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마을 어르신들 생각해서라도 이용소 문 닫을 수야 없지예”
지난 3년 동안 머리카락을 길렀다. 아니 자르지 않고 그대로 두니 꽁지머리에서 어느새 말총머리가 되었다. 일생에 한 번쯤은 길러보는 것도 멋지겠다 생각만 했지 이렇게 정말 말총머리가 될 줄은 몰랐다. 지리산에 들어온 뒤에 몇 번 빡빡머리는 해봤지만(사실 빡빡머리가 제일 편하다), 지난 3년 동안 미용실이나 이발소 근처에는 일절 가지 않았다.
32년째 같은 자리에서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는 박영필씨. 닳고 닳은 손가위와 바리캉, 1970~80년대의 해묵은 포스터와 누런 액자들이 걸려있는 그의 이발소는 마치 추억을 되새기는 영화 세트장 같다. 세월은 흘렀지만 추억이 있는 곳. 그래서 그의 이발소에는 그리운 것이 많은 어르신들이 먼 길을 걸어 이곳까지 찾아온다. | 이원규 시인 촬영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부터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다. 2008년 2월10, 11일 숭례문이 불에 타는 것을 보며 너무나 불길한 ‘역천’의 예감이 들었다. 그날은 종교인들과 함께 한반도 대운하 반대를 위한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의 총괄팀장으로서 4대강 순례의 길잡이로 나서기 바로 전날이었다. 한강 하구인 강화도 애기봉에서 출발해 영하 17도의 강바람 속을 걷고 걸으며 강변에 천막을 치고 잠을 자는 풍찬노숙의 길을 나섰다. 103일 동안 한강~낙동강~영산강~금강~한강 3000리를 걸어 서울로 돌아오니 광우병 촛불문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한반도 대운하의 반대 여론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미용실에 갔다가 쫓겨나고 말았다. 흰 가운을 입은 채 아무리 기다려도 ‘머리를 어떻게 자를 것인지’ 묻지를 않았다. “저, 여기요?” 하고 몇 번을 불러도 원장과 젊은 여직원은 흘깃흘깃 훔쳐보기만 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원장으로 보이는 중년 여자가 말을 걸었다. “근데, 돈은 있으세요?” 하는 것이었다. 놀란 토끼눈으로 “예? 돈이야 있지요. 스포츠머리로 확 밀어주세요” 하자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저어, 어제도 노숙자 한 분이 머리를 자르고는 돈이 없다고 해서 말이에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서야 나의 몰골이 행려병자 같다는 것을 알아챘다. 강바람에 얼고 그을린 시커먼 얼굴과 수염, 그리고 멋대로 자라 마구 헝클어진 머리가 거울 속에 또렷하게 보였다. 나는 두 말도 하지 않고 벌떡 일어서서 가운을 벗어던지고는 서울의 휘황찬란한 거리로 뛰쳐나왔다.
‘오늘부터 다시는 머리를 깎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날 밤에 전화 한 통을 받은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회의 중인데다 잘 모르는 서울의 전화번호여서 받을까 말까 했는데, 워낙 여러 번 걸려와 결국 재발신을 눌렀더니 어느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리산에서 빌려 사는 집의 주인 할머니였다. 대뜸 “집을 비워주세요. 이유는 묻지 말고 당장 비워 달라고요. 나도 골치 아프니까 더 이상 묻지 말고, 아예 싸게 줄 테니 집을 사버리든지 아니면 당장 나가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계약기간도 남아 있는 집에서(물론 공짜나 마찬가지로 살았지만) 왜 갑자기 쫓겨나야 하는지 황당했다. 그러던 차에 집에서도, 미용실에서도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보니 위기의 4대강도 문제지만 내 ‘꼬라지’도 참으로 한심했다. 그날부터 미용실도 가지 않았으며, 조금 더 버티다 어렵게 빈집을 구해 이사를 하고 보니 그 사이 내 머리카락의 길이는 더 길어졌다.
그해 봄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순례 중에 경북 고령을 지난 적이 있다. 38일째를 걸어 낙동강변 현풍면 도동서원을 지날 때 바로 강 맞은편 마을인 고령군 개진면 오사마을을 둘러본 적이 있다. 낙동강이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준 너른 평야와 강 둔치에는 그 유명한 ‘개진감자’를 파종하고 있었다. 그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이 바로 ‘오사이용소’였다. 주인도 없는 마을이용소의 창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면소재지의 이발소마저 미용실에 밀려 거의 문을 닫는 마당에 마을이발소가 아직도 영업 중이었다. 30여년 전 내 고향 하내리의 풍경과 다를 바 없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지난해 초부터 낙동강 강마을 조사를 다녔다. 몇 군데의 마을회관에 며칠씩 머물기도 했는데, 나는 자원해서 오사마을에 몇 번을 다시 갔다. 이 마을은 팔만대장경을 내린 개경포(開經浦)로 유명한 곳이다. 14세기 전란을 피해 팔만대장경을 싣고 강화도 선원사에서 서해안을 타고 내려와 남해안을 거쳐 다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합천 해인사로 옮길 때 바로 이 포구에서 내린 것이다. 경북 고령군 개진면 오사1리 옛 절터(개진초·중등학교)에서 수도하던 스님 등이 이 팔만대장경 이운(移運) 길에 동원됐다. 이때부터 개산포는 ‘경전을 내린 나루’라는 뜻의 개경포(開經浦)로 불리기 시작했다.
