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시인
남한강의 다른 이름인 여강(驪江) 100리 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옛길 ‘아홉사리’의 시작이자 끝인 마을이다. ‘2만5000분의 1 지도’에 의지해 어렵게 찾아갔을 때 마을 앞 여강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물길이 휘도는 도리섬에는 고라니들이 뛰놀고 백사장과 은빛 여울이 꿈결처럼 펼쳐져 있었다.
여강에서 제일 가까운 곳의 외딴집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야산 솔숲과 잘 어울리는 너와지붕의 황토벽돌집이었다. 보아하니 ‘한 다리만 건너면 알 만한 사람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농수로가 집 입구 위를 지나며 대문 역할을 하는데, 그 옆 나무 게시판에 포스터 하나가 붙어 있었다. ‘여강 생명농업 문학축전, 주최 한국문학평화포럼’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그때서야 무릎을 쳤다. 오랜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귀농한 홍일선(洪一善·61) 시인의 집이었다. 세상은 이렇게 좁다. 씨줄날줄로 꽉 짜여 있는 시절인연 앞에서는 그 모두가 부처님 손바닥 안인 것이다.
그러나 불과 3년 만에 도리마을 앞 남한강은 천국에서 아수라 지옥으로 변했다. 채 1년도 되지 않는 4대강 공사에 도리섬은 뭉텅 잘려나가고 백사장과 여울은 사라졌다. 철새·갯버들·억새·단양쑥부쟁이·물고기 등이 사라지고 죽음의 시간이 흐르는 강,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포클레인과 덤프트럭들에게 점령당해 내장과 뼈가 다 드러난 채 울부짖는 강이 되고 말았다. 홍일선 시인은 날마다 밤마다 여강의 통곡소리를 들으며 함께 울었다. 절망과 분노와 자괴감으로 아프고 또 아팠다. 시인의 몸무게가 6㎏이나 빠졌다.
“이곳 도리마을이 나의 마지막 터라고 생각했지.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고종명(考終命)의 터로 삼고 여기에 왔어. ‘시인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했던가. 내 고향 화성시 동탄 석우리의 논밭은 고층빌딩에 묻혀 사라졌으니 막상 갈 데가 없었지. 그래서 전국을 다 둘러보았어. 청산도까지 가봤으니까. 끝내 인연이 닿은 곳이 바로 이 자리였지. 2004년 처음 이 숨은 땅을 보자마자 턱 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감이 왔지. 운도 좋았고.”
수원농고 출신인 그는 1980년 계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쑥꽃’ 외 5편으로 등단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농민시인이다. 김용택·김정환·황지우·나종영·김사인·채광석 시인 등과 함께 ‘시와경제’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시집 <농토의 역사> <한 알의 종자가 조국을 바꾸리라> <흙의 경전>을 펴냈다. 현재 한국문학평화포럼 회장인 그가 20년 전 한국작가회의 사무국장일 때 나 또한 총무간사로 일했으니 참으로 인연이 깊다.
민주화운동의 활동가이자 후원자였던 그는 80년대 영등포시장 중앙통에서 곱창 전문집 ‘백두산’을 운영하기도 했다. 당시 그 집에는 춥고 배고픈 문인들이 밤낮없이 안방처럼 들락거렸다. 언제나 살붙이처럼 반갑게 맞이하며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내놓았다. 어렵게 번 돈을 김남주·박노해 시인 등과 민주화 투사들의 생계비 및 후원금 등으로 쾌척했다. 자신의 시창작을 잠시 내려놓고 곱창 장사와 독서실을 운영하며 민주화운동의 뒤치다꺼리를 해왔다. 그러던 그가 2006년 봄, 마침내 18년 넘게 살던 집과 독서실을 처분하고 도리마을을 마지막 고종명의 터로 삼아 스며든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한반도 대운하라는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너무나 좋아서 잠이 안 왔어. 여울소리를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바람에 오히려 시 한 편 못썼어. 논밭일도 신명나고 아침저녁으로 강변에 나가면 경배하듯이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왔어. 나 혼자 행복해서 어쩌나 미안할 정도였지. 하지만 이렇게 사단이 났으니. 휴우.” 크게 한숨을 쉬며 입술을 깨무는 시인의 두 눈이 촉촉이 젖어들었다.
“도대체 그렇게 좋던 집마저 자꾸 싫어지는 거야. 밖에 나갔다가 집에 오려면 덜컥 겁부터 나. 막걸리 한 병 들고 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우리 집과 공사 중인 여강 쪽을 바라보면 자꾸 어지럽고 그냥 눈물이 쏟아져. 겨우 몇 년 살았는데도 이러니 강변 곳곳에 일평생 살아온 어르신들은 어쩌겠어. 공사가 시작된 뒤부터 다락방 서재에는 한 번도 못 올라가봤어. 잘 못 온 건 아닌지 후회도 되고, 겨우 잠이 들어도 꿈속에 자꾸 물고기와 새들만 보이고. 무서워.”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1월6일에도 공사는 밤 10시까지 이어졌다. 오전 7시부터 하루 14시간 동안 덤프트럭의 굉음이 강과 마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해 동원된 일꾼들도 휴가마저 반납된 속도전의 ‘작전용 로봇’으로 전락해 있었다.
