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다는 것에 대하여

다음 카페 ‘김예슬 선언’에선 무슨 일이…

김민아 기자 makim@kyunghyang.com경향신문

ㆍ고려대생 김예슬씨 ‘대학 거부’ 선언 이후
ㆍ작은 ‘돌멩이’에“심장이 찔린 20대 “거짓희망, 한판 붙자”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한 번 다 꽃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 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사진 ‘레프트21’ 제공>

지난 10일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가 대자보를 통해 대학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자발적 퇴교 선언, 아니 ‘인간 선언’이었다. 경향신문(3월11일자 1면) 보도로 이 사실이 알려졌고, 인터넷 공간이 들끓었다. 보수신문들은 짐짓 외면했지만 그렇다고 김씨의 ‘작은 혁명’을 가릴 수는 없었다. 20대들이 대학과 자본의 탑에 균열을 내는 ‘돌멩이’가 되겠다며 앞다퉈 나서기 시작했다. 인터넷포털 다음에 생긴 카페 ‘김예슬 선언’(cafe.daum.net/kimyeseuls)은 이들이 구축한 대표적 진지(陣地)다. 지난 15일 개설된 이 카페는 갓 1주일을 넘겼지만 벌써 회원 수가 600명을 넘어섰다. 카페지기 ‘꿈꾸는린’은 “이제 우리가 김예슬이 될 차례다. 우리 이대로 돌아서지 말자. 작은 돌멩이인 우리들이 함께 바위가 되자”고 밝히고 있다.

20대들은 카페에서 대학을 고발하고, 자본을 고발하고, 사회를 고발한다. 닉네임 ‘모두의리그’는 1학년 1학기 경제학개론 교수의 첫 오리엔테이션 때를 기억해낸다.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Capitalist(자본가계급)와 Labor Class(노동계급)다. 차이점이 뭔지 아나? 이런 거다. 내가 은행에 간다. 사람들이 1층에서 줄서가며 번호표 뽑고 찌질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2층 VIP실로 올라가 여유롭게 커피 마시면서 일 본다.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Capitalist가 되어라.” ‘열정의사람’도 비슷한 사례를 든다. “한 교수님이 이렇게 강의하시더군요. 여러분은 상품입니다. 스스로의 상품가치를 높여야 하죠. 각 기업마다 원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자신을 기업이 원하는 상품으로 만들어가십시오.”

‘로빈’은 자신이 과외를 ‘때려친’ 이유를 털어놨다. 고3 학생을 과외할 때였는데, 학생의 공부시간과 잠자는 시간, 밥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남는 시간(자유시간)을 함께 계산해봤다. 1주일 가운데 8시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미친 짓을 하고 있다, 애들 죽이는 짓을 하고 있다는 충격에 모든 과외를 다 접었다고 했다. 물론 그만뒀다고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과외 말고 다른 방법으로 밥벌이 하려고 발버둥을 쳐야 했으니까.

20대는 김예슬씨가 언급했던 ‘대학과 기업, 국가의 큰 탓’을 묻는 동시에 ‘그들의 유지자가 되었던 자신들의 작은 탓’도 묻는다. “대자보 읽는 내내 마음이 숙연했습니다. 저도 대학교 3학년생이지만 이만큼 깊은 성찰을 해보지 않았기에…. 그저 세상과 타협하려고만 했기에…. 더욱 부끄럽고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분명 아주 오래 전에는 어른이 되면 옳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어릴 적 꿈은 물거품이 되어 지금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습니다.”(르마조) “제 꿈은 잃어버린 채 학점에 매달리고 스펙에 매달리며 살아가고 있네요. 저는 예슬씨만큼 용기있지는 못해서 자퇴까지는 못할 거 같아요. 그러나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아서 도전해야겠다 결심했습니다.”(purplerain) “가슴 깊이 김예슬을 지지하고 그와 이념을 같이하면서도, 나의 현상으로 돌아오면 이리저리 판단을 잰다.”(mann)

지난 10일 김예슬씨가 자발적 퇴교를 선언하며 고려대 정경대 후문에 붙인 대자보를 한 학생이 읽고 있다. 김정근 기자

카페는 20대의 고통을 몰랐거나, 혹은 알면서도 외면했던 기성세대들의 자성의 장이 되기도 한다. 지천명의 나이라는 최흥집씨는 “나에게 날카로운 돌덩이 하나가 날아왔다. 내 자식들보다도 작은 아이가 사회를 향해 일성포효를 하고 있다.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다. 용서를 빈다”는 글을 올렸다. 내년에 대학 갈 딸을 뒀다는 ‘열공줌마’는 “sky에 어떻게든 밀어넣어보고 싶어 아이를 다그치는데 정작 무엇을 위한 건지요. 내몰리는 내 아이가 안쓰럽고 대학에서 버거운 젊음이 가슴 아프네요”라고 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김예슬씨의 자발적 퇴교에 대해 “줄 세우기에 대한 20대의 분노가 임계치에 도달했다는 의미”라며 “비등점에 이르러 물이 끓어오른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 교수는 최근 무상급식 문제가 지방선거 핵심 이슈로 부상한 것과도 연결지어 설명했다. “우리 사회가 ‘다른 사회’ ‘다른 질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상징적 사건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김예슬씨를 응원하기 위해 16일 열린 문화제에서 록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김창길 기자

김예슬 선언 이전의 20대는, 김예슬씨가 대자보에 쓴 대로 ‘빛나는 G세대’이거나 ‘빚내는 88만원세대’였다. 물론 전자에 속하는 건 선택받은 극소수이며 대부분은 후자에 속한다는 걸 20대도, 기성세대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현실이 남루하기에 모두들 모른 척했을 뿐이다. 그러나 김예슬씨의 자발적 퇴교 선언으로 현실은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누구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김예슬씨의 말처럼 “작지만 균열은 시작된” 것이다.

물론 당장은 김예슬씨가 탑에 낸 균열이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대자보는 벌써 사라졌고, 세상은 예전과 다름없이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원래 균열이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법이다. 균열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엔, 이미 탑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니까. 그땐 손을 써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김예슬씨의 대자보는 이렇게 끝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