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근 논설위원 grt@kyunghyang.com
릭은 어느 날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 아메리카’에서 우연히 일자를 만난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카사블랑카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기항지였고, 이 ‘떠나는 자들의 도시’에 있는 그의 카페는 망명 정보를 얻으려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일자도 반나치 지도자인 남편 리즐로와 함께 그 카페를 찾았다가 옛 사랑과 재회한 것이다. 릭과 일자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하지만, 릭은 “이 미친 세상에서 동시에 세 사람이 행복해질 수는 없다”면서 일자를 떠나보낸다. 영화 <카사블랑카>의 줄거리다. 이 흑백영화는 이제 그 자체로 역사가 되었지만, 주요 등장인물 하나는 오늘의 정치에서도 살아나 ‘정치적 비전이란 무엇인가’ 하는 시효 없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쿠덴호프 칼레르기. 리즐로라는 캐릭터로 재현된 이 실제 인물은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자기 정치철학을 피력할 때 자주 인용한 오스트리아 정치인이자 저술가·사상가이다. 1923년 <범유럽>이라는 책을 통해 처음으로 유럽 통합을 제창한 유럽연합(EU)의 아버지로, 도쿄 주재 오스트리아 공사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사상에 심취한 하토야마의 국정 비전은 장대했다. “우주가 생성된 지 127억년”으로 시작하는 그의 국회 소신 표명 연설이 얼마나 진지한 사색의 결실이었는지, 변화를 향한 얼마나 뜨거운 열망의 표현이었는지, 국가·자본·인간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얼마나 강한 의지의 분출이었는지는 인간권, 마하트마 간디, 생명을 지키는 예산, 전후 행정의 대청소,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몇 가지 단어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나의 정치철학’이라는 글에서는 미국 주도의 세계화가 초래한 시장 근본주의와 미국 패권을 비판하는 파격을 선보이기도 했다.
하토야마의 좌절이 남긴 질문
그래서 그가 과연 자기 정치철학을 구현할 수 있는지, 언제 어떻게 자기 꿈에 대해 타협하고 포기할지 그 굴곡들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참이었다. 그 과정은 한국 정치를 위해서도 관찰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6·2 지방선거에 한눈파는 사이 스스로 껴안은 우주적·세기적 의제의 무게를 감당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정치인의 꿈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정치인이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그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질문들이다.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국정을 운영하는 정치인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합법적) 폭력”이므로 정치인은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어떤 종류의 인물이라야 감히 자기의 손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도 좋은가” 하는 자질 문제가 등장하는 것이다. 베버는 정치인의 자질로 열정을 강조했다. 열정은 대의에 대한 확신 혹은 비전을 의미한다. 그러나 열정은 객관성이 있어야 한다. 만일 객관성을 결여하면 자기 도취에 빠진 채 권력에만 의존, 결국 “정치적 행위가 내포하고 있는 비극성”을 낳는다. 오랜 습관에 따라 강바닥을 파헤치는, 비전 없이 권력에 의존하는 정치를 생각해 보라. 하토야마처럼 꿈꾸는 것만이 아니라, 꿈이 없는 것도 문제다.
정치인은 악마적 수단(폭력적 강제력)으로 대의를 실현해야 하는 수단과 목적의 괴리 현상을 온전히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하지만, 또한 그런 불가능에 도전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베버는 말했다. “만약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정치를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하토야마의 좌절을 꿈을 포기하라는 신호로 오해하면 안 된다. 그의 실패가 ‘정치는 꿈을 현실로 바꾸는 신성한 과업’이라는 사실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수를 꿈꾸게 하는 정치인 필요
하토야마는 사임 연설에서 “사람들이 점차 정부와 집권당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사임한 진정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하토야마는 꿈꾸었지만, 사람들은 그와 함께 꿈꾸지 않은 것이다. 꿈꾸는 사람이 더 많이 필요하다. 더 많은 사람들을 꿈꾸게 하는 정치인이 필요하다. 칼레르기는 말했다. “하나의 생각이 유토피아에 머물지, 실현될지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수와 실행력에 달려 있다. 범유럽주의를 믿는 수천명이 있는 한 그것은 유토피아다. 그러나 수백만명이 믿으면 그것은 비로소 정치적 프로그램이 되며, 수천만명이 믿으면 실현된다. 모든 위대한 역사적 사건은 유토피아로 시작되어 현실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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