노동자가 죽어나가도 세상은 조용했다. 근로기준법이나 인권은 고사하고 자연법과 행복추구권은 ‘사치’로 평가절하됐다. 여울이 사라진 자리에는 수심 6m 이상의 거대한 수로가 열리고, 강변 자전거 길은 마치 직선의 활주로처럼 넓기만 했다. 강과 마을은 자전거 길의 이름으로 38선처럼 단절되고 말았다.
“인간과 자연 모두가 불행한 시대야. 4대강 살리기라고? 아이고, 누구든 직접 보면 그런 말 못하지. 저기 일하는 덤프트럭 기사에게 물어봐. 강천보에서 일하던 포클레인 기사가 ‘이건 운하예요’ 솔직히 말하더라고. 그런데 금방 그만뒀다 하더군. 환경문제 뭐 이런 거는 잘 모르지만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양심상 못하겠더라고. 인부들이 죽기도 하고, 신륵사 앞 여강선원에서 스님들이 기도하는 것을 본 뒤로는 꿈자리가 사납더래. 뭔가 자꾸 죄를 짓는 것 같다는 거야. 나도 이러다 죽을까 싶어 바짝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그렇게 상처 입은 시인에게도 다행히 새 생명의 기운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 기운생동의 발원지는 다름 아닌 토종닭이었다. 반생명의 해독제는 역시 생명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는 ‘닭님’으로 부르는 토종닭들을 마치 모시듯 기르고 있다. 동화작가 이상권씨가 흰닭·검정닭·노랑닭·녹둣빛이 도는 닭 등 우리 토종닭 다섯 마리를 주었다고 한다. 이 토종닭들은 신기할 정도로 자연 부화를 잘했다.
“지난 늦여름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사태가 날 정도로 큰 수해가 났었지. 그때 닭들도 혼비백산 도망갔는데, 다 죽은 줄 알았어. 그런데 한참 뒤에 뒷산에서 어미닭이 병아리 열다섯 마리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거라. 우리 집으로. 눈물이 핑 돌았지. 절망에 빠져 있던 내게 어미닭과 병아리들이 생명의 큰 화두를 던져준 거야. 이 크고 멋진 집을 버리려 했던 내가 한심스러웠지. 그때부터 ‘닭님’이라 부르기로 맹세했어.”
말 그대로 생명농업과 자연농법을 고수하는 그는 지금도 서로 존댓말을 하는 아내 임은희씨(54)와 여주농고를 졸업한 아들과 마치 도반처럼 ‘3인행’의 농사를 짓고 있다. 제초제나 농약을 치지 않고 우리 콩과 옥수수를 심고 논농사를 지으며 음식 솜씨가 뛰어난 아내는 전통된장을 담갔다. 어느새 닭님들은 부화를 거듭해 600마리나 되었다. 겨울인데도 날마다 건강한 유정란 150개를 낳을 정도가 되었다. 비로소 ‘바보숲 명상농원’이라는 이름도 하나 지었다.
“전국의 닭 잘 키우는 고수들을 다 찾아다녔지. 결론은 자연농법이었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물과 사료를 주는 게 핵심이야. 깻묵과 쌀겨 등을 버무려 닭모이를 직접 만들어주니 힘들기는 해도 닭님들이 건강해. 야산에 풀어놓으니 지렁이와 쑥이며 어성초 등을 먹고, 자연농법으로 키우니 닭장에 아무 냄새도 안나. 닭님들이 새들처럼 훨훨 날아다녀. 구제역, 조류독감 이런 것도 다 속도전과 대량생산의 욕망 때문이야. 성장촉진제와 항생제가 버무려진 사료를 먹이고 전깃불만 눈부신 지옥 같은 밀집사육이 문제야. 도대체 저항력이 생길 수가 없지. 악순환이야. 지금의 이 세상도 마찬가지 아닌가. 요즘은 시 한 편보다 닭님들이 낳아준 건강한 달걀 하나가 더 소중해.”
그는 이제 더 이상 울지 않는다. 4대강 죽임의 행렬과 맞서며 ‘우리 이제 강물 앞에 무릎 꿇어야 하리’ 등의 주옥같은 시를 쓰며 남한강의 증언자이자 목격자가 되기로 했다.
