생에게 충고합니다. 무조건 믿으라고만 했다고? 너는 네 남자가 누구인지 모르잖니? 등불을 켜고 그를 보아라! 너의 사랑은 믿을 수 없는 가짜일지도 몰라!
에덴동산에 유혹자 뱀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사랑에는 언제나 의혹을 제기하는 두 언니가 있습니다. 뱀이 하와의 그림자였던 것처럼 두 언니는 내 사랑의 그림자인 거지요. 그런데 아십니까? 그 비루하기만 한 의혹이 또 사랑의 등불이라는 것을!
의혹으로 푸시케는 등불을 들고 정면으로 에로스를 봅니다. 추하고 잔인하고 믿을 수 없는 괴물인 줄 알았던 자기 사랑이 천진하고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한 신이었습니다. 사랑은 신이었습니다.
눈부신 사랑을 확인한 푸시케는 오히려 난감합니다. 그제야 자신이 금기를 깼다는 걸 깨달은 거겠지요. 그 순간, 금기를 깼으니 사랑도 깨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하지 않았겠습니까? 루벤스의 그림은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그 후 에로스는 그녀를 떠나잖아요.
사랑의 의혹은 그렇게 사랑을 좀먹습니다. 그런데 또 의혹을 통과하지도 못한 채 봄꿈같이 들뜨기만 한 사랑이 무슨 힘이 있어 이 험한 세상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겠습니까? 사랑을 망가뜨리는 열등한 감정인 의혹 속엔 자기 사랑을 당당히 보고 스스로 건설해가도록 하는 등불이 있습니다. 사랑의 실체를 본 사람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니까요. 푸시케는 알 것입니다. 사랑을 모욕한 것도 그녀 자신이었고, 그 사랑을 구할 이도 그녀 자신이라는 사실을. 그리하여 푸시케는 자기 사랑을 구하여 건설하기 위해 산 넘고 물 건너 지하세계까지 들어가는 겁니다.
‘등불을 든 푸시케’는 루벤스의 말년작입니다. 루벤스는 출세한 화가였지요? 외교관으로, 화가로 출세가도를 달릴 때 사랑하는 아내 이자벨라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그 유명한 ‘인동나무 넝쿨 아래 루벤스와 이자벨라’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잡은 손이 그들이 얼마나 사이가 좋은 커플인지를 과시하지만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유럽의 장인들이 한땀한땀 지었을 사치스러운 명품의 옷들입니다. 사치스러운 옷들은 사실적이기만 한데 그것이 안락한 귀족생활을 향한 루벤스의 지향성을 보는 것 같아 오히려 답답합니다.
정든 아내가 죽고 외교관으로서의 삶도 피곤해진 루벤스는 공직에서 물러나고 재혼을 합니다. 그의 후기작에는 젊은 아내 헬레너를 모델로 한 것이 많은데, 아마 저 푸시케도 헬레너가 모델인 것 같습니다. 그의 말기작에는 귀족생활의 지향성이 사라집니다. 대신 신분의 코드 없이도 너무나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나, 그 자체로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이 들어서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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