개경포 공원을 지나 제석산의 품속에 안기면 오사 1리인데 그 마을길로 개진초·중교를 가다보면 허름한 간판이 눈에 띈다. ‘오사이용소(친절봉사)’와 ‘문방구(신용본위)’란 글씨가 색이 바랜 채 남아 있다. 이발사 박영필씨(58)는 32년째 줄곧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낡은 의자 2개와 시멘트로 만든 세면대, 닳고 닳은 손가위와 머리를 깎는 ‘바리캉’과 칠이 벗겨진 금고, 80년대 초의 해묵은 포스터와 ‘업소실천사항’ ‘고객실천사항’의 누런 액자들이 걸려 있다. 마치 추억을 되새기는 영화 세트장 같았다.
약 40가구 50여명이 사는 작은 마을에 손님이 많을 리가 있겠는가. 몇 번을 가보아도 머리 깎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안타깝기도 하고 궁금해졌다. 박영필씨는 씨익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손님이 한 분도 오지 않아도 그래도 열어야지예, 우얍니꺼?” 구미 출신인 그는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이 마을에 들어와 쇠락하는 농촌의 현실을 지켜보면서도 이 마을 떠나지 않았다. “마을 어르신들이 몇 분 안되지만 그래도 날마다 문을 엽니더. 모두 연로하셔서 읍내로 나갈 수도 없고예. 내가 아니면 이 노친네들 생전 머리도 못 깎는다 아입니꺼? 단 한 분이라도 오시면 머리도 자르고 또 감겨주고 면도도 해드려야지예. 32년 된 이발소 문을 닫을 수야 없지예. 마, 농사도 못 짓는 데다 배운 것도 이것밖에 없고요. 아이고, 떠나려면 벌써 떠났지예. 그래도 멀리 이사를 가시고 나서도 저에게 머리를 자르려 오시는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고령 읍내뿐만이 아니라 대구와 현풍 등에서도 이따금 찾아옵니더.”
박씨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한 해가 다르게 줄어드는 ‘고객’이지만 그들을 위해 문을 닫을 수 없다고 했다. “제가 처음 올 때 이 마을은 대단했지예. 지금은 폐교가 되다시피 한 개진초·중학교 학생이 총 15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80년대 초에는 700명이나 되었지예. 그때는 참 좋았심니더. 주민과 학생들이 하루 종일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아입니꺼? 처음엔 문방구도 하고 이발소까지 했는데, 인생사 새옹지마 아잉교. 하하하.” 비록 웃고는 있지만 그의 아련한 눈빛엔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듯했다.
그는 이발소 문을 오전에만 연다고 했다. 고객이라야 많지 않으니 오전에 한두 분 찾아오면 그것으로 하루 일과가 끝날 뿐만 아니라 생계를 꾸려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저도 묵고는 살아야지예. 아들 둘은 다 키워놨으니 걱정은 없지만, 그래도 마누라하고 둘이 묵고 살려면 부업이라도 해야지예. 내사 마, 할 게 없어 뻥튀기 장사까지 합니더. 걱정 마이소. 그래도 끝까지 이발소 문은 열 겁니더.” 그는 몇 년 전부터 작은 트럭을 구입해 오후시간에는 현풍 등 대구 근교의 아파트단지를 돌며 뻥튀기 장사를 하고 있다.
폐교 직전의 학교와 고령화사회로 접어든 농촌현실과 그 운명의 궤적을 함께해온 오사이용소. 박영필씨와 낡은 오사이용소는 잃어버린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역천의 시절이 지나가고 내 머리카락을 자르게 된다면 바로 이 오사이용소를 찾아갈 것이다.
오사마을 큰어른으로 불리던 장영분 할머니가 지난해 11월 101세 생일잔치에서 가족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
이 마을에는 또 한 사람 잊지 못할 분이 있다. 이 연재의 첫 회에 잠깐 소개했던 ‘살아 있는 박물관’인 101세 할머니다. 입술을 떨며 “하이 참, 내 생전에 농사 못 지 먹게 하는 나라도 첨(처음)이고, 갱빈(강변)에 감자 마늘 양파도 못 심게 하는 대통령도 첨이라카이, 난생 첨!” 하시던 그 할머니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난해 11월30일에 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고령군 쌍림면 박실이라는 마을에서 오사마을로 시집와 일평생 박실댁으로 불리며 이 마을의 큰어른이었던 장영분 할머니. 지난해 5월에 소문난 효자효부 서창덕씨 부부가 101세 생일을 맞아 차려준 마을 큰잔치의 감동적인 풍경이 눈앞에 선하다. 4대에 걸친 친·인척들과 마을사람 150명이 모인 성대한 잔치였다.
1910년 4월25일, 경술국치의 해에 태어나 광복과 한국전쟁, 그리고 10명의 대통령을 지켜보며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물결을 온몸으로 버텨낸 산증인이자 한 그루 거대한 신목이 쓰러지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나라를 빼앗길 때 태어나 마을 앞 낙동강이 죽어갈 때 돌아가신 것이다. ‘팔만대장경 이운길’이 덤프트럭 행렬에 점령된 낙동강변에서 두 눈을 감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원규의 길인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15) 전국여농 토종씨앗사업단장 심문희씨 (0) | 2011.01.19 |
---|---|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14) 여주 남한강변 귀농 홍일선 시인 (0) | 2011.01.12 |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12) 위기의 구례군 섬진강 둑길 (0) | 2010.12.29 |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11) 순천 중앙시장 구두수선공 황충식씨 (0) | 2010.12.22 |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10) 하동군 옥종딸기마을 (0) | 2010.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