홍일선 시인은 “예나 지금이나 농민들이 알아먹지 못하는 시는 죄라고 생각한다”며 도리마을에서 고종명이 아니라 ‘정의를 위하여 죽는 목숨’인 정명(正命)의 농민시인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여강에서 제일 가까운 곳의 외딴집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야산 솔숲과 잘 어울리는 너와지붕의 황토벽돌집이었다. 보아하니 ‘한 다리만 건너면 알 만한 사람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농수로가 집 입구 위를 지나며 대문 역할을 하는데, 그 옆 나무 게시판에 포스터 하나가 붙어 있었다. ‘여강 생명농업 문학축전, 주최 한국문학평화포럼’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자연농법으로 기른 콩으로 쑨 메주가 걸려 있는 홍일선 시인의 강변 황토집
그때서야 무릎을 쳤다. 오랜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귀농한 홍일선(洪一善·61) 시인의 집이었다. 세상은 이렇게 좁다. 씨줄날줄로 꽉 짜여 있는 시절인연 앞에서는 그 모두가 부처님 손바닥 안인 것이다.
그러나 불과 3년 만에 도리마을 앞 남한강은 천국에서 아수라 지옥으로 변했다. 채 1년도 되지 않는 4대강 공사에 도리섬은 뭉텅 잘려나가고 백사장과 여울은 사라졌다. 철새·갯버들·억새·단양쑥부쟁이·물고기 등이 사라지고 죽음의 시간이 흐르는 강,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포클레인과 덤프트럭들에게 점령당해 내장과 뼈가 다 드러난 채 울부짖는 강이 되고 말았다. 홍일선 시인은 날마다 밤마다 여강의 통곡소리를 들으며 함께 울었다. 절망과 분노와 자괴감으로 아프고 또 아팠다. 시인의 몸무게가 6㎏이나 빠졌다.
홍일선 시인의 강변 황토집
“이곳 도리마을이 나의 마지막 터라고 생각했지.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고종명(考終命)의 터로 삼고 여기에 왔어. ‘시인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했던가. 내 고향 화성시 동탄 석우리의 논밭은 고층빌딩에 묻혀 사라졌으니 막상 갈 데가 없었지. 그래서 전국을 다 둘러보았어. 청산도까지 가봤으니까. 끝내 인연이 닿은 곳이 바로 이 자리였지. 2004년 처음 이 숨은 땅을 보자마자 턱 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감이 왔지. 운도 좋았고.”
수원농고 출신인 그는 1980년 계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쑥꽃’ 외 5편으로 등단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농민시인이다. 김용택·김정환·황지우·나종영·김사인·채광석 시인 등과 함께 ‘시와경제’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시집 <농토의 역사> <한 알의 종자가 조국을 바꾸리라> <흙의 경전>을 펴냈다. 현재 한국문학평화포럼 회장인 그가 20년 전 한국작가회의 사무국장일 때 나 또한 총무간사로 일했으니 참으로 인연이 깊다.
이원규 시인 촬영
민주화운동의 활동가이자 후원자였던 그는 80년대 영등포시장 중앙통에서 곱창 전문집 ‘백두산’을 운영하기도 했다. 당시 그 집에는 춥고 배고픈 문인들이 밤낮없이 안방처럼 들락거렸다. 언제나 살붙이처럼 반갑게 맞이하며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내놓았다. 어렵게 번 돈을 김남주·박노해 시인 등과 민주화 투사들의 생계비 및 후원금 등으로 쾌척했다. 자신의 시창작을 잠시 내려놓고 곱창 장사와 독서실을 운영하며 민주화운동의 뒤치다꺼리를 해왔다. 그러던 그가 2006년 봄, 마침내 18년 넘게 살던 집과 독서실을 처분하고 도리마을을 마지막 고종명의 터로 삼아 스며든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한반도 대운하라는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너무나 좋아서 잠이 안 왔어. 여울소리를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바람에 오히려 시 한 편 못썼어. 논밭일도 신명나고 아침저녁으로 강변에 나가면 경배하듯이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왔어. 나 혼자 행복해서 어쩌나 미안할 정도였지. 하지만 이렇게 사단이 났으니. 휴우.” 크게 한숨을 쉬며 입술을 깨무는 시인의 두 눈이 촉촉이 젖어들었다.
점동면 도리마을 남한강 공사현장.
“도대체 그렇게 좋던 집마저 자꾸 싫어지는 거야. 밖에 나갔다가 집에 오려면 덜컥 겁부터 나. 막걸리 한 병 들고 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우리 집과 공사 중인 여강 쪽을 바라보면 자꾸 어지럽고 그냥 눈물이 쏟아져. 겨우 몇 년 살았는데도 이러니 강변 곳곳에 일평생 살아온 어르신들은 어쩌겠어. 공사가 시작된 뒤부터 다락방 서재에는 한 번도 못 올라가봤어. 잘 못 온 건 아닌지 후회도 되고, 겨우 잠이 들어도 꿈속에 자꾸 물고기와 새들만 보이고. 무서워.”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1월6일에도 공사는 밤 10시까지 이어졌다. 오전 7시부터 하루 14시간 동안 덤프트럭의 굉음이 강과 마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해 동원된 일꾼들도 휴가마저 반납된 속도전의 ‘작전용 로봇’으로 전락해 있었다.
