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관 논설위원
첫눈이 내렸다고 한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데 첫눈이 지나갔다고 한다. 올 첫눈은 누구의 가슴도 적시지 않고 도둑처럼 왔다 갔다. 지난 8일 밤에 내렸다고 하는 서울의 첫눈은 작년보다 7일, 예년보다는 14일이나 이르다. 그러나 첫눈은 그렇게 쉽게 와서는 안 된다. 단풍이 미처 지기도 전에 느닷없이 내려서는 안 된다. 가을이 미처 떠나기도 전에 겨울을 알리는 고지서처럼 무심히 첫눈이 배달돼서는 안 된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겨울이 가을을 덮친다/ 울긋불긋/ 위에/ 희끗희끗/… 네가 지키려 한 여름이, 가을이,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가는구나/ 내일이면 더 순수해질 단풍의 붉은 피를 위해/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첫눈이 쌓인다.” 최영미 시인에게 첫눈은 치한과도 같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덮쳤기 때문이다. 마음 준비도 안 됐는데 맞은 첫눈은 마치 도둑맞은 첫 키스인 양 당혹스럽다. 첫눈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내리는 것이 아니다. 첫눈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와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정호승 시인의 ‘첫눈 오는 날 만나자’이다. 첫눈은 만남을 약속한 연인들에게 뿌려져야 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노래한다. “사랑은 어떻게 너에게로 왔던가. 햇살이 빛나듯이, 혹은 꽃 눈보라처럼 왔던가. 기도처럼 왔던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첫눈은 기도처럼 순결하게 다가온다.
첫눈은 아무 곳에나 내리지 않는다. “첫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 곳은/ 너와 처음 만났던 도서관 숲길이다/ 아니다/ 네가 처음으로 무거운 내 가방을 들어주었던/ 버스 종점이다/ 아니다/ 버스 종점 부근에 서 있던/ 플라타너스 가지 위의 까치집이다/ 아니다.” 정호승 시인에 따르면 첫눈이 내리는 곳은 “나를 첫사랑이라고 말하던 너의 입술 위다/ 그렇다/ 누굴 사랑해본 것은 네가 처음이라고 말하던/ 나의 입술 위다.” 그렇다. 첫사랑을 고백하는 너와 나의 입술 위에 첫눈은 수줍게 내린다.
첫눈이 왔지만 아직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을 기도하는 이들이다. 단풍잎은 져도 이들 가슴속의 이름은 지지 않는다. 그 순결한 기다림으로, 다시 첫눈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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