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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의 그림철학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9) 루벤스의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ㆍ사랑은 고통을 두려워 하지 않는 열정

고통은 견디면 되지만,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약도 없지요? 주로 두려움 때문에 심장이 뛰는 사람은 큰일을 하지 못합니다. 사랑과 열정 때문에 심장이 뛰는 사람이 일을 내는 거지요. 루벤스의 프로메테우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지요? ‘사랑한다면 고통까지!’ 사랑의 열정은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득한 벼랑 끝에 누워 있는 프로메테우스를 보십시오. 저기가 바로 코카서스 산 절벽입니다. 저 절벽에서 그는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돌아설 수도 없게 포박되어 있습니다. 거기 독수리 한 마리가 날카로운 부리로 프로메테우스의 옆구리를 쪼아 간을 꺼내먹고 있네요. 독수리는 프로메테우스의 얼굴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한 치의 연민도, 죄책감도 없는 독수리의 표정이 제우스의 신조(神鳥)답습니다.

프로메테우스를 보십시오. 그는 일방적으로 간을 파 먹히면서도 두 눈을 부릅뜬 채 독수리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고통스러워하지만, 주눅 들어 있지도 않고 두려워 떨지도 않지요? 그런 그는 독수리에게 먹혀도 독수리의 먹이가 아닌 겁니다. 아니, 그는 독수리 뒤에 있는 제우스와 투쟁하고 있는 겁니다. 저 상황은 모로도 그렸고, 조르다노도 그렸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역시 루벤스의 작품입니다. 무엇보다도 독수리와 프로메테우스가 막상막하인 것이 좋습니다.

피터 폴 루벤스, <프로메테우스> 캔버스에 유채 714×828㎝

프로메테우스는 자기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자기와 닮은 존재를 만들었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였다는 뜻이지요?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을 보지 않고 자기 바깥세상만 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믿지 않으면 직관의 힘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지 않으면 예술은 기교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건 예술이 아닙니다. 자신을 응시하면서 자신의 작품에 귀 기울이게 되고, 섬세해진 그 마음으로 작품을 살펴야 작품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겠지요? 프로메테우스의 직관은 그가 만든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이었습니다. 생명이 없는 것은 싸늘하지요? 그러니까 불은 생명입니다.

인간을 사랑한 죄로 인간에게 생명의 불을 선물하고 싶어 했던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벼락에서 불씨를 훔칩니다. 당연히 제우스는 화가 났지요. 헤르메스를 시켜 프로메테우스를 코카서스 산 절벽에 포박하고, 신조 독수리를 보내 간을 쪼아 먹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프로메테우스의 간은 매일 밤 되살아난다는 것을. 낮이 되면 독수리는 싱싱하게 되살아난 간을 다시 파먹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간은 그렇게 고통과 재생을 반복합니다.

불이 생명인 것처럼 간 또한 생명입니다. 간은 생명의 장기입니다. 정인경 심리에세이 <여우아이>에선 그 간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알고 있니? 아주 먼 옛날 예언자들은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들의 간을 보고 여러 가지 징조를 읽어냈단다. 똑똑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간이 그 형태나 빛깔로 어떤 경고나 통보를 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단다. …내 피는 살아 있는 피를 원했다. 나는 간을 씹을 때마다 어느 강렬한 지대에서 한 마리의 동물이 된 것과도 같은 묘한 흥분을 가졌다.”

생명은 생명을 먹고 자랍니다. 독수리는 거인의 간을 사랑하고, 거인은 고통과 싸우며 새롭게 태어나며, 우리는 마음속에 타오르는 생명의 불을 발견하며 인간으로 태어난 일의 신비를 느낍니다. 독수리를, 포박을, 코카서스 산의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간을, 생명을 해하지 못합니다. 까마득한 고통과 절체절명의 고독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두 눈 부릅뜨고 독수리를 응시하는 프로메테우스를 다시 한 번 느껴보십시오. 사랑은 두려움을 모르는 열정입니다.

기꺼이 고통을 감당하려는 의지와 용기 없이 생명의 불씨는 지켜지지 않고, 새로운 세상은 열리지 않습니다. 당신의 간을 공격하는 건 잔챙이가 아니라 제우스의 독수리입니다. 고통의 크기만큼 생명의 간이 싱싱해집니다, 힘이 생깁니다. 언제나 새로운 세상은 고통 너머에서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