노동자가 죽어나가도 세상은 조용했다. 근로기준법이나 인권은 고사하고 자연법과 행복추구권은 ‘사치’로 평가절하됐다. 여울이 사라진 자리에는 수심 6m 이상의 거대한 수로가 열리고, 강변 자전거 길은 마치 직선의 활주로처럼 넓기만 했다. 강과 마을은 자전거 길의 이름으로 38선처럼 단절되고 말았다.
“인간과 자연 모두가 불행한 시대야. 4대강 살리기라고? 아이고, 누구든 직접 보면 그런 말 못하지. 저기 일하는 덤프트럭 기사에게 물어봐. 강천보에서 일하던 포클레인 기사가 ‘이건 운하예요’ 솔직히 말하더라고. 그런데 금방 그만뒀다 하더군. 환경문제 뭐 이런 거는 잘 모르지만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양심상 못하겠더라고. 인부들이 죽기도 하고, 신륵사 앞 여강선원에서 스님들이 기도하는 것을 본 뒤로는 꿈자리가 사납더래. 뭔가 자꾸 죄를 짓는 것 같다는 거야. 나도 이러다 죽을까 싶어 바짝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그렇게 상처 입은 시인에게도 다행히 새 생명의 기운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 기운생동의 발원지는 다름 아닌 토종닭이었다. 반생명의 해독제는 역시 생명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는 ‘닭님’으로 부르는 토종닭들을 마치 모시듯 기르고 있다. 동화작가 이상권씨가 흰닭·검정닭·노랑닭·녹둣빛이 도는 닭 등 우리 토종닭 다섯 마리를 주었다고 한다. 이 토종닭들은 신기할 정도로 자연 부화를 잘했다.
“지난 늦여름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사태가 날 정도로 큰 수해가 났었지. 그때 닭들도 혼비백산 도망갔는데, 다 죽은 줄 알았어. 그런데 한참 뒤에 뒷산에서 어미닭이 병아리 열다섯 마리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거라. 우리 집으로. 눈물이 핑 돌았지. 절망에 빠져 있던 내게 어미닭과 병아리들이 생명의 큰 화두를 던져준 거야. 이 크고 멋진 집을 버리려 했던 내가 한심스러웠지. 그때부터 ‘닭님’이라 부르기로 맹세했어.”
말 그대로 생명농업과 자연농법을 고수하는 그는 지금도 서로 존댓말을 하는 아내 임은희씨(54)와 여주농고를 졸업한 아들과 마치 도반처럼 ‘3인행’의 농사를 짓고 있다. 제초제나 농약을 치지 않고 우리 콩과 옥수수를 심고 논농사를 지으며 음식 솜씨가 뛰어난 아내는 전통된장을 담갔다. 어느새 닭님들은 부화를 거듭해 600마리나 되었다. 겨울인데도 날마다 건강한 유정란 150개를 낳을 정도가 되었다. 비로소 ‘바보숲 명상농원’이라는 이름도 하나 지었다.
“전국의 닭 잘 키우는 고수들을 다 찾아다녔지. 결론은 자연농법이었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물과 사료를 주는 게 핵심이야. 깻묵과 쌀겨 등을 버무려 닭모이를 직접 만들어주니 힘들기는 해도 닭님들이 건강해. 야산에 풀어놓으니 지렁이와 쑥이며 어성초 등을 먹고, 자연농법으로 키우니 닭장에 아무 냄새도 안나. 닭님들이 새들처럼 훨훨 날아다녀. 구제역, 조류독감 이런 것도 다 속도전과 대량생산의 욕망 때문이야. 성장촉진제와 항생제가 버무려진 사료를 먹이고 전깃불만 눈부신 지옥 같은 밀집사육이 문제야. 도대체 저항력이 생길 수가 없지. 악순환이야. 지금의 이 세상도 마찬가지 아닌가. 요즘은 시 한 편보다 닭님들이 낳아준 건강한 달걀 하나가 더 소중해.”
그는 이제 더 이상 울지 않는다. 4대강 죽임의 행렬과 맞서며 ‘우리 이제 강물 앞에 무릎 꿇어야 하리’ 등의 주옥같은 시를 쓰며 남한강의 증언자이자 목격자가 되기로 했다.
홍일선 시인은 “예나 지금이나 농민들이 알아먹지 못하는 시는 죄라고 생각한다”며 도리마을에서 고종명이 아니라 ‘정의를 위하여 죽는 목숨’인 정명(正命)의 농민